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1일 열린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정도로 경제가 튼튼하다"고 한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 원화가 미국 달러화, 일본 엔화, 유로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는 의미인데, 과연 현실성 있는 이야기일까. 경제 전문가들은 이 후보의 주장을 두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국채 발행을 늘려 재정지출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는 이 후보의 발언 취지에도 부정적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국채 발행을 늘릴 수 있다"는 발언은 경제상식에도 맞지 않고,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을 감안해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 "실질적 기축통화는 미국 달러화 밖에 없어"
기축통화(基軸通貨)는 '국제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로, 사실상 미국 달러화 하나뿐이다. 넓은 범위에서는 달러화 다음으로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화폐인 유로화, 엔화까지 기축통화로 보기도 한다.
시장에서는 기축통화국 지위를 갖추기엔 국제 결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기준에서 원화 거래 비중이 미미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외환상품시장에서 원화의 거래비중은 2019년 기준 2%에 그쳤다. 달러화(88.3%), 유로화(32.3%), 엔화(16.8%)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
민주당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최근 발행한 보고서를 이 후보 발언의 근거로 제시했다. 전경련은 이 보고서에서 "원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바스켓에 원화가 편입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원화가 기축통화에 포함된다는 이 후보의 주장과는 내용이 다르다.
IMF SDR이란 IMF 회원국들이 유동성 부족으로 외환위기 등에 처했을 때 담보 없이 필요한 만큼의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로, 기축통화와는 개념이 다르다. SDR 바스켓은 달러화, 유로화, 위안화, 엔화, 파운드화 등 5개 통화로 구성됐다. 현재 편입 비중은 달러화 41.7%, 유로화 30.9%, 위안화 10.9%, 엔화 8.3%, 파운드화 8.1%다.
전경련의 분석대로 원화가 SDR 바스켓에 편입된다면 통화 가치가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축통화 반열에 오른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국제적으로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안전자산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경제력은 물론 정치력·군사력까지 인정받는 국가의 통화여야만 가능하다. SDR 바스켓을 구성하는 중국 위안화의 경우 정부의 통제를 받는 통화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기축통화 지위를 얻을 수 없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실질적인 기축통화는 미국 달러화 하나 뿐이고, 국제적으로 호환성이 있는 통화라는 측면에서 유로화와 엔화까지 확대해서 보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기축통화라고 하기 어렵다"며 "기축통화가 되려면 해당 국가에서 국채를 발행했을 때 화폐 가치나 신인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하는데 원화는 그런 위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기축통화국은 돈을 더 찍어내도 부채를 갚을 수 있기 때문에 국가부채가 많아도 부담이 적은 편이다. 반면 비(非)기축통화국은 발권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어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지면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의 경우 달러화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받쳐주기 때문에 낮은 금리로 국채를 찍어낼 수 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국채를 발행해도 수요가 많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원화 SDR 편입은 어렵다
원화의 IMF SDR 통화바스켓 편입은 결론적으로 '어렵다'는 게 외환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IMF가 지난해 8월 공개한 SDR 팩트시트(Fact sheet·설명서)에 따르면, SDR 통화바스켓에 편입되려면 ①수출 규모 세계 5위인 IMF 회원국의 통화 ②자유롭게 이용 가능한(Freely usable) 통화라는 두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한국은 IMF 회원국이면서 전세계 수출 5위 국가이므로, 첫번째 조건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두번째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통화'라는 조건에서는 탈락이다.
낮은 원화의 국제결제 비중, 역외 거래 시장 부재, 폐쇄적인 외환 규제로 인해 원화는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지 않다. 원화는 대외 무역 거래에 사용하는 빈도가 낮다. 국제결제 비중이 세계 2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지난 1월 국제결제 통화 비중은 달러화(39.92%), 유로화(36.56%), 파운드화(6.30%), 위안화(3.20%), 엔화(2.79%) 순이다. 통화바스켓에 활용되는 통화들이 국제결제 비중에서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폐쇄적인 외환 시장도 SDR 통화바스켓 편입이 어려운 이유다. 원화 국제화의 선결 과제인 외환 시장의 역외 거래는 외환 규제에 막혀 있다. 현재 국내 외환 시장 개장 시간은 오전 9시~오후 3시 30분까지로 한정돼 있다. 미국 뉴욕 증권시장이 열리는 오후 11시 등 해외 영업 시간을 포괄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 전문가는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통화'라는 두번째 조건은, IMF 회원국 투표를 통해 70% 이상이 동의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며 "투표 절차가 있다는 것은 정성 평가, 즉 정치적인 결정까지 포함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2010년 위안화 SDR 편입을 노렸지만 고배를 마시고 2015년에 다시 편입됐는데, 여전히 '위안화가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한가'는 논쟁이 있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 국가채무비율, 빠른 증가 속도와 고령화 감안해야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50.1%(1차 추경 기준)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들보다 낮은 편이라서 재정 여력이 충분하다는 주장에도 경제 전문가들은 반박하고 있다. 절대적인 국가채무비율의 수준이 높지 않지만 그 증가 속도가 빠르고, 고령화 사회로 급속도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2025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문 정부 5년 동안 총지출 증가율(본예산 기준)은 2018년 7.1%, 2019년 9.5%, 2020년 9.1%, 2021년 8.9%, 2022년 8.3% 등으로 5년 평균이 8.6%다. 이명박 정부(6.59%)와 박근혜 정부(4.28%)의 평균 증가율보다 높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다른 선진국은 고령화가 1970~1980년대에 이미 현실화됐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부가세 등을 올리는 마지막 증세 작업을 마쳤다"며 "한국의 조세부담률, 고령화, 산업 발전 단계 등을 감안해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하면 국가채무비율은 평균을 넘었거나 근접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전경련도 23일 낸 공식 입장문에서 "한국이 비기축통화국으로 최근 재정건전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고, 국제 원자재 가격 고공행진으로 무역수지마저 적자가 지속될 수 있어 신용등급 하락 등에 따른 경제위기를 사전에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원화의 SDR 편입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며 "설령 원화가 SDR에 편입되어도 원화 베이스 국채수요가 곧바로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 재정건전성 문제는 거시경제 안정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실장은 "한국은 발권력을 가지지 못한 비기축통화국이므로 유사시를 대비한 재정건전성 확보는 거시경제의 안정성 확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며 "최근 재정건전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저출산‧고령화 등 장기적 국가부채 리스크도 상당한 만큼 재정준칙 법제화와 적극적인 세출 구조조정을 서둘러야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