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지난 10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2021년 6월)’에서 ‘정부 재정 지출 확대'를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압력 요인으로 지목했다. 확장적인 재정 지출을 물가 상승의 ‘리스크’ 가운데 하나로 분석한 것이다. 코로나19 극복 명목으로 재난지원금 형태로 가계에 직접 공급된 유동성이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반면 ‘성장률 높이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부는 확장적 재정 지출을 이어나갈 의지를 다지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달 초 총 32조7000억원(4월말 기준)에 이르는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2차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공식화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필요하다면 큰 폭으로 증가한 세수를 활용한 추가 재정 투입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한 데 따른 것이다. 여당은 전국민에게 위로금 등을 지급하기 위해 최대 30조원 규모의 추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가계에 재정자금이 직접 흘러가면 가뜩이나 고개를 들고 있는 물가상승 압력은 더 높아진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대대적인 소비활성화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대외 활동 위축으로 가계가 은행 계좌 등 통장에 묶어둔 37조원을 시중으로 흐르게 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위해 이달말 발표되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해외여행 활성화, 소비쿠폰 지급, 국내 여행지 개발 등 내수활성화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가뜩이나 잠재된 ‘펜트 업 소비 수요'를 정부 정책으로 분출시키면 한은이 금리인상 명분으로 내세우는 수요측 물가상승 압력은 더 커지게 된다.

이같은 양상은 거시경제정책의 양축인 재정, 통화정책이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부는 경기 회복을 공고히 하겠다며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중앙은행은 이로 인해 높아진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기 위해 금리인상 등 돈줄 조이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를 지배했던 ‘저성장·저물가'를 극복하기 위한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의 동맹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보고서./정다운

◇거시경제정책 딜레마...금리 인상 시사하는 중앙은행

거시 경제 정책이 딜레마에 빠졌다. 저성장, 저물가 시대의 재정과 통화 정책은 ‘경기 회복’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었다. 재정은 확장적으로 풀고, 금리는 낮게 유지하면서 풍부한 유동성으로 경기를 살아나게 하는 것이 경제 정책의 목표였다. 금융 정책은 초저금리 대출 등을 통해 기업들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지원책이 주를 이뤘다.

저금리 극복을 위한 금리인하 등 통화완화 정책이 장기화된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 대응 차원에서 재난지원금 등 정부가 직접 푼 유동성은 주식·부동산·가상자산 등 ‘자산시장의 과열’을 부채질 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국내적으로도 한국은행에 따르면,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 자금을 보여주는 시중통화량(M2 기준)은 3313조1000억원으로 코로나 발생 이전인 2019년 2809조9000억원에 비해 500조원 이상 늘었다.

이같은 유동성 폭증은 자산 가격 버블에 불을 지폈다. KB부동산 리브온의 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올해 5월 3.3㎡당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4358만원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인 2017년 5월(2325만원) 대비 약 2032만원(87.4%) 올랐다. 최근 1개당 4000만원 안팎으로 움직이고 있는 비트코인은 지난 4월 8000만원까지 치솟으며 20·30대 사이에 ‘가상자산 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로 위축됐던 경기가 올해부터는 기저효과에 힘입어 빠르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요 기관들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5.6~6% 사이로 잇따라 상향 조정하고 있다. 한국 경제 성장률은 3.6~4%로 관측되고 있다. 경기 회복이라는 일관된 목표를 유지하던 재정·통화 정책 동맹에 균열음이 생기는 배경이다.

이 때문에 한은에서는 경기회복이 가시화된 현 시점에서 연 0.50%로 역대 최저 수준인 기준금리를 정상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1일 한은 창립 71주년 기념사에서 “그간 취해온 확장적 위기대응 정책들을 금융·경제 상황 개선에 맞추어 적절히 조정해 나가는 것은 우리 경제의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기준금리를 올리더라도, 긴축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도 했다.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10일 ’2021년 6월 통화신용정책보고서 설명회'에서 “현재 기준금리가 낮은 수준이라 경기 상황과 금융 안정, 물가 등을 봐서 한두번 올린다고 긴축이라고 봐야 하나”라며 “그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준금리가) 낮은 수준에서 소폭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긴축 기조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소 2번 이상 금리인상을 예고한 셈이다.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달만 해도 “인플레이션 위험은 크지 않다”고 했던 옐런 장관은 지난 6일 인플레이션이 내년까지 지속되고 금리를 올리게 되더라도 “이는 미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바이든 정부의 4조달러(약 4466조원) 규모 경기부양책으로 경기가 회복되면 물가가 급등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고 시사한 것이다. 사실상 금리인상을 용인하는 ‘긴축 신호’를 보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보고서./정다운

◇정부, 확장적 재정지출 강화…추경, 작년 67兆 올해 45兆 전망

하지만 통화 당국과는 달리, 재정당국은 씀씀이를 쉽사리 줄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수 시장은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대면서비스업과 도소매업이 예년 수준의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상승률이 4%대로 전망되는 등 경기 회복세가 강해지고 있지만, 반도체 호황에 따른 수출로 인한 ‘착시’라고 분석하고 있다..

