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2050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탄소기본중립법’이 통과됐다. 9년 뒤인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NDC)을 2018년과 비교해 35% 이상 줄인다는 게 핵심이다. 기존보다 목표치를 9%포인트(P) 이상 높였다.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 만큼 흡수해서 실질적인 배출량을 0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다.

정부가 이처럼 ‘2050 탄소중립’과 NDC 상향은 가속화하고 있지만, 정작 관련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에너지 전환과 산업구조 개편에는 수 천조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내년 관련 예산은 약12조원에 불과하다. 604조원에 이르는 내년 정부 예산의 2% 남짓 규모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각기 1000조원이 넘는 규모의 ‘그린딜’을 제시한 것과는 비교가 된다는 반응이 나온다.

산업계에서는 탄소중립으로 발생하는 비용 부담이 기업에 전가돼 산업 전반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 역시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는 탄소전환은 전기료 상승 등을 불러와 민생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베스타윈드 풍력 발전소./베스타 윈드

◇美·EU 수천조원 ‘그린딜’…韓은 12조원 편성하고 생색

22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발표한 2022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위기 대응 등 탄소중립 예산으로 11조9000억원 가량을 편성했다. 이는 지난해 7조 3000억원보다 4조6000억원(63%) 늘어난 규모다. 정부는 내년을 2050 탄소중립 이행의 원년으로 삼기 위해 과감한 재정투입을 위해 예산을 대폭 증액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가 편성한 탄소중립 예산은 규모 면에서 민간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평이다. 우선, 탄소중립에 대비하기 위해 ‘슈퍼예산’을 편성한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예산 규모가 턱없이 작다. 유럽연합(EU)은 2050 탄소중립 목표 이행을 위해 2030년까지 1조유로, 한화 약 1376조1000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고, 미국 바이든 행정부도 향후 10년간 2조달러(약2197조원) 규모의 ‘그린딜’을 제시했다. 탄소중립을 위해 1년에 수백조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동일한데 지원 규모만 다른 셈이다.

더욱이 ‘탄소중립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이르면 이달 말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상향을 앞두고 있어 이에 필요한 비용 산정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내년도 예산안은 오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로 늘린다는 ‘재생에너지3020’을 전제로 짜였는데, 정부가 목표한 35% 달성을 위해서는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최대 40%까지 늘어나야한다는 것이 업계 및 학계의 전망이다. 새로운 NDC 충족에는 턱없이 부족한 조건을 전제로 한 셈이다.

정부는 NDC 상향이 공식화되는 대로 별도 지원책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이나, 업계에서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기존 목표의 2배 이상으로 늘린다는 것이 현실가능성이 떨어지는데다 이를 위한 투자 계획도 극도로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내년부터라도 발전 단지와 송배전 시설, 석탄발전 사업자 보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재생에너지 3020을 기준으로 짜여진 정부 예산으로는 선제적 대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2022년도 탄소중립 예산./정부 제공

◇굴뚝산업 재편에 400兆 든다는데…정부, ‘나몰라라’

학계와 관련 업계등에서는 정부가 편성한 탄소중립 예산은 규모는 물론, 내용 측면에서도 부실하다고 평가한다. 탄소중립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전환과 탄소 배출량이 많은 굴뚝산업의 산업구조 재편에 지원이 선행되고, 집중되어야 하지만 정부 지원은 각 사업별로 수십억원에 그치는등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정부가 ‘탄소중립’ 비용 부담을 기업에 전가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내년도 탄소중립 예산을 항목별로 보면, 정부는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 가속화를 위한 에너지·산업구조·모빌리티·국토 등 4대 부문 대전환 추진 예산을 올해 5조원에서 내년 8조3000억원으로 늘린다. 신유망 산업 육성과 저탄소 생태계 구축을 위한 명목으로 8000억원을, 취약산업 계층 보호 등에 5400억원, 녹색 금융지원과 연구개발(R&D) 등 제도적 기반을 닦는데 약 2조2700억원 등을 배정했다.

