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학자 3명 중 1명은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을 낮추는 가장 큰 요인으로 ‘노동조합’을 꼽았다. 글로벌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환경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시급한데, 일부 강성노조의 과도한 요구가 노동시장 경직성과 비효율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제학자들은 근로자의 이직과 해고가 용이한 방향으로 노동유연성을 확대하는 동시에 해고자를 지원하는 사회안전망 구축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학회는 16일 이같은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노동유연성’ 설문조사에는 경제학회 경제토론패널 소속 학자 63명 중 31명이 참여했다. 한국 경제의 노동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가 어려워졌다는 판단 하에 이번 조사를 진행했다고 학회는 설명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노동시장 유연성 평가 부문에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5위를 차지했다.

16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은 시민이 일자리정보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학회는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일자리는 전년 대비 2.9% 증가했지만, 50대 이상의 일자리 증가가 전체의 79%를 차지했다”며 “일자리 규모 상위 10대 산업에서 증가가 가장 컸던 분야는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과 공공행정·국방·사회보장행정이었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시장 유연성을 낮추는 가장 큰 요인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33%가 ‘노동조합’이라고 답했다. 이어 20%는 ‘정리해고에 대한 규제’, 13%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 7%는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했다. ‘기타’ 응답도 23%에 달했다.

그간 경제학계에서는 강성노조의 과도한 요구가 청년 일자리를 차단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간의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오늘날 노동조합의 역할도 이러한 현실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도 “지금의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유연하지만 모든 노동자가 가입할 수 있는 노동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기존 근로자 보호에 중점을 둔 현재 규제 체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충분한 성과평가와 이에 따른 보상을 적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존 근로자의 고용을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준 현재의 규제 체계는 실질적으로 신규 채용에 대한 부담을 높이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안정적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냐는 질문에는 절반이 넘는 52%가 ‘강하게 동의한다’고 답했다. ‘동의함’이라는 응답도 29%에 달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6%에 그쳤다.

경제학자들은 노동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동시에 해고자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노동 유연성을 확대해야 생산성에 맞는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장이 더 공정해진다”며 “그러나 해고자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에도 크게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안재빈 서울대 교수는 “근로자들 개개인과 그 가족들에게 일자리의 안정성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존중해야 하지만, 그로 인해 기업들의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저해되어 경제 전반의 안정적 일자리 수가 증가하지 못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동시장 유연성이 확대되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 반대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조석주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가 일자리 총량은 늘릴지 모르겠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릴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