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는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경제학계를 중심으로 '경기 연착륙(soft landing·소프트랜딩)' 논쟁이 활발하다. 연준은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려도 고용시장이 견조할 것이라고 보는 반면,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등 경제학자들은 경기침체와 실업률 증가 없이는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잡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은 빈 일자리가 크게 늘어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노동공급이 풍부한 상황이라 경기 경착륙(hard landing·하드랜딩) 우려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베버리지 곡선을 통한 노동시장 평가: 미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BOK이슈노트'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서는 연준의 긴축에 따라 과열된 노동시장이 어떤 조정 과정을 거칠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미 경제학계는 현재 노동시장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베버리지 곡선'(Beveridge curve)을 사용하고 있다. 베버리지 곡선은 노동공급을 보여주는 실업률과 노동수요를 보여주는 빈 일자리율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미국의 베버리지 곡선은 바깥쪽으로 우상향하는 흐름(매칭 효율성 악화)을 보였고, 국내 베버리지 곡선은 소폭 안쪽으로 좌하향(매칭 효율성 개선)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일반적으로 베버리지 곡선은 경기 침체기에 더 바깥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두고 보고서는 "한국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노동공급이 빠르게 회복된 반면, 미국은 자발적 퇴직 증가, 이민 감소, 대규모 재정지원(실업급여 확대)으로 인한 노동공급 부족 문제에 직면하면서 매칭 효율성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감염병이 크게 확산된 시기를 제외하면 경제활동참가율이 팬데믹 이전 수준을 꾸준히 상회한 반면, 미국은 팬데믹 초기 경제활동참가율이 큰 폭 하락한 이후 여전히 팬데믹 이전 수준을 밑도는 중이다.
보고서는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노동공급이 충분하게 이뤄지면서 팬데믹 기간 중 기업의 구인 성공률이 크게 상승했고, 이는 지난 2년간 임금상승 압력을 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구인 성공률(job filling rate)이란 신규 일자리수를 빈 일자리수로 나눈 것으로, 기업이 빈 일자리를 얼마나 쉽게 채울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들이 보다 쉽게 빈 일자리를 채웠기 때문에 노동수요 증가에도 불구하고 빈 일자리가 과도하게 쌓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미국은 노동공급 부족으로 구인 성공률이 2021년 이후 지속적 하락했다"며 "기업의 빈 일자리가 제때 채워지지 못하면서 노동시장 매칭 효율성이 떨어졌고, 이는 임금상승 압력을 높이고 있다"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이 현상에 대해 미 연준은 빈 일자리가 전례없이 과도하게 쌓여있기 때문에 금리인상을 통해 노동수요가 줄어들더라도 실업률이 크게 변하지 않은채 빈 일자리만 감소하면서 경기가 연착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경기 경착륙을 주장하는 올리비에 블랑샤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 연구원 등은 실업률 증가 없이 빈 일자리만 감소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역사적으로 빈 일자리율 하락은 실업률 상승을 동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빈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 같은 경기 논쟁의 여지는 크지 않은 상황"이라며 "국내 노동시장은 정점을 지나면서 빈 일자리가 줄어들고 실업률이 자연실업률 수준으로 점차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서 지난달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한 금통위원이 베버리지 곡선을 언급했다. 해당 금통위원은 "실업률과 빈 일자리율(노동수요)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베버리지 곡선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 낮은 실업률 하에서 빈 일자리율이 높은 상황인 만큼 금리인상으로 경기가 하강하더라도 노동수요 축소가 먼저 나타난다면 고용손실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