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지난주 잭슨홀 연설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긴축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연준이 다음달까지 3차례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p)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것이란 관측에 한국은행도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연 3%까지 추가로 0.5%p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잭슨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지난달 30일 "파월 의장의 이번 연설은 한국은행이 8월 기준금리를 결정하면서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당시 밝혔던 향후 통화정책 운용 방향에도 변함이 없다"면서 추가 금리인상을 예고했다.
◇ "한국은행, Fed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아"
이 총재는 지난달 25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지만, 미 연준으로부터는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연착륙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국은행이 그 어떤 조치를 취해도 외부에서 오는 충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면서 이같이 답했다. 국제유가 흐름이나 미국 경제 상황, 연준의 긴축 정책 등에 발맞춰 한국은행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한국은행은 잭슨홀 회의 이후 이 총재의 발언, 블로그 게시글 등을 통해 물가 안정과 금리인상 의지를 연이어 강조했다. 이 총재는 시장에 충격을 준 파월의 '매파(통화긴축 선호)' 연설 이후 "연준이 오는 9월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p)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점진적으로 0.25%p씩 올리는 기존 통화정책 방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은 '금리인상 지속을 통해 높은 물가 상승압력을 억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성장과 취약부문에 더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을 통해 지속적인 금리인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해당 블로그를 작성한 홍경식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장은 "지금은 어느 정도의 성장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고물가 고착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파월 의장의 잭슨홀 회의 연설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은행 조사국은 '고인플레이션 지속가능성 점검'이라는 제목의 블로그에서 지금의 고(高)인플레이션 상황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만큼,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억제를 위한 금리인상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사국은 해당 블로그에서 가계와 기업이 예상하는 미래 물가상승률인 기대인플레이션이 4%대의 높은 수준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임금 인상이 물가를 밀어올리는 '임금·물가 악순환'이 나타날 경우 고물가 국면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세 차례에 걸쳐 경험한 지속적이고 높은 인플레이션은 당시 연준의 미흡한 물가 대응에도 상당 부분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과거의 경험을 교훈 삼아 파월 의장은 최근 잭슨홀에서 인플레이션이 안정될 때까지는 긴축적인 정책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고 언급했다.
◇ 내년 추가인상 횟수는 9월 FOMC 지나야 분명해질 듯
앞서 이 총재는 7월 금통위에서 "국내 물가와 성장 흐름이 기존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두고 계속 0.25%p씩 금리를 점진적으로 인상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8월 금통위에서는 전월과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당분간 물가 중심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당분간'은 3개월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사실상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연 3%로 올리겠다고 예고했다.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둔 통화정책'이라는 메시지는 같았지만, 시장은 한국은행이 사상 첫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한 7월 금통위와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한 8월 금통위 결과에 다르게 반응했다.
물가를 더 강조한 7월 금통위에서는 시장 관계자들이 물가 피크아웃(정점 통과)이 10월쯤 이뤄질 것이란 점을 감안해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기조가 연 2.75%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반면, "한국은행은 연준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연준의 9월 금리 결정을 봐야 한다" 등의 발언이 나온 8월 금통위에서는 금리인상 기조가 내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으면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치솟았다.
한·미 기준금리 역전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 총재의 답변도 약 사흘 만에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 총재는 8월 금통위에서 한·미 금리격차 확대가 원·달러 환율 추가 상승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한·미간의 금리 격차와 자본유출, 환율의 움직임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관계된 것은 아니고 많은 다른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는 "한·미 금리격차가 크게 벌어질 경우 원화 가치가 평가절하되면서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향후 대외 여건에 따라 추가 금리인상 횟수에 대한 한국은행의 입장도 바뀔 수 있는 만큼, 연준의 9월 금리 결정 이후 열리는 10월 금통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9월 FOMC 이후 글로벌 경기 전망과 금융시장 반응을 확인한 뒤에 한국은행의 정책 기조도 조금 더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했다.
◇ 이창용 총재 말 한마디에 채권시장 불확실성 극대화
이창용 총재는 한 달 사이 달라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유연한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통화정책 방향성을 미리 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등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포워드 가이던스도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조정돼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총재의 발언을 받아들이는 금융시장에서는 이 총재의 '오락가락' 행보 때문에 시장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은행이 사상 첫 빅스텝을 단행했던 지난 7월 13일 금통위에서 이 총재는 "앞으로 물가 흐름이 3분기 말~4분기쯤 정점을 찍고 꺾인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영향을 받아 이날 국채 3·5년 금리는 한은 빅스텝에도 불구하고 각각 8bp(1bp=0.01%p)씩 하락하는 강세장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 총재가 "연준에 독립적일 수 없다"고 한 지난달 25일 금통위 직후에는 국채금리가 하루 만에 20bp씩 급등하는 패닉 약세장이 연출됐다.
최근의 이 총재 행보에 대해 한 금융시장 고위 관계자는 "이 총재가 중앙은행의 수장의 말 한마디에 금융시장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것 같다"면서 "과도하게 한 방향으로 쏠려있는 시장의 기대심리를 조정하는 것을 필요한 일이지만,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에 시장이 요동치는 일이 빈번해지는 것은 정책 신뢰성을 저하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