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총재가 공석인 상황에서도 기준금리를 기존 연 1.25%에서 1.5%로 전격 인상했다. 최근 물가 상승률이 4%대로 치솟고 미국의 긴축 속도가 빨라진 만큼, 금리 인상을 늦출 여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한국은행은 기존 3%였던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 중후반대로 하향 조정할 것을 시사하면서도 이날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당분간 4%대 물가상승률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금리 인상을 통해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기대 심리 확산을 차단하는 게 시급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날 한국은행이 추가 금리인상을 시사하면서 기준금리도 연말까지 연 2%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한은이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성장 둔화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지난해 8월 이후 네 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린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 물가 대응 총력전…금리 1.5%로 전격 인상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4일 오전 열린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1.5%로 0.25%포인트(p) 올렸다. 지난해 8월과 11월, 올해 1월까지 기준금리를 0.25%p씩 올린 이후 네 번째 금리인상이다. 지난 8개월간 총 100bp(1bp=0.01%p) 인상했다. 이날 금통위원 6명 만장일치 금리인상 결정으로 기준금리는 2019년 7월 이후 3년 만에 다시 연 1.5% 수준으로 높아졌다.
이번 금통위는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사상 초유의 '총재 공백' 상태에서 열렸다.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겸임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 2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창용 차기 총재 후보자의 청문회가 오는 19일 열리기 때문에 이날 회의는 주상영 위원이 금통위 의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당초 시장에서는 금통위가 총재 공석 상황을 감안해 이달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총재가 합류하는 5월 회의에서 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금통위는 현재 그 어떤 불확실성보다 물가 안정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금리인상 시점을 앞당긴 것으로 풀이된다.
주상영 의장 직무대행은 이날 통화정책방향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물가 상승 압력이 가속화된 데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총재 공석임에도 불구하고 금리인상으로 대응을 했다"며 "물가 상승률은 연간으로 4%, 또는 그에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는 등 에너지 가격이 전반적으로 뛰면서 국내 물가 상승률도 지난달 10년 만에 처음으로 4.1%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인 2%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식료품와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율과 가계와 기업이 예상하는 미래 물가상승률인 기대인플레이션율도 각각 3%에 육박했다.
한국은행은 4%대의 높은 물가 오름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면서 지난 2월에 제시한 물가상승률 전망치(3.1%)도 큰 폭 상향 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 대행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는 물가가 올해 2분기에 정점을 찍고 내려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지금은 언제가 정점이 될지 예단하기 어렵다"며 "국제유가와 곡물가격상승세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했다. 이날 발표된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는 '코로나19 불확실성' 문구가 사라지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추가됐다. 전쟁이 금리 결정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한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이날 한국은행과 만나 물가 급등 관련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인수위는 금통위 직후 비공개 간담회를 열고 4%대로 급등한 물가 상황과 향후 위험 요인 등에 대해 한은과 의견을 나눈다는 계획이다.
◇ 추가 금리인상 시사…연말 2% 전망
한국은행은 높아진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압력, 금융불균형 누적, 미국 등 주요국의 긴축 행보, 양호한 경기 회복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추가 금리인상이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금통위는 "앞으로 성장세 회복이 이어지고 중기적 시계에서 물가 상승률이 목표 수준(2%)에서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금융안정에 유의해 통화정책을 운용해 나갈 것"이라며 성장과 물가, 금융안정에 중점을 두고 앞으로 통화정책의 완화 정도를 적절히 조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하반기에도 2차례 금리를 더 올려 연말 기준금리 수준이 연 2.0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당장 다음달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p 인상하는 '빅스텝'을 예고한 가운데 연말까지 미국 금리가 3%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연준이 긴축에 속도를 내면 한·미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나면서 외국인 자본이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한국은행도 금리인상으로 보폭을 맞춰야 한다.
다만 한국은행은 5월 연속 인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 '그간의 금리인상 효과를 점검하겠다'는 문구가 빠진 것을 두고 한국은행이 5월에도 연속 금리인상을 단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주 의장은 "금리인상 효과 점검은 앞서 3차례 올렸을 때부터 계속 진행해왔기 때문에 해당 문구가 빠진 것을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 한은, 올해 경제 성장률 2%대 하향 조정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한 뒤 '물가와 성장 요인을 균형있게 살펴보겠다'고 언급한 점을 들어 한은의 추가 금리인상 압력이 다소 완화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한국은행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세계 경제 회복세가 둔화되면서 올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3%에 못 미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주 의장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 2월 전망치(3%)를 하회하는 2% 중후반대로 낮아질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사태로 물가 상방 위험을 높아진 것은 맞지만, 동시에 성장의 하방 위험도 높아졌기 때문에 앞으로 성장과 물가를 종합적으로 균형있게 보고 통화정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올해 한국 경제가 성장은 둔화되고 물가는 오르는 '저성장·고물가'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성장 하방 압력이 높아지면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동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당분간 물가 상승 부담이 이어지겠으나, 금통위가 앞으로 통화정책 결정은 경기와 물가 사이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접근하겠다고 한 만큼 5월 연속 인상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신얼 SK증권 연구원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물가 상승으로 인한 기준금리 인상 조합은 실물경제 회복 동력 둔화를 넘어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 경기 침체) 도래 가능성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며 "다만 한은이 경기와 물가를 균형있게 고려한다고 발언한 점을 감안하면 금리인상도 분기별 1회가 아니라 3분기까지 압축적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향후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좌우할 또 다른 변수로는 차기 총재를 꼽았다. 이창용 총재 후보자는 이달 초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의견이 다음달 금통위에 얼마나 반영될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