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20일까지 우리나라 무역수지가 51억99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4월 수출입 통계가 마감하는 이달 30일까지 현 추세가 이어지면, 지난 1월(47억달러 적자)의 사상 최대 무역수지 적자 기록을 불과 석 달 만에 갈아치울 전망이다.
지난해에는 4월 20일 기준 연간 누계 무역수지가 77억6900만달러 흑자를 나타냈지만, 올해는 91억5700만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한국의 무역수지가 넉 달 가량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이후 14년 만이다.
수출 등 대외교역 활동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는 한국 경제 구조 상 무역수지 흑자 기조가 흔들리면 대외 신인도 하락이 유발될 수 있다. 가뜩이나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가채무가 급증한 상황에서, 대외 신인도 유지의 한 축인 무역수지 흑자 기조에 불확실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각종 원자재와 곡물 가격 상승이 지속될 전망이기 때문에 무역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것에 정부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 1~4월 무역수지 91억달러 적자…2008년 이후 14년만
21일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일부터 20일까지 수출은 362억85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6.9% 증가했다. 반면 수입은 414억84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5.5% 뛰었다. 수출에 비해 수입이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무역수지는 51억99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아직 4월 수출입 통계가 완전히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월 기록한 사상 최대 무역수지 적자(47억달러) 기록을 갈아치웠다. 올해 1월부터 지난 20일까지 누계로는 무역수지 적자가 91억달러에 이르게 됐다.
이같이 무역수지 적자가 가파르게 늘어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입액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품목별로 원유(82.6%), 가스(88.7%), 석탄(150.1%) 등 에너지 분야 원자재 수입액이 크게 늘었다. 이 외에도 반도체(28.2%)와 석유제품(46.4%) 수입도 늘었다.
에너지 수입액 급증은 올해 초 배럴당 76달러 수준이던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지난달 8일 123.7달러까지 치솟은 충격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유가 상승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봤으나, 국제유가는 여전히 배럴 당 100달러선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국내 원유 수입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두바이유의 가격도 올해 초 77달러 수준에서 지난 20일 103.12달러로 34%가량 오른 상태다. 통상적으로 날씨가 풀리면 에너지 사용량이 줄어 원유 수입액이 감소한다. 하지만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요 감소분 이상으로 수입액이 증가했다. 4월부터는 계절적 요인에 따른 수요 감소로 무역수지 적자가 개선될 것이라는 정부의 전망이 빗겨 나간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어 올해 들어 나타난 무역수지 적자의 개선이 정부 기대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원유 등 원자재뿐만 아니라 곡물 수입액 역시 올해 들이 매달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곡물 수입액은 9억9678만달러로, 전년 동월(7억달러) 대비 42.4% 늘었다. 월간 곡물 수입액이 9억달러대에 진입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수입 밀의 가격이 t(톤)당 400달러 선을 넘은 것이 결정타다.
◇ "일본형 무역 적자 늪에 빠질 수도"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해 이 같은 현상은 자원 대외의존도가 높은 일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무역 적자를 줄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본 재무성은 전날 2021년 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 무역수지가 5조3748억엔(한화 51조6115억원)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7년만의 최대 적자 폭이다. 일본은 아베 행정부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엔저'(엔화 가치 하락) 정책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최근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엔저 정책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전엔 일본의 수출기업들이 엔저를 바탕으로 상품을 많이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며 엔화 가치를 지켰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이 대거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등 해외 투자를 늘리면서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해외투자자들이 엔화를 팔아 달러 매입에 나서면서 엔화 가치 하락이 빨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내에서는 1980년 오일쇼크 이후 42년 만에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자체 분석을 통해 환율이 달러당 116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5달러일 경우 올 회계연도 경상 적자가 8조6000억엔(약 85조원)을 기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일본정부의 엔저 유도가 일본기업의 수익확대와 투자확대, 임금상승, 수출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일본 경제의 체력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도 원화의 무역결제 비율이 낮고 국제적 위상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수출확대 추세를 유지·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현실화된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
일본과 마찬가지로 무역수지 흑자 기조가 흔들리면서 한국의 원화 가치도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2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39원에 거래를 마쳐 1월 평균 환율(1195원)에 비해 3.6% 절하된 상태다. 일본만큼 절하율이 가파르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환율 상승으로 수입 물가 상승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가뜩이나 지난 5년 동안 문재인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재정수지 적자가 만성화된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쌍둥이 적자가 이어지는 상황은 한국의 국가신인도 하락을 유발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현재 누계 기준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는 15조1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적자 폭은 작년 동기(12조7000억원)보다 2조4000억원 확대됐다. 이에 따라 2월말 현재 국가채무(중앙정부)는 974조5000억원으로, 1차 추가경정예산 당시 정부가 전망한 연말 기준 국가채무(1044조6000억원)의 93% 수준에 도달했다.
전문가들은 국가채무 급증으로 재정건전성 악화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 기조가 장기화되는 것은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국내 물가상승 압력 확대 등을 초래한다고 우려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 정부가 고삐 풀린 나랏돈 풀기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원자재 단가 상승으로 인한 무역 적자 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면서 "국내적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인한 가계 경제 압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 교수는 이어 "물가 압박을 막기 위해선 재정 준칙을 마련하고 준칙 범위 내에서 효율적으로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