“처음에 너무 과도한 약을 쓸 수 없습니다. 금융안정대출이나 SPV 재가동을 추후 논의할 수는 있지만, 지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책입니다. 대책은 타이밍이 있습니다. 필요할 때 하겠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자금시장 경색 위기가 고조되면서 정부가 부랴부랴 ‘50조원+α(알파)’ 규모의 유동성 공급 조치를 마련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한 분위기다. 금융위원회는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은행이 ‘신규 자금 공급’ 역할의 정책들을 추가로 내놔야 한다며 연일 압박하는 모습이다. 금융위원장은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설립까지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SPV 설립은 한은의 발권력(돈을 새로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동원하는 도구로, 한은 입장애선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카드다.

당사자인 한은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중 자금이 한전채·산업금융채권(산금채) 등에 쏠려서 일반 회사채·시중은행채에 돌지 않는 이른바 ‘돈 배분’의 문제인 만큼, 새 돈을 직접 주는 조치는 과도하다는 취지에서다. 더욱이 이는 물가와 환율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높이고 유동성을 조이고 있는 현 한은 기조에 역행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재정·통화정책의 엇박자로 자칫 영국처럼 대외신인도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금융당국 수장들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이창용(왼쪽) 한국은행 총재와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 금융위원장의 입에서 나온 ‘한은 역할’ 강조

25일 경제·금융당국에 따르면, 전날 진행된 이 분야 국회 국정감사는 정부가 지난 23일 발표한 ‘50조원+α(알파)’ 규모 유동성 공급 지원 조치에 대한 효과와 책임을 따지는 자리가 됐다. 강원도 춘천 레고랜드의 2000억원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불이행(디폴트), 그리고 이로 인한 특수목적법인(SPC) ‘아이원제일차’의 부도가 일어난 지 한달 가까이 돼서야 내놓은 대응책이었지만, 채권시장은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이고 있어서다. 일각에선 “이 정도 대책 가지곤 안 된다”는 인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금융위는 시장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추가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 책임의 화살은 중앙은행인 한은을 향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위·금융감독원 종합감사에서 “(이미 조성하기로 한)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의 경우 금융기관의 출연금이라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면서 “조만간 한은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열 것으로 아는데, 지금 시점에서 한은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할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그 조치 중 하나로 ‘SPV 재가동’을 언급했다.

앞서 정부가 발표한 조치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채안펀드를 조성해 회사채·기업어음(CP)을 직접 사주는 것, 그리고 한국증권금융을 통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 돈이 묶인 증권사에 급한 돈을 꿔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책의 핵심인 회사채·CP 매입을 위해 자금(펀드 재원 등)을 마련하려면 은행·증권사 등 금융기관들로부터 일종의 ‘기부금’을 모아야 하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작 자금이 필요한 곳이란 거다. 이를 위해 은행채 등이 대량으로 발행되면 쏠림 현상과 이에 따른 자금 경색 문제가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이 때문에 한은이 직접 신규 자금을 시장에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금융위의 요구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카드가 적격담보증권이다. 현행 국채·통화안정증권·정부보증채 등 국공채에 제한된 한은 대출의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공공기관채·은행채’ 등을 추가하는 방안이다. 이는 실제로도 한은이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한은은 오는 27일 금통위 회의를 통해 관련 방안이 의결될 방침이라고 이날 밝혔다.

두번째 카드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한 돈 풀기다. 이는 RP 거래 대상이 되는 적격 증권만 제시하면 매입 요청한 금액을 한은이 모두 공급하는 방식인데, 그 대상 증권에 회사채·공사채를 포함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한전채 등을 가진 증권사가 있다면 이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겠다는 셈이다. 한은은 이 역시 필요 시 논의해볼 수 있는 선택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 한은 관계자는 “한은의 지급결제망에 기왕 증권사들이 참여하고 있으니 RP 거래를 통해 자금을 주입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라며 “우리가 쓸 수 있는 툴(tool·도구)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자금 공급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24일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 /연합뉴스

◇ ‘최후의 보루’ 발권력 동원 SPV 가동까지 요구, 불편해진 한은

문제는 현재 금융위가 이런 조치를 넘어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SPV 설립 및 가동처럼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써야 한다는 취지다. 한은법에 따르면 중앙은행인 한은은 영리기업에 직접 대출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는데, 단 제80조에 따라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는 금통위원 4명 이상의 찬성으로 영리기업에 대해 대출할 수 있다.

SPV를 통한 대출은 제80조를 발동한 대표적 예다. 더욱이 이는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으로 한은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카드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 위기 때인 2020년 이례적으로 SPV가 가동돼 총한도 10조원 규모로 조성된 적 있었지만, 운영된 10개월 동안 실제 대출을 받아간 증권사 등은 단 한 곳도 없었다.

SPV 가동이란 선택지가 금융위원장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한은 입장에서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전날 국회 기재위원회 국감에서 “금융안정대출이나 SPV 재가동을 추후 논의할 수는 있지만, 지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라며 “해외에서 이 정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발언한 이유다.

그는 “현 상황에선 증권사 중심으로 CP 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은행은 파이낸싱(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럴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처음에 너무 과도한 약을 쓸 수 없다. 대책은 타이밍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하겠다”며 판단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외에서 이 정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물가를 잡기 위해 연속해서 기준금리를 높이며 강도 높은 긴축 행보를 이어가는 한은의 기조에도 역행하는 문제다. 자칫 시중에 유동성이 너무 풀려서 안 그래도 고공행진하는 원·달러 환율 흐름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통화·재정 정책 ‘엇박자’ 문제로 대외신인도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지난 9월 영국 정부는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글로벌 시장에 혼란을 일으켰고,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