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4주년 특별 연설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4%대’로 올려잡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대 후반을 전망한지 2주 만에 목표를 더 높여 잡은 것이다. 연초부터 두자릿수 증가율을 고수하고 있는 수출 강세의 자신감이 붙은 영향으로 풀이된다. 그렇지만,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문 대통령의 자신감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체감경기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5월 2.6%로 9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물가가 2개월 연속 2%대의 높은 상승률을 보였지만, 정부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다. 정부는 가격 상승률이 높은 계란 등 일부 농축산물 공급을 늘리겠다는 ‘간헐적’인 대책만 남발하고 있다. 물가처럼 체감경기 지표인 실업률은 4.0%에 달했고,60세 이상 공공일자리를 제외한 3040 취업자수는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갔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로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대에서 조만간 1%대로 곤두박질칠 것이란 암울한 전망에 힘이 실리지만, 정부는 수출 호조에 힘입은 성장률 수치만 갖고 ‘장밋빛 낙관론'에 빠져 있다. 수년 간 우리 경제를 암울하게 만들었던 구조적 저성장을 타개할 수 있는 규제혁신 등 구조개혁 조치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경우 각종 비용 상승으로 경기회복력이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물가 급등 가운데 경기침체가 초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경제를 살인적인 긴축으로 끌고 갔던 ’1970년대식 인플레'가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재정 지출에 의존한 내수 부양책을 넘어서,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잠재성장률 1% 시대 빨라진다…재정 투입만으로는 극복 어려워

2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2021~2030년엔 2.5%로 낮아지고 2031~2041년엔 2.0%로 더 떨어지며, 2041~2050년엔 1.7%까지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잠재성장률(potential growth rate)은 한 나라가 안정적인 물가수준을 유지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생산 수준인 잠재 GDP의 증가율을 뜻한다. ‘경제의 기초체력’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인플레이션을 넘어 저성장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도 이같은 잠재성장률 저하 현상 때문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980~1990년대 초까지 8~9% 수준이었다. 하지만 1998년 외환 위기와 2009년 금융 위기 등을 겪으면서 2%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하락 추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1년여간 지속된 코로나 충격에 따라 고용이 악화됐고, 서비스업 생산 능력이 저하됐다. 잠재성장률이 코로나 위기 이전보다 훨씬 낮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정부는 올해 4%대 성장을 통해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늦춰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구상에 회의적이다. 올해 4%대 성장은 지난해 22년만의 마이너스 성장(-0.9%)의 기저효과 영향이기 때문이다. 4% 성장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2020~2021년 2년 연 평균 성장률은 1.5%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 2017년 3.2%, 2018년 2.9%, 2019년 2.2%로 현 정부 출범 후 가속화된 성장률 저하 추세가 완화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세계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도 문제다. IMF는 지난 4월 세계경제전망에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올해 3.6%, 내년 2.8%로 예상했다. 같은 기간 IMF가 설정한 39개 선진국의 성장률 평균은 올해 5.1%, 내년 3.6%로 전망했다. 한국의 성장률은 올해와 내년 2년 연속으로 선진국 평균을 밑돌게 된다. IMF가 각국 경제성장률과 전망치를 집계해 공표한 1992년 이후 한국 성장률이 2년 연속 선진국 그룹보다 떨어진 것은 처음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 확산 이전에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초반으로 떨어졌다는 점은 성장 여력이 빠르게 감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기저효과 등으로 올 한해 4% 성장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지표 반등에 불과하고 잠재성장률 하락을 만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성장잠재력 확충은 재정투입만으로 이뤄내기 힘들고 규제개혁 등 구조개혁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잠재성장률 추이 /IMF

◇'두마리 토끼잡기'식 정부 정책…수요 폭발에 인플레 자극할 수도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실제 한국의 소비자 물가는 농식품을 비롯해, 국제유가마저 상승하면서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쯤 물가 상승세가 둔화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따른 대면 서비스 수요 급증이 물가를 다시 자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백신 보급 확대로 전 세계 시장 수요가 빠르게 회복하고, 펜트업 효과로 민간소비가 증가할 경우, 올해 연간 물가상승률이 한국은행의 물가목표치인 2%를 넘길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물가상승은 경기회복에도 차질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물가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정부 정책은 앞, 뒤가 맞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의 물가상승세를 일부 농축산물 공급 부족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규정한 정부는 수입을 통한 공급확대, 유통구조 혁신 등에서 물가대책을 찾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각종 소비 부양책을 추진하고 있다. 신용카드 캐쉬백, 해외여행 활성화, 소비쿠폰 지급 등을 통해 잠재된 ‘펜트 업 소비 수요’를 정부 정책으로 분출시키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펜트업 소비 수요 분출에 대해 한은은 “수요측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한 편으로는 물가를 내리는 정책을 쓰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 물가상승 압력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엇박자 정책으로 물가 상승 압력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실제 조류독감으로 폭등한 계란 값을 잡겠다면서 총 6차례에 걸쳐 계란 2억개를 수입하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천정부지로 오른 계란 값을 잡는 데 큰 효과가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집단면역이 본격화하는 하반기부터는 여행 등 보복소비가 분출하며 수요측 인플레 압력이 매우 커질 것으로 본다”며 “이런 시점에 소비 촉진 등 경기부양책은 수요를 폭증시켜, 물가 관리를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 결국 인플레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0일 오후 물가 관련 민생현장 점검을 위해 경기도 이천시 aT이천비축기지를 방문, 관계자로부터 쌀과 계란의 비축 및 방출 현황을 보고 받고 있다. /기재부

