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자산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의 계열사에 속하는 2612개 기업은 보유 중인 업무용 차량의 22% 이상을 전기차·수소차 등 친환경차로 채워야 한다. 렌터카·택시·버스·화물차 사업을 하는 117개 기업도 같은 규제를 받는다. 규제 대상 업체들은 내년에만 420억원 이상 비용 부담을 떠안을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계에서는 "어차피 글로벌 경영 트렌드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여서 모든 기업이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탄소중립 과속 정부가 기업의 친환경차 비율까지 통제한다"는 불만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28일 청와대 여민관 앞에서 수소차를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 규제 대상 기업, 차량 100대 구매 시 22대 무조건 친환경차 사야

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이런 내용을 담은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연간 구매 목표 제정안'을 확정했다. 이 규제는 이달 23일까지 입법 예고를 거쳐 내년 1월 28일부터 시행된다. 앞서 정부는 지난 7월 27일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친환경자동차법)' 개정안을 공포하면서 연내 구매 목표 대상 기업 등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세부 지침을 이번에 완성한 것이다.

규제 내용을 보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자산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 2612곳은 내년부터 차량을 살 때 '친환경차 22%, 전기차·수소차 13%' 비중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구매 목표제 대상인 A 기업이 2022년에 차량 100대를 살 계획이라면 일단 13대는 무조건 전기차·수소차를 구매하고, 나머지 9대는 전기차·수소차나 하이브리드차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식이다.

일반택시 업체 11곳과 시내버스 운송 사업자 26곳의 연간 구매 목표는 각각 전기·수소 택시 7%, 전기·수소 버스 6%다. 화물차 운송 사업자 72곳의 전기·수소 화물차 커트 라인은 20%다. 국내에 택시·버스·화물차 사업자는 이보다 더 많지만 정부는 규모가 비교적 큰 대형 업체만 규제 대상에 포함했다. 규제 대상 렌터카·택시·버스·화물차 기업 수를 모두 합치면 117곳이다.

산업부가 규제 시행에 따른 비용 편익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기업들은 정부의 친환경차 연간 구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도 시행 첫해인 내년에 422억2833만2274원을 써야 한다. 산업부는 처음 차량을 살 때는 큰돈이 필요하겠지만, 그 다음연도부터는 연료비와 유지비만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친환경차를 차량 수명 기간 만큼 운영할 경우 기업의 실제 금전적 부담은 47억730만원(연간 균등 순비용 기준)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정부는 친환경차를 차량 수명만큼 운행했을 때 일반 국민이 얻을 수 있는 환경 편익을 계산하면 186억4000만원이 나오는데, 이는 같은 기간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47억730만원)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이미 100% 의무 구매 비율을 적용하고 있어 신규 수요 창출이 어려운 '공공부문 친환경차 의무 구매 제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도 정부가 민간 기업에 친환경차 의무 구매를 강제하는 배경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편익 관련 비용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검증 과정을 거쳐 추후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2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이벤트 캠퍼스(SEC)에서 열린 국제메탄서약 출범식에 참석해 한국의 메탄 감축 방안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 "탄소중립 구호 부응하려고 규제 남발"

그러나 민간 기업에 대한 친환경차 의무 구매 비율 적용 소식을 접한 산업계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정부가 거스를 수 없는 '친환경' 키워드를 무기로 기업 경영의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 경제단체의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굳이 이런 규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재계 트렌드 자체가 ESG여서 모든 기업이 친환경 경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며 "정부가 대통령의 탄소중립 구호에 부응하기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남발하면서 기업 사기를 꺾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산업계를 강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문 대통령은 11월 1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이상 감축하겠다는 내용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종전 목표보다 14% 상향한 과감한 목표이며, 짧은 기간 가파르게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라고 했다.

철강 기업인 포스코의 경우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7~2019년 평균(7880만t)보다 10%가량 줄여야 하는 미션을 받았다. 문제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저감 기술이 개발되지 않으면 연간 조강 생산량을 100만t 이상 줄여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대의(大義)에는 모든 기업이 동의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빠른 전환 속도를 요구하는 건 기업 죽이기나 다름없다"고 했다.

부처 간 실적 챙기기 경쟁이 과잉·중복 규제를 양산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온다. 산업부가 업계의 자율적인 ESG 경영 트렌드에 편승해 실적 채우기용 규제를 남발한다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친환경차를 비롯한 환경 관련 규제가 환경부에서 나오는데, 굳이 산업부까지 뛰어들어 기업에 친환경차 도입을 강요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