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킹달러(King Dollar·달러화 강세) 시대에 들어섰다.”

5일 원·달러 환율이 금융위기 이후 13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1370원을 돌파했다. 하루 만에 8.8원 뛰면서 4거래일 연속 연고점을 경신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긴축 기조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에 달러화 초강세가 이어진 가운데 유럽 에너지 위기, 중국 경기둔화 우려 등으로 주요국 통화 가치가 일제히 하락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진 결과로 풀이된다.

정부가 이날 오전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구두 개입성 발언을 내놓았지만, 환율 상승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러시아발(發) 유럽 에너지 공급 불안, 중국 경제 경착륙 가능성 등 원화 약세를 부채질하는 대외 악재가 단기간에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도 당분간 추가 상승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현재 추세라면 환율이 조만간 1400원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원·달러 환율이 1370원을 넘어선 5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모니터에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8.8원 상승한 1371.4원에 마감했다. 이날 2.4원 오른 1365원에 연고점을 경신하면서 출발한 환율은 오전 중 가파르게 상승해 1370원을 넘어섰고, 오후 들어 1374.7원까지 고점을 높이면서 1375원 목전까지 치솟았다. 환율이 1370원을 돌파한 것은 금융위기 당시였던 2009년 4월 1일(장중 고가 기준 1392원) 이후 13년 5개월 만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미국의 고강도 긴축에 따른 ‘킹달러’(King Dollar·달러화 강세)와 유럽 에너지 대란으로 인한 유로화 가치 하락, 중국 경기 둔화 우려가 촉발한 위안화 약세,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세계 경제가 ‘킹달러’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당분간 미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p)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3회 연속으로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미 중앙은행이 긴축을 시사하자 달러화 강세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DB

앞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말 잭슨홀 연설에서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두고 긴축 기조를 지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이후 시장의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높아졌고, 대표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달러화는 이날까지 초강세를 보였다. 이날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전 거래일보다 0.6% 오른 110.168을 기록하면서 110선을 돌파했다. 이는 2002년 6월 이후 20년 3개월 만에 최고치다.

러시아가 독일 등으로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통로인 ‘노르트스트림-1′을 완전히 잠그면서 사실상 유럽 가스 공급을 차단하자 유로화 가치는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4일(현지시각) 장 초반 유로·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0.7% 내린 0.9889에 거래됐다. 이날 유로화와 달러화의 가치가 동일해지는 ‘패러티(parity)’가 무너진 것은 물론, 0.99달러선마저 깨진 것이다.

중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위안화 가치가 급락한 점도 원화 약세를 부추겼다. 4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은 위안화 가치가 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중국과 가까운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통화가치 평가절하가 촉발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위안화는 바이든 정부의 대중 무역체제 유지 계획과 코로나 도시 봉쇄 재개의 여파로 달러당 6.92원대까지 오르면서 약세를 보였다. 원화는 위안화 가치와 연동되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독일 루브민에 있는 노르트스트림1 발트해 천연가스관 육상 인입·중계 시설 뒤편으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올해 들어 확대되고 있는 점도 원화 약세 요인으로 거론된다. 우리나라 8월 무역수지 적자는 94억7000만달러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6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무역수지 적자가 늘면 국내로 들어오는 달러화가 줄어 환율이 추가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한국은행은 최근 원화 약세 배경에 대해 “미 연준의 금리인상에 대한 기대 변화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중국 경기침체 우려, 중국과 대만간 지정학적 긴장 고조 등에 따른 위안화 약세,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 지속 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환율이 치솟고 무역수지 적자폭이 커지자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 수장들이 이날 오전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환율 상승을 막진 못했다.

추 부총리는 “국내 금융시장 변동성의 확대는 주로 대외여건 악화에 기인한다”며 “달러화가 20년만에 최고치까지 상승한 영향으로 주요국 통화 모두 달러화 대비 큰 폭의 약세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융·외환시장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면서 관계기관 간 긴밀한 공조 하에 필요시 선제적으로 대응해 시장 안정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달러화 강세 현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럽과 중국을 둘러싼 대외 악재까지 겹치면서 원·달러 환율이 추가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환율 1400원 돌파는 시간 문제라는 의견도 나온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러시아발 유럽 에너지 공급 불안과 중국 도시 봉쇄 재개에 따른 경기 둔화 우려는 단기간에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화 약세 부담도 커지고 있다”라며 “환율 상단은 1400원까지 열어놔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오는 8일 유럽중앙은행(ECB)의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 동참 여부와 이후 금리인상에 대한 신호는 단기적으로 유로화의 추가 약세를 판가름할 변수”라고 말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다음 주 미국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발표 전까지 외환시장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원·달러 환율도 지금의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