◇독일 3분의 1 수준인 생산성...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경제 전문가들의 관심은 최근의 물가불안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경기상승기에 일정 수준의 물가 상승은 경제의 선순환에 도움이 된다. 단 생산성 향상에 따라 물가 상승 이상의 성장이 가능할 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구조적인 저성장 국면에서 물가 상승은 소비자와 기업의 호주머니를 가볍게 하기 때문에 국민경제에 해악이 클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근의 물가 상승으로 인한 국민 경제 차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기 위한 생산성 향상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지속적인 생산성 하락이 성장 후퇴를 일으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5년(2016~2020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률은 53.9%에 이르지만, 같은 기간 1인당 노동생산성은 1.7%(시간당 노동생산성은 9.8%) 증가에 그쳤다. 같은 기간 최저임금 근로자 대부분이 종사하는 서비스업(지난해 기준 83.8%)에서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인당 0.8%, 시간당 기준 8.7%에 불과한 낮은 수준이었다.

노동생산성 뿐만 아니라 업무 능력·자본투자액·기술도 등을 복합 반영한 총요소생산성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생산성본부의 2019년 추계에 따르면 2001~2017년 기간에 우리나라의 총요소생산성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는 19%이다. 반면 미국은 34.4%, 일본 50.0%, 독일 59.4% 등이다. 우리의 전반적 생산성이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최대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는 의미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생산성 저하로 대한민국 경제의 ‘활력(活力)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다”면서 “기술혁신, 한계기업 재편,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등 기업들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경제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작품 ‘복학왕’에서 주인공은 집값 급등에 노동 의욕을 잃고 기절해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다.

◇저성장 기로에 선 대한민국...구조개혁· 점진적 인플레 대응 병행해야

이런 추세라면 세계 경제가 회복돼도 우리나라는 장기 저성장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추경 예산 등을 통해 경기부양을 해도 잠재성장률이 낮아져 버리면, 더는 과거와 같은 성장세를 이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코로나19 위기 전에도 0%대 성장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이 대표 사례다.

경제전문가들은 물가를 잡기 위한 노력과 함께, 경제정책 방향성을 경제구조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업이 효율적인 기업경영과 기술개발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이런 변화가 투자와 고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 임금 확대나 원자재 가격상승 등에 따른 상품 가격 인상 요인(인플레이션)을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력 투입이 늘거나 자본 투자가 늘어야 하는데, 현재 한국의 인구는 줄고 있으며, 코로나19로 투자도 감소한 부분이 있다”며 “4% 성장은 수출 호조의 영향으로 결국 미국 등 글로벌 국가 등의 테이퍼링이 시작되면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가 재정 지출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한계기업 구조조정, 고부가가치 신산업 육성을 병행해, 생산성 부문에 자원이 이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생산성 향상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 미국의 1970년대식 인플레이션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해, 경기 침체에도 물가가 10% 넘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다. 미 연준은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기준금리를 21%까지 올리는 과격한 금리인상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1981년 등장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정부 지출 삭감, 규제철폐, 감세 등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다. 이같은 정책 대응은 ‘저성장-고물가'의 악순환을 끊어내기는 했지만, 저신용 금융기관의 대량 부도,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 축소로 인한 양극화 심화라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런 부작용이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거시정책의 무게 축을 ‘질서있는 인플레이션 대응'에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은행이 점진적인 금리인상에 선제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재정정책은 무차별 돈 뿌리기에서 사회안전망 강화 중심으로 재편하고,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과감한 규제혁신과 연공서열제 폐지 등 노동시장 개혁을 경제정책의 첫번째 과제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높은 진입장벽 등 시장규제에 따른 기업 역동성 저하, 한계기업의 퇴출 지연,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성 증가세 둔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구조변화의 속도를 떨어뜨렸다”며 “부실기업에 대한 신속한 구조조정과 함께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어 “정부가 생산성 향상을 보여줄 수 있는 미래 전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