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 수확 철에 들어선 농가 사이엔 “풍년이 고민”이라는 씁쓸한 말도 들려온다. 시장 격리·직불금제 등 쌀 행정 운용의 탓이기 이전에, 쌀의 과도한 공급에 따라 쌀값이 폭락하는 일이 빈번한 탓이다. 식습관이 변하면서 밥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나라가 됐는데도,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벼농사를 짓고 있을 만큼 쌀 재배를 줄이기는 쉽지 않은 현실에 따른 것이다.

‘가루쌀’, 특히나 가장 최근 개발된 품종인 ‘가루미’(특허명 ‘바로미2′)는 이런 구조를 타개할 ‘구원투수’로 떠오르고 있다. 보통의 벼와 수확 방식이나 형태는 같지만, 그 성질이 밀과 비슷해 밀가루 공정 방식으로 빵·면·맥주 등을 만들 수 있다.

일반적인 멥쌀을 물에 불려 가루로 만드는 방식의 전통 쌀빵은 식감이 퍽퍽하단 단점이 있었는데, 가루미는 밀처럼 바로 부스러뜨려 반죽으로 만들 수 있고 그 식감도 촉촉하게 개선됐다. 정부는 이런 쌀가루로 밀가루 관련 수요를 일부 대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윤석열 정부의 역점 농정사업으로 내걸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저온저장고에서 관계자가 가득 쌓여 있는 벼 포대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갈수록 쌀 안 먹는데...쌀농사 과잉 구조는 여전

11일 기획재정부와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따르면, 내년도 농식품부 예산 중 가루쌀과 관련된 사업 몫이 비중 있게 편성됐다. 가루쌀 산업 활성화에 107억원, 전략작물직불에 720억원이 새로 편성된 것이다. 전략작물직불 사업은 가루쌀 혹은 밀·콩 같은 전략 작물을 재배하면 재배 면적(㏊)당 50만~250만원을 지원하는 것이다.

두 사업 모두 가루쌀 생산과 보급을 늘리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지난해 기준 가루쌀 재배 면적과 생산량은 각각 25헥타르(㏊)와 119톤(t)이었는데, 정부는 이를 2026년 기준 4만2000㏊, 20만t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래픽=이은현

가루쌀 산업화가 중요한 정책으로 부상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만성적인 쌀 과잉 구조 때문이다. 쌀 먹는 사람은 빠르게 주는데, 쌀농사는 여전히 많이 짓는 탓이다. 국민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2021년 기준 56.9㎏으로, 1970년 136.4㎏에 비해 절반 넘게 줄었다. 흉년·풍년 시기의 영향이 맞물리면서 2020년 최저 수준(350만6578t)으로 내려왔던 쌀 생산량은 지난해 다시 388만t으로 늘어났다.

자연스레 쌀값은 지난해 10월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이어갔고, 최근엔 4년 반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통계청 산지쌀값조사 통계에 따르면, 쌀(정곡) 20㎏ 가격은 4만1185원으로 2018년 2월(4만448원)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려 10년 전인 2013년(4만원대)과도 가격 차이가 거의 없다.

그래픽=이은현

◇ 멥쌀과 밀 사이 성질 가진 ‘가루미’, 구원투수로

정부의 전략은 쌀의 활용도를 높여 장기적으로 수요를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다. 공급을 줄이기 위해 벼 재배 인프라를 포기하는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식량안보 측면에서나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가루미 품종이다. 쌀을 밥이 아닌 빵이나 면의 원료로 쓰려면 먼저 가루로 빻는 작업이 필요한데, 일반 멥쌀은 단단한 탓에 갈기 전에 물에 불리는 ‘습식 제분’ 방식이 필요하다. 쌀가루 1t을 생산하기 위해 물 5t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이든, 시간이든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탓에 그간 쌀은 가공용으로 선호되지 않았다.

