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4분기 전기요금 인상 여부 결정을 앞두고 정부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올해부터 도입된 연료비연동제를 감안하면 국제유가 상승 등 요인으로 4분기 전기요금을 인상해야하는 상황이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넉 달 연속 2%대를 기록하는 등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물가 가중치가 높은 전기요금을 선뜻 인상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정치적 상황도 난관이다. 정부가 서민 생활과 밀접한 영향이 있는 전기요금 인상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전력(015760) 등 에너지업계에서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수준으로 작년에 비해 2배 가량 오르는 등 인상 요인이 발생한 상황에서, 오는 4분기 요금 인상이 있어야 정상 영업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올해 내내 요금 동결을 이어간 만큼, 유가 상승에 연동권 원가 상승을 요금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서민 물가 안정’을 주문하는 상황에서 한전이 수익 관점에서만 요금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상장사인 한전이 전체 지분 15% 이상을 갖고 있는 외국인 주주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연료비연동제를 도입하고 유가가 상승하고 있는 마당에 전기요금을 지속 동결하면서 수익 창출을 방해한 것으로 비춰져 외국인 주주 등이 배임혐의로 소송을 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일각에서는 ISD(투자자-국가 분쟁해결소송)까지 제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 가동을 최소화하려고 했던 산업부와 한전이 원가부담이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YONHAP PHOTO-3084> 한전, 물가상승 우려에 3분기 전기요금 '동결'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여름철 냉방 등으로 인한 전력수요가 집중되는 3분기의 전기요금이 동결됐다. 한전은 7∼9월분 최종 연료비 조정단가를 2분기와 동일한 kWh당 -3원으로 적용하기로 했다고 21일 발표했다. 전기요금 동결 이유에 대해 정부는 "코로나19 장기화와 2분기 이후 높은 물가상승률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의 생활안전을 도모할 필요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21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가 빼곡히 설치돼 있는 모습. 2021.6.21 hwayoung7@yna.co.kr/2021-06-21 13:44:10/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4분기 전기요금 행방은

10일 정부 안팎에 따르면 정부는 내달 중 4분기 전기요금 변동안을 작성해 정부에 제출하고 최종 인가를 받아 전기료 인상 여부를 발표한다. 전기요금은 일차적으로 연료비 연동제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전기생산에 쓰이는 석탄과 LNG 등 연료비 변동분을 전기요금에 주기적으로 반영하는 제도다. 다만 과도한 물가상승 등을 억제하기 위해 전기요금을 인상하기 위해서는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물가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의 승인을 미리 받아야만 한다.

전기요금 원가연동제는 올해 도입된 이후 국제유가가 크게 상승하며 요금 인상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한번도 작동하지 않았다. 정부는 유가 상승에도 ‘국민 생활 안정’을 이유로 올해 2·3분기 전기료 인상을 유보했다. 한전의 연료비 조정요금 운영지침에 요금 조정을 유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둬 인상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최근 국제유가는 배럴 당 70달러 이상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지난해의 2배 가량 올라있는 상태다.

한전 내부는 물론 에너지업계에서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위해서는 4분기 전기요금만큼은 반드시 인상되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제유가가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3분기 연속 요금을 동결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전기를 판매하는 한국전력과 5대 발전사들의 실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요금을 원가와 연동시키는 제도를 왜 만들어 놓고 왜 시행조차 하지 않으냐’라는 불만도 나온다.

<YONHAP PHOTO-4085> 폭염 속 춘천지법 변압기 터져 '정전'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폭염이 기승을 부린 21일 오후 강원 춘천지법 변압기에서 과부하로 추정되는 폭발이 발생해 법원 건물에 정전이 발생했다. 춘천지법 시설 담당자들과 한전 관계자 등이 변압기를 살펴보고 있다. 2021.7.21 conanys@yna.co.kr/2021-07-21 17:40:16/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국정목표된 ‘물가안정’…전기요금 동결에 힘실려

한전을 관할하는 산업부는 이같은 업계 입장을 의식한 듯 지난 6월 올해 3분기 전기요금 동결을 발표하며 “하반기에도 현재와 같이 높은 연료비 수준이 유지되거나 연료비 상승추세가 지속될 경우 4분기에는 연료비 변동분이 조정단가에 반영되도록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물가 정책을 총괄하는 기재부는 당초 정부 전망과 달리 하반기 물가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전기요금 동결에 입장이 기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요금이 인상될 경우 연쇄적으로 물가가 상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기요금 그 자체의 물가 가중치도 높기 때문에 체감 물가 상승폭이 폭등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미 한은의 물가안정치(2.0%)를 뛰어넘은 소비자물가지수가 전기요금 인상을 도화선으로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델타 변이 확산과 4차 대유행으로 말미암아 경기 회복세가 둔화되고 있는 점도 4분기 전기요금 동결에 힘을 싣는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가 물가상승 압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입조처는 최근 발표한 ‘2021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 “한국 소비자물가는 기저효과 등으로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제인 2%를 초과한 후 계속 상승세”라며 “연료비 연동제로 소비자물가는 더욱 상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9일 오후 세종시 금남면 한국전력공사 345kV 세종변전소 및 전력구를 방문, 전력시설 점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2분기 1조 적자 전망…실적 악화에 화난 한전 주주, 소송 움직임

문제는 유가 상승기의 전기 요금 동결이 한전을 둘러썬 법적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원가 상승을 반영하지 못한 요금으로 한전의 실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외국인 주주 등에 배임 혐의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연료비 증가에도 요금 동결이 이어지면서, 한전이 2분기 중 약 1조원 수준의 적자를 볼 수 있다는 전망이 컨센서스로 형성됐다. 9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올해 초 배럴당 47.62달러 수준이었으나 지난 6일 68.28달러에 마감했고 액화천연가스(LNG), 석탄 가격도 공히 상승했다. 전력거래소의 ‘6월 전력시장 운영실적’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통합 전력도매가격(SMP: 계통한계가격)은 kWh당 83.11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17.2% 상승하는 등 오름세다. SMP는 한전이 발전 공기업이나 민간 발전사에서 사는 전력 가격으로, 유가가 수개월 뒤에 반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SMP가 향후 추가 상승하며 한전 실적에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료비연동제 적용 유보로 한전의 적자 폭이 지속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이로인해 주가가 하락할 경우 주주 손실에 대한 보상 요구가 정부로 향할 수도 있다. 일부 소액주주들은 정부와 한전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6월 기준 한전의 외국인 지분율은 15.54% 수준인데, 이들이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주무부처인 산업부가 기재부에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승일(가운데) 한국전력 사장이 17일 서울 서초구 한전 강남배전센터를 방문, 여름철 안정적 전력수급을 위한 준비상황과 전력설비에 대한 안전 및 보안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한국전력

◇ “탈원전 비용 요금에 전가하려고 하더니...”

일각에서는 연료비연동제를 도입하고도 전기요금을 무작정 억누르려는 정부 행태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태양광 등 생산비용이 높은 구조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상황에, 유가까지 올라가고 있어 전기요금은 상승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억누르기만 하면 물가가 오히려 기형적으로 튀어오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탈원전 비용을 원가 연동제를 통해 전기요금으로 전가시킬 꼼수를 부릴려고 했지만, 물가불안이라는 덫에 걸려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상승 구조에서 금리 조정을 하지 않고 전기요금 동결로 물가안정책을 펼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특히 연료비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전기요금을 동결하는 것은 특정 기업에 재정부담을 가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