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맞닥뜨린 미국이 금리를 0.75%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더라도, 한국이 이와 비슷한 정도로 금리를 올릴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을 따라가는 게 아닌, 한국의 독립적인 통화 정책을 운용하는 게 중기적으로 물가 안정에 더 효과적일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을 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한국은 경기가 둔화할 것이고, 독립적인 통화 정책을 하면 일시적인 물가 상승만 있을 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보다 기준금리가 낮을 경우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 외화가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한국도 미국보다 기준금리를 높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논리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16일 ‘미국의 금리인상과 한국의 정책 대응’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분석했다.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에 맞춰 한국도 통화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한국의 거시경제 여건을 우선 고려해 우리 실정에 맞게 금리를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셈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정 실장은 한은이 금리를 올리려고 박차를 가할 때 “공급측 요인에 의한 단기적 인플레이션에 인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나와있는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최근 우리 경제의 상황을 보면, 물가안정목표를 큰 폭으로 상회하는 높은 물가상승세가 지속되고 있어, 물가안정을 위한 기준금리 인상이 요구된다”면서도 “미국과 한국 간의 물가와 경기 상황 차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기준금리 격차는 용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물가 상승률이 더 높고 경기 회복세가 더 강한 미국과 유사한 정도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 우리 경제에 요구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강조했다.

정 실장은 “사회후생의 관점에서 미국 금리에 동조하는 정책보다 국내 물가와 경기 여건에 따라 운용하는 독립적인 통화 정책의 효용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된다”고 봤다. 우선 미국 금리 인상의 요인을 수요 증가가 동반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분류했다. 미국 수요가 확대되면, 미국 상품뿐만 아니라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하므로 미국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한국경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반면 미국 수요가 내생적으로 축소되는 형태의 금리 인상은 미국 경기와 물가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픽=손민균

그는 “미국 수요 증가를 동반하지 않고 금리가 외생적으로 인상되면, 미국을 따라 금리를 인상할 경우 우리 경제에 경기 둔화가 그대로 파급된다”며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수행할 경우 일시적인 물가 상승 외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금리 동조화 정책에서는 미국과 같이 금리가 인상되므로 경기와 물가에 미국과 동일한 하방 압력을 받는 것으로 분석했다.

반면, 독립적인 통화정책에서는 일시적인 인플레이션 상승을 용인하면서 기준금리를 거의 조정하지 않음에 따라 국내 경기와 인플레이션은 비교적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금리가 미국보다 낮아 초기에는 환율이 상승하겠지만, 국내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제고하면서 경기 상방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미국 금리인상에 따른 미국 수요 감소의 부정적 영향을 상당 부분을 상쇄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금리가 낮은 원화가치가 점차 절상되고 수입물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안정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독립적인 통화 정책이 물가 안정에 더 효과적일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보다 기준금리가 낮을 경우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 외화가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준금리를 올려야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2000년대 이후 한국과 미국의 금리 격차로 인해 대규모 자본 유출이 발생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1999년 6월~2001년 2월, 2005년 8월~2007년 8월, 2018년 3월~2020년 2월에 한국보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높았으나, 대규모 자본유출과 외환시장 경색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근거다.

그는 “미국의 금리인상과 부분적인 자본유출에 따른 환율 상승(원화가치 절하)으로 인해 일시적인 물가상승 압력이 발생할 수 있겠다”면서도 “국내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제고하고, 수출기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등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면도 존재한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의 대외 건전성이 양호하다는 평가 덕에 급격한 자본유출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이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기준금리를 한번에 0.5%포인트(P) 올리는 ‘빅스텝’을 완전히 배제할 단계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첫 조찬 회담 이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물가가 8%대에 달하는 상황에서 빅스텝 조정 가능성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물가는 높으나 현재까지는 미국 정도는 아니라서 (한미) 금리 격차만 가지고 50bp(1bp=0.01%P) 인상을 고려할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5월 금융통화위원회 상황과 이후 7·8월 경제 및 물가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