그러나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에너지 전환이나 굴뚝산업 구조 개편 등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비해 지원 예산 규모가 적고, 사업 내용도 일회성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한국수력원자원의 연구에 따르면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해 탈원전을 지속할 시 2050년까지 설비투자가 약1400조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내년에 배정한 재생에너지 설비·발전 예산은 7260억원의 금융지원 등에 더해 1조9000억원에 불과하다.

산업계가 ‘탈탄소’로 전환하기 위해서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관련 예산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업연구원은 분석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철강·석유화학·시멘트 3개 업종 등 이른바 ‘굴뚝산업’의 전환비용만 2050년까지 최소 4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철강의 경우 매물 설비를 해체하는 데만 70조원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정부가 이들 업종의 대체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내년 190억원에 그친다.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은 독일 베를린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태양광 도시 계획(Solarcity Master plan)'의 도심 지붕형 태양광 사업에 참여한다고 1일 밝혔다. 사진은 독일 브란덴부르크 상업시설 지붕에 설치된 한화큐셀 태양광 모듈. /연합뉴스.

◇'로드맵’ 없는 탄소중립…결말은 ‘비용 전가’

정유화학 업계에서도 석유계 원료를 바이오 매스 등으로 교체하는 데 2050년까지 218조원이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부가 관련 공정 기술 개발에 배정한 내년도 예산은 고작 74억원이다. 이때문에 정부가 수십 조원을 들여 지원하는 미래차나 반도체 산업 등에 비해 탈(脫)탄소 충격을 받는 기존의 굴뚝 제조업에 대한 지원이 박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실질적인 탄소중립 연구개발(R&D) 예산이 올해 1조1328억원에서 내년 1조2453억원으로 1125억원 증액되는데 그친 점도 비판을 받는다. 당초 정부는 올해 대비 탄소중립 R&D를 30% 이상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이와는 달리 소액 증액에 그쳤기 때문이다. 탄소 중립 기술이 주요 선진국의 8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인데다, 수익 구조가 불투명해 기업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 정부의 ‘통 큰 투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산업계에서는 이 같은 정부의 탄소중립 ‘급발진’의 책임과 비용은 대부분 기업들이 떠안아야 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주요 선진국에 비해 제조업 비중이 높고, 제조업 내에서도 철강, 석유화학, 정유 등 탄소배출이 많은 업종이 전체 수출의 21%가량을 차지하는 한국의 특성 상 과도한 탄소중립 목표 설정은 기업 환경을 악화시키고 해외 이전을 촉발할뿐더러 산업 전반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구체적 로드맵 없는 탈탄소 가속화는 민생경제와도 직결된다. 전기료나 유류세 등 생활 필수재 가격도 동반 상승해 기업 뿐 아니라 서민생활에도 양극화가 생길 수 있다. 탈원전과 탄소중립 가속화에 따른 전기 생산비용 상승과 국제유가 상승 등 원인으로, 올해 한국전력의 적자 규모는 4조3845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를 잡겠다며 정부가 전기료 인상을 틀어막고 있지만, 조만간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차관은 과거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나라 탄소배출량은 발전과 산업이 각각 35%, 나머지 30% 정도가 건물과 수송인데 탄소배출가격이 오르면 장기적으로 건물 난방비와 전기료가 상승하고 자동차 유류세도 비싸진다”며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강력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건물 난방비와 전기료가 상승하고 자동체 유류세도 비싸진다”고 우려의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철강 스태빌라이저. /연합뉴스.

◇전문가들 “총체적인 시나리오 작성하고 적정 예산 찾아야”

전문가들은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용 추산 논의를 범사회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통해 탄소 중립으로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적정한 예산 규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 업계별로 산별적으로 제기되는 저탄소 전환 비용에 대한 주장을 정부가 그러모아 총체적인 비용에 대한 추산과 이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각 업계별로 산별적으로 나오는 저탄소 전환 비용에 대한 주장은 업계 입장을 대변하는 측면이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탄소중립을 위한 총체적인 비용에 대한 추산과 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탄소비용에 대한 비용의 규모를 추산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예산 규모를 일부 확대하는 식으로는 주먹구구식 사업만 늘어날 뿐 정부의 급격한 탄소중립 목표에 비해서는 미미한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며 “비용 추산이 선행되어야 이후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해 증세와 같은 민감한 논의도 공론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