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공식 취임하면서 ‘이창용호(號) 한은’이 닻을 올린다. 김중수 전 총재 이후 8년 만에 정통 ‘한은맨’이 아닌 외부 출신이 한은 수장이 된 만큼, 앞으로 4년간 한은 안팎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시장에서는 올해 한은의 추가 기준금리 인상 시점과 속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이창용 총재는 전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싸워야할 것”이라면서 추가 금리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동시에 경제 성장이 둔화될 경우 금리인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고물가·저성장’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 상황을 고려해 통화정책을 운용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한은이 오는 5월과 7월에 연속으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성장 하방 압력이 본격화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금리를 2차례 인상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 이창용 신임 한은 총재, 21일 취임

2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창용 총재는 이날 오후 취임식을 가진 뒤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로써 사상 초유의 한은 ‘총재 공백’ 사태도 21여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이창용 총재의 취임은 비교적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지난 19일 이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표결 없이 채택했다. 기재위는 이 총재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 등으로 활동해 다양한 정책 실무와 국제 경험을 두루 갖췄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큰 충돌 없이 보고서 채택에 합의했다.

앞으로 4년간 한은을 이끌게 된 이 총재는 전염병 확산과 전쟁으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에서 한국 경제에 필요한 통화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됐다. 당장 5월과 7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난달 기준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년 만에 4%대로 올라섰고, 올해 경제 성장률은 2%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세계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고, 물가는 밀어올리는 양상이다.

그간 한은은 높은 물가 오름세와 가계부채 증가 속도를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4차례 인상했다. 지난해 8월 연 0.5%로 사상 최저 수준이었던 기준금리는 현재 1.5%까지 1%포인트(p) 높아졌다. 시장에서 예상하는 연말 기준금리 수준은 약 2%다. 연말까지 2차례 추가 금리인상을 예상하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 총재가 190cm에 달하는 큰 키만큼 과감하게 금리를 인상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1980년대 ‘석유 파동’ 당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린 폴 볼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키가 201cm에 육박하는 장신이었다. 미국에서는 ‘기준금리가 연준 의장의 키를 따라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금리 흐름이 연준 의장의 키에 비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다만 지난 19일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이 총재의 성향만 놓고 보면 국내 금리가 연말까지 2%를 웃도는 수준까지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대표적인 '인플레 파이터'로 꼽히는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의 생전 모습.

◇ ‘저성장’ 강조…5·7월 금리인상 가능성 부각

이 총재는 청문회에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지난달 4% 넘게 상승한 소비자물가는 앞으로도 원유,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상승 영향으로 상당 기간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전망”이라며 “물가 상승 국면이 적어도 1~2년은 지속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기가 없더라도 금리 인상 시그널(신호)을 줘서 물가가 크게 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인상 속도는 올해 경제 성장률 둔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 총재는 “향후 금리가 계속 올라갈지는 성장과 물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데이터를 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성장과 물가를 균형있게 보겠다”고 강조했다. 올해 물가 상승 압력과 성장 둔화 정도를 저울질하면서 추가 금리인상 시점을 정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청문회에서 저성장을 강조한 점을 들어 금리인상이 2~3분기 중 압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 총재는 “올해 경기는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둔화 영향으로 성장세가 기존 전망보다는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아가 청년 실업, 소득불평등, 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가 성장 잠재력을 훼손해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에 빠질 우려가 커졌다고 경고했다. 구조적 저성장은 하버드대 시절 이 총재의 스승이었던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하버드대 교수)이 대중화시킨 진단이다.

또 미국이 정책금리를 빠르게 올리면서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될 가능성에 대해 이 총재가 “자본 유출이 발생할 수 있어 걱정스럽지만 감내해야 한다”고 평가한 점도 금리인상 속도조절론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으로 꼽힌다. 이 총재는 “한·미 금리가 역전되더라도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양호한 만큼 단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공격적인 긴축 속도에 맞춰 한은이 연말까지 금리를 연 2% 이상으로 가파르게 올릴 가능성은 낮다고 시사했다.

이 총재의 청문회 발언만 놓고 보면 한은이 5월이나 7월 금통위에서 금리를 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일부 시장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백윤민 교보증권 연구원은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 둔화 우려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은의 통화정책 대응이 상반기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4월 물가상승률이 지난달에 이어 4%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미 연준이 다음달 3~4일로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p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하면 한은의 금리인상 압력도 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성장세가 기존 전망보다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한 점, 경기와 물가 사이 균형을 강조한 점은 연말로 갈수록 기준금리 인상 여력이 제한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