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라는 복병을 만났다. 올해 들어 집값부터 외식비, 기름값, 전기료 등이 고공행진 중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 중남미에서도 가파른 물가 상승세가 중앙은행 최대 고민거리로 부상했다.

문제는 예상보다 높은 물가 상승세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연말까지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고(高)유가에 공급망 병목현상까지 겹치면서 물가도 추가 상승 압력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다.

각국 중앙은행은 높은 물가 상승률이 최근에야 살아난 소비와 투자를 억누르면서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보고, 긴축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풀었던 유동성의 회수를 위해 다음달부터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에 돌입할 방침이고, 한국을 포함해 기준금리 인상을 서두르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산신항에 접안해 있는 선박에 화물이 가득 실려 있다.

◇ 유가 80달러 쇼크에 공급병목까지…물가도 상승 곡선

국제유가는 이달 들어 배럴당 80달러선까지 치솟았다. 18일(현지시각)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82.44달러를 기록했다. 올 들어 약 70% 상승한 것이다.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이 상승(원화 값 하락)하면서 우리나라 체감 유가는 이미 100달러선에 육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간 유가가 오르면 달러화는 약세를 보이면서 원·달러 환율은 하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모습이다. 미 연준이 오는 11월 테이퍼링을 시작한다는 전망에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높아지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이른바 ‘빅피겨(큰 자릿수)’인 1200원을 목전에 둔 1180~1190원선을 기록 중이다.

국제유가 상승은 전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이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유럽 등에서 석탄과 천연가스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공급이 이에 못 미치자 원유 수요까지 늘어난 것이다. 겨울철을 앞두고 난방 등 에너지 수요 증가가 불가피한 시점이라 연말까지 유가 상승세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서울의 한 주유소 모습.

◇ 달러 강세에도 국제유가 상승…”공급 병목으로 인플레 가속”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추가 원유 수요가 하루 50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 플러스(OPEC+)’가 올해 4분기 예상 수요량보다 낮은 하루 70만 배럴 상당의 원유를 생산할 것으로 보고, 적어도 연말까지 수요가 공급을 앞지른다고 추산했다. IEA는 “에너지 위기로 석유 수요가 급증하고 인플레이션, 경기 회복 둔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망 병목현상(supply bottleneck)이 심화된 점도 물가 상승 압력을 키우는 요인이다. 공급망 붕괴로 생산 차질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면 기업의 생산비용이 높아지고, 이는 최종제품 가격에 전가되면서 소비자물가를 밀어올리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다수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공급망 차질 문제가 내년까지 이어지면서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17일(현지시각) 전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개월 연속 5%대를 기록했다. 다이와캐피털 아메리카의 마이클 모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WSJ에 “공급망 병목, 노동력 부족, 완화적 통화·재정 정책이 혼합된 퍼펙트 스톰”이라고 평가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금리인상·테이퍼링 속도내는 중앙은행

인플레이션 공포가 커지면서 각국 중앙은행도 바빠졌다. 중앙은행들은 지난해 코로나 확산으로 경기 침체가 예상되자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올해 경제활동 재개와 함께 살아난 수요가 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는 데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경우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긴축 전환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 들어 13개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최소 한 번 이상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서구권 선진국 중에서는 노르웨이가 지난달 처음으로 금리를 올렸고, 영국 영란은행이 연말 금리인상을 예고했다. 일부 중앙은행은 테이퍼링에 돌입했다. 호주 중앙은행은 지난달 주간 채권 매입 규모를 기존 50억호주달러에서 40억호주달러로 줄이기로 했고, 연준은 내달 테이퍼링 개시를 예고한 상황이다.

지난 8월 아시아 주요국 중에서 처음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한국은행은 오는 11월 추가 인상을 강력 시사했다. 한은은 다음달 금리인상을 고려하는 이유 중 하나로 물가 안정을 꼽았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개월 연속 2%대를 이어가고 있는데, 고유가에 힘입어 이달 3%대로 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달 소비자물가지수가 3%대로 올라선다면 2012년 2월(3.0%) 이후 10년 만에 최대 상승폭이 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공급측 요인에 더해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측 압력이 가세해 당분간 물가안정 목표인 2%를 상회하는 오름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며 “경제가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11월 금리인상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