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급망 안정화 기금 신설 등을 골자로 하는 가칭 '경제안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기본법'(이하 공급망 기본법) 제정을 서두른다.
당초 계획했던 정부 입법이 아닌, 의원 입법 형태로 법 마련 방식을 검토하면서다. 정부 입법 형식은 의원 입법에 의해 비교적 절차가 복잡하고 긴 기간이 소요된다.
이는 공급망법이 하루빨리 마련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인식이 반영된 움직임으로 보인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 시행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기본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나 중국의 상황에 따라 자칫 '제2 요소수 사태'가 터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2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당초 이달 20일부터 다음달 30일까지 공급망 기본법 입법예고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전날(21일) 이를 취소했다. 기재부는 "법안의 보완 필요성에 따라 입법예고를 취소했다"고 공고했다.
표면적인 공고 사유는 법안 내용의 보완이지만, 일각에선 이것이 의원 입법 형태로의 선회를 추진하는 움직임이라는 시각이 제기됐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재부 산하 경제안보공급망기획단(공급망단)은 그간 공급망 제정을 정부 입법 형태로 추진하려고 했다. 공급망법은 기재부뿐 아니라, 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농림축산식품부 등 범정부적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란 이유에서였다.
한 정부 관계자는 "시급성을 고려해 의원 입법 형태로 추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며 "추 부총리가 정기국회 내 공급망 기본법이 제출돼 논의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스케줄을 제시한 만큼, 법안 내용 보완을 포함해 작업을 더욱 서두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제처에 따르면 입법예고 기간에는 성별영향평가·부패영향평가 등을 실시한다. 관여된 여러 부처에서 해당 법안이나 정책의 영향에 대해 평가하고 의견을 제출해야 하기에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법제처 심사, 차관·국무회의 그리고 대통령 재가를 거쳐서야 비로소 국회에 제출된다. 소관 상임위 위원을 설득해 바로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수 있는 의원 입법 방식에 비해 다소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공급망 교란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이 정부의 발걸음을 재촉한 모양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예비군 30만 명 규모의 '부분 동원령' 발동을 공식 선언했다. 이런 방침이 전해지자마자 국제 유가는 급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 미국은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업에 대해 중국을 비롯한 특정 국가에 설비의 신설·증설 투자를 제한하는 '반도체 지원법' 집행 준비에 속도를 내는 등 세계 공급망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양분, 재편되는 움직임을 보이는 형국이다. 한국산 전기자동차 보조금 차별 논란이 제기되는 미국 IRA 통과 등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응 문제 역시 주요하게 부상하고 있다.
겨울을 앞두고 지난해 말 있었던 요소수 품귀 대란이 '제2′의 형태로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점 역시 법 제정의 시급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산업별 연계 효과나 공급망 위험 요인 분석이 부실했던 데다가, 재고 비축량도 부족해 발생한 것이 지난 요소수 사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러시아의 유럽(EU) 천연가스 전면 공급 중단 사태가 장기화하고 그로 인해 유럽 내 각종 산업들에 생산 차질이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제2의 요소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의 분석을 내놨다. 또 다른 보고서를 통해 중국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 추진의 영향으로 요소수 품귀 사태와 같이 중국 의존도가 높은 일부 제품의 수급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일각에선 공급망 기본법이 다수의 부처가 얽혀 있다 보니, 정부 입법의 복잡한 절차를 고려할 때 예상보다 입법이 더욱 지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란 시각도 제기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요소수 사태 초반 산업부·환경부·외교부·기재부 등 관계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 문제와 업무 조율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지적에 따라 생긴 것이 '경제안보 핵심품목 태스크포스(TF)'(공급망단 출범 전 임시 조직)이자, 공급망법"이라며 "부처들 의견 조회 과정에서 각기 다른 입장이 부딪힌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끌고 결국 누더기 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현재 정부가 제정 준비 중인 공급망법에는 공급망 교란으로 수급난에 빠진 국가 핵심 산업에 재정·세제·금융 지원을 하거나 위기 대응 매뉴얼을 위한 법적 근거가 담긴다.
공급망 안정화 기금을 신설하는 것 역시 기본법의 핵심 내용이다. 정부 보증부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수출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이 관리하는 별도의 재원을 마련하고, 경제 안보에 우려가 될 수 있는 품목을 선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어떤 품목이 위기관리 대상인지를 지정하는 내용 역시 이 법에 담길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