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일방통행식'으로 경제 정책을 밀어붙이는데 재계 입장을 대변할 묵직한 스피커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25일 국회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3차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직후 한 기업체 임원이 남긴 말이다. 개정안에는 회사가 자사주를 취득하면 1년 안에 소각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자사주는 의결권과 신주인수권, 배당권 등의 권리가 제한된다는 내용도 명시됐다.
재계는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경영권 방어가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며 상법 개정에 반대해 왔다. 그러나 지난 2017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태 이후 큰 타격을 받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를 대신해 사실상 재계의 대표 단체 노릇을 해 온 대한상공회의소는 3차 상법 개정안 통과 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다.
재계에서는 지난달 대한상의의 상속세 관련 '가짜뉴스' 논란이 불거진 이후 최태원 회장이 외부 활동을 자제하면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침묵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대한상의는 지난달 4일 '상속세 부담에 자산가 유출 세계 4위... 납부방식 개선이 현실적 해법'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었다. 해당 보도자료는 영국의 한 이민컨설팅사의 자료를 인용해 과도한 상속세로 한국을 떠나는 국내 자산가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을 다뤘다.
그러나 해당 자료에는 상속세와 자산가들의 해외 이주에 대한 인과 관계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 등 문제점을 노출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사회관계망(SNS)을 통해 "사익 도모와 정부 정책 공격을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유포하는 행위는 지탄받아야 한다"며 대한상의를 강하게 비난했다.
대통령의 질타에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부, 국세청 등 유관 부처 수장(首長)들도 앞다퉈 비난에 가세했다. 국세청은 반박 자료를 냈고 산업부는 대한상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최 회장은 결국 지난달 12일 배포한 서한을 통해 당분간 대한상의 주관 행사를 중단하고 임원진 전원에 대한 재신임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 사실상 고개를 숙인 것이다.
최 회장이 자취를 감추자 재계에서는 경영권 방어와 상속·승계 제도 개선 등 기업들이 필요로 해 왔던 정책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우려가 늘고 있다.
상속세 부담 완화는 재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재계는 과도한 상속세로 인해 기업주가 주식을 처분하거나 자산을 매각해야 할 처지에 몰릴 수 밖에 없어 투자 동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일본(55%)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과도한 상속세 부담을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번 가짜뉴스 논란으로 인해 상속세 개선은 말도 꺼내지 못할 상황이 됐다는 게 재계의 우려다.
물론 최 회장의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한상의의 수장이기 전에 SK그룹이라는 사기업을 이끄는 입장이라 정부의 눈 밖에 날 경우 여러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한국 경제사(史)에서 재계를 대표했던 인물들은 소신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 방문 당시 기자들과 만나 "한국 기업은 2류, 공무원은 3류, 정치인은 4류로 본다"는 발언으로 관가와 정치권을 향해 직설적인 쓴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인 경제 입법과 정책이 지속되면서 숨통을 트지 못한 기업들의 속은 타 들어가고 있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부터 상법 개정, 풀리지 않는 상속세 문제 등으로 인해 기업들의 부담은 늘고 있고 이는 장기적으로 투자와 성장의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최 회장이 기약 없는 잠행(潛行)을 끝내고 재계의 대변자로서 다시 역할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