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해 올 겨울 유럽연합(EU) 경기가 침체될 경우 우리나라 산업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대(對)EU 수출이 둔화되는 것은 물론, 전 세계 천연가스 확보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내 에너지 수급도 불안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천연가스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가스 수입 부담이 갈수록 확대되면서 국내 도시가스 요금 인상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15일 발표한 '러시아 가스공급 중단 관련 EU 생산차질 및 국내 산업리스크 점검'이라는 제목의 'BOK이슈노트'에서 "올 겨울 러시아의 유럽행 천연가스 공급 전면 중단으로 EU 경제의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고 광범위한 생산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 산업에는 에너지 시장의 수급불안, 주력 산업의 생산차질과 원가상승 리스크가 적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올 겨울 러시아발(發) 가스 대란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의 자국 제재에 맞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 이달 1~12일중 러시아의 일평균 대EU 가스공급 규모는 지난해의 20% 수준까지 감소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연초 10배 수준까지 뛰었다.
보고서는 "겨울철을 앞두고 EU의 가스공급 차질이 심화될 경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유럽 경제의 생산차질과 수요 둔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실제 2020년 기준으로 EU는 전체 에너지 소비의 약 24%를 천연가스에 의존했고, 천연가스 사용량의 36%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러시아가 가스공급을 중단할 경우 향후 1년간 EU의 경제 성장률이 0.4~2.6%포인트(p) 정도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EU 성장률이 1%p 떨어질 때마다 우리나라의 대EU 수출은 1.24%p, 총수출은 0.19%p씩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국내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국내 액화천연가스(LNG) 재고가 평년 수준을 상당폭 밑도는 상황에서 러시아 가스공급 중단과 겨울철 수요 확대가 맞물릴 경우 각국의 LNG 확보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내 에너지 수급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보고서는 "주요 LNG 수출국인 호주가 수출제한 조치를 검토하는 등 향후 수입 여건은 불투명하다"며 "천연가스 도입가격 상승시 관련 공기업 등의 수익성 악화와 전기·가스 요금의 추가적인 인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천연가스를 생산 원료로 사용하는 실리콘 웨이퍼, 비료 등 화학제품은 생산원가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EU에서 광범위한 생산차질이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조선·반도체·자동차에서 EU산 핵심 자본재·중간재 공급부족에 따른 생산차질이 우려되고 화학·철강 등은 생산원가가 상승할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보고서는 "반도체 장비나 선박엔진과 같은 일부 자본재·중간재는 EU 의존도가 높은 데다 대체도 어려워 EU산 공급이 부족할 경우 국내 생산 차질도 불가피하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국내 주요 기업은 네덜란드 ASML이 만든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전량 수입하는데, ASML은 반도체 제조용 장비의 부품인 렌즈 등 광학기기를 독일 칼자이스에서 독점 공급받고 있어 독일 부품의 공급차질은 네덜란드 생산차질에 이어 국내 설비투자 제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남주 한국은행 조사국 동향분석팀 차장은 "우리나라 EU 국가별 수입규모, 수입대체 가능성, 글로벌 공급망 노출 정도 등을 감안할 때 독일의 생산차질이 국내 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러시아의 가스공급 중단에 따른 경제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에너지 수급안정 노력을 강화하는 한편, 우리 경제에 영향이 큰 수입 품목들을 중심으로 선제적인 재고 확보, 수입선 다변화, 해외 공급망 정보 확충·공유 등에 더 신경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