앞선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 회복기엔 제조업을 포함해 서비스업 등 대부분 업종의 업황이 골고루 회복되는 양상이었으나, 코로나19 경제 위기 이후에는 일부 산업에 편중된 경제 회복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제조업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 중 코로나 확산 이전 수준을 회복한 후 생산이 증가하고 있지만, 서비스업은 코로나 확산 지속으로 인해 올해 1분기 중에서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제조업 내부에서도 반도체 등 IT부분과 비(非)IT 부문 사이의 격차가 큰 상황이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정책대학원 교수는 “경기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착시일 수 있는 상황”이라며 “지나치게 경기를 낙관하다 정책 조합을 잘못 결정할 위험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전반적으로 경제가 회복되다보니 재정 지출도 줄이고 금리도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정부가 4% 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확장적 재정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코로나 피해 지원을 위한 추가 재정 투입은 이미 예고됐다. 지난해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4번의 추경을 통해 GDP 3.5%에 이르는 67조원의 재정을 추가 투입한 정부는 올해도 이미 약 15조원을 1차 추경으로 충당해 소상공인을 지원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소상공인 지원 등을 위한 2차 추경 편성을 공식화했다. 정부는 추경 재원 등에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전국민지원금, 백신 휴가비, 소상공인 피해보상 등으로 최소 30조원 이상 ‘슈퍼 추경'을 요구하고 있다. 추경 예산 심의는 이르면 7,8월 국회에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행이 금리인상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할 시점에, 정부는 추경을 통해 국민 호주머니에 직접 현금을 꽂아주려고 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는 것이다.

<YONHAP PHOTO-4797> 홍남기 부총리, 해밀광역계란유통센터 현장 점검 (서울=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일 오후 물가 관련 민생현장을 점검하고자 경기도 여주시 해밀광역계란유통센터를 방문해 수입란의 세척, 난각, 포장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2021.6.10 [기획재정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21-06-10 16:41:24/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저성장 극복 위한 ‘폴리시 믹스' 종료될 듯

이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서로 재정·통화 정책의 조화를 맞춰 나가는 ‘폴리시 믹스(policy mix·정책 조합)’에 중대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폴리시 믹스는 거시경제 정책의 세 요소인 재정·통화·환율 등 각종 정책을 종합적으로 운용해 경제 안정과 성장을 도모한다는 경제 용어다.

한은의 금리 동결과 맞물려 경기 부양책을 잇따라 내놓았던 기재부 내부에서는 한은의 금리 인상 시사로 인해 그간의 폴리시 믹스 효과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당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던 2016년 하반기 재정당국인 기재부와 통화당국인 한은의 엇박자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6년 10월 IMF(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열린 미국 워싱턴 D.C.에서 당시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는 금리정책 방향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당시 연 1.25%인 기준금리에 대해 유 부총리는 “한국은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할 공간이 있다”고 했고, 이 총재는 “우리의 재정 건전성은 세계 톱클래스”(이 총재)라고 말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한은 내부에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이 예고된 상황에서 돌출된 유 부총리의 금리인하 요구에 적잖게 당혹해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한은은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수출입은행 등에 출자를 요구하는 금융위원회와도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같은 삼각갈등 속에서도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1.25%로 계속 동결했고, 다음해인 2017년 11월 연 1.50%로 인상했다. 2016년 전기비 1.1%였던 GDP 성장율이 3,4분기 0.5~0.6%로 반감됐지만, 거시·통화정책의 공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기업대출이 코로나19 확산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정다운

◇ “좀비기업 구조조정 시급”…금융완화 정책 정상화 서둘러야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이 나타나고 있는 만큼 폴리시 믹스에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조언한다.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특정 부문을 집중 지원하기 위한 확장 재정 기조는 이어지겠지만, 금리나 금융 정책의 경우 긴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세계적으로 소득불균형 완화를 위한 재정지출 확대를 강조하는 정치환경이 강하다는 점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 확장에 따른 인플레 압력, 금융 시장 안정 등의 문제를 감안했을 때 한은이 금리를 충분히 올릴 수 있다”며 “재정 당국과 통화 당국의 정책 방향이 달리 가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재정이 수년 간 확장적인 기조를 이어왔고 최근 들어서는 지나치게 많이 풀리면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이라고 설명했다.

경기가 회복세가 더욱 공고해지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위해 정부의 정책 자금이 지원되면서,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좀비 기업’들이 연명하고 있는 걸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 부문에서의 완화적 정책은 정상화에 나서야 하고, 재정정책인 확장적 기조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 선별 지원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김현욱 교수는 “위기 대응을 위한 자금 상환 유예 등 예외적인 금융 지원 정책으로 한계 기업들을 언제까지 연명시킬 수는 없다”며 “생산성 없는 부분에 재정이 투입되지 않도록 그간의 피해 지원 정책들의 정책 효과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정 정책은 피해 계층을 집중 지원하는 선별 정책을 하되 전체 규모를 줄여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