농촌진흥청은 이런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유전자를 전국 각지 쌀 품종들에서 검출해, 가루미를 만들어냈다. 작은 힘으로도 쉽게 빻을 수 있어, 밀가루처럼 ‘건식 제분’이 가능하다. 정지웅 농진청 연구관은 “기술적으로 대형 제분 회사에서 쓰는 밀 제분 설비에 가루미를 그대로 넣어도 가능한 것으로 시범 평가 결과가 나오고 있다”며 “농식품부와 협의해 조만간 관련 시뮬레이션에 나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시에 위치한 쌀빵 전문점 '세종명가'에서 가루미를 활용해 빵을 만드는 모습. 현재 가루미 1t 이상을 사용하고 있는 빵집은 전국에 9군데 뿐이다. /세종=박소정 기자

이는 쌀 소비 수급 불균형 개선뿐 아니라 ‘논 활용 효율화’, ‘식량 안보 대응’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일반 벼의 모내기 작업이 5월 말까지 이뤄져야 하는 데 반해, 가루미의 이앙 적기는 6월 말이다. 6월 중순에 이뤄지는 밀 수확 작업 이후 이모작이 가능한 셈이다. 땅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에 효율적이다. 또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 대신 가루쌀의 생산량을 늘리면 곡물자급률을 높여, 글로벌 공급망 같은 사태에 따른 수급 불안도 해소할 수 있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이 2016년 농촌진흥청장 시절 이런 가루미를 개발한 것을 두고 “기가 막히다”, “신의 선물이다”라고 극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정부 들어 가루쌀 띄우기는 더욱 본격화하고 있다. 정 장관은 자신의 취임사부터 내년도 예산안까지 가루쌀 산업을 지속해서 강조하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민생 현장 점검 자리에서 쌀 코너를 둘러보며 “쌀 가공식품을 개발하고 판매가 돼야 쌀값도 좀 안정되지. 국수도 만들고 빵도 좀 만들고…”라고 언급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민생 현장 점검을 위해 한 대형마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쌀 코너를 둘러보며 쌀 가공식품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 /YTN 캡처

◇ “얼마나 찾을지가 성공 관건”…가루미 빵집 가보니

성공 관건은 사람들이 얼마나 찾을지 여부다. 이제 막 개발과 보급에 걸음마를 뗀 만큼, 가루미는 아직 소량 재배되는 데 그친다. 대중화를 위해 농진청 연구관들이 직접 쌀빵집을 찾아가는 등 발품을 팔아 샘플 사용을 제안하고 다니기도 했다. 현재 가루미 1t 이상을 사용하고 있는 빵집은 전국에 아홉 군데뿐이다.

세종시에 있는 ‘세종명가’도 그중 하나로, 연구관의 권유로 가루미를 쓰기 시작한 지 3~4개월 됐다고 한다. 20㎏짜리 포대 안에는 쌀알이 아닌 밀가루처럼 곱게 갈려진 가루쌀이 들어 있었고, 제빵사는 여느 빵을 만들 때와 같이 바로 반죽기에 가루미를 털어 넣고 계란·우유·이스트 등 재료를 배합에 맞게 넣었다. 찰지게 빚어진 반죽을 숙성시킨 뒤 틀에 나눠 넣고 구우니, 구수한 식빵이 부풀어 올랐다.

가루미로 만든 쌀빵의 모습. /세종명가 제공

최창주(32) 세종명가 대표는 “일반 쌀을 빻아서 빵으로 썼을 때보다 (가루미 빵은) 훨씬 촉촉하고 쫀득한 식감”이라며 “(건식제분 방식으로) 물을 먹을 필요가 없으니, 같은 1㎏으로 만든다고 치면 일반 쌀보다 카스텔라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밀도 전혀 섞을 필요가 없는데, 글루텐이 없다 보니 먹었을 때 더부룩한 느낌이 없다”며 “여러모로 품질이 좋아서 내년에 계약재배 형식으로 가게에 들이는 방식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일반 쌀보다 10% 정도 높게 가격이 책정된 점은 다소 걸림돌이다. 20㎏ 포대를 기준으로 하면 일반 쌀과 1만원이나 차이가 난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가장 저렴한 수입 밀에 비해 우리 밀이 2~3배 비싸고, 이에 비해 일반 쌀이 1~2배 더 비싼 현실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이에 대해 농진청은 아직 보급이 본격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루미 벼이삭의 모습. /농촌진흥청 제공

정지웅 연구관은 “수발아(강우로 젖은 상태가 지속될 때 종자가 이삭에 붙은 채로 싹이 나는 현상) 취약 해결법이나 글루텐 흉내 단백질을 유전적으로 확보하는 연구 등 과제가 아직 남아 있긴 하다”면서 “개발자 입장에선 정말 제 아들딸 같은 애들(가루쌀)인 만큼, 가치 있게 취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