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기자

지난달 20일 코스닥 상장사 하나기술(299030)은 약 1년 전 체결했던 1724억 원 규모의 수주 계약을 해지했다고 공시했다. 계약 상대방의 계약 불이행을 해지 사유로 들었다. 이차전지 장비 제조사인 이 회사는 지난해 6월 27일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금액의 수주를 따냈다고 공시했다. 회사 측은 그동안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계약 기간 종료를 6일 앞두고 돌연 해약을 공시했다. 주가는 즉각 반응했다. 공시 다음 날부터 5거래일 연속 내려 32% 하락했다.

하나기술의 이번 공시 번복은 기업의 실적에 큰 영향을 주는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 공시 제도의 허점을 드러낸 전형적 사례다. 비밀 보호를 이유로 계약 상대나 금액을 안 밝혀도 되는 깜깜이 공시가 허용되는 점, 계약 공시 후 주요 진행 상황을 알리는 중간 공시가 없다는 점, 해외 기업의 경우 투자자는 제한된 정보로 인해 실체를 알기 어렵다는 점 등이 그렇다. 하나기술은 비공개로 했던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1년이 다 지나도록 선급금도 못 받고 있었으나, 이를 알리지 않았다. 대형 수주로 기업 이익이 늘어날 걸로 기대했던 주주들만 뒤통수를 맞았다.

공시 제도를 운영하는 한국거래소의 판매·공급 계약 공시 시스템이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허술한 제도 때문에 (잘못된) 마음만 먹으면 상장사가 외국에 법인을 만들어 허위 공급 계약서를 쓰고 시장 참여자들과 공모해 주가를 끌어올려 한탕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돈다. 계약 해지에 대한 제재가 회사에 큰 타격이 갈 만큼 세진 않기 때문이다.

하나기술은 계약 상대를 아시아 이차전지 제조사라고만 밝혔었다. 공시한 바로 다음 날, 증권사 두 곳이 중국 초대형 배터리 회사로 추정된다며 분위기를 띄우는 보고서를 냈다. 주가는 한 달 사이 80%가량 급등했다. 전환사채(CB)에 투자해 뒀던 기관 투자자들은 주가가 오르자 이 기간 대거 주식으로 전환해 차익을 챙겼다.

하나기술이 약 1년 후 공개한 계약 상대(Suzhou Xin-Power Energy Technology Company)는 중국 회사로 추정되는데, 중국 포털에서도 미국 포털에서도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곳이다. 투자자는 어떤 회사와 계약을 맺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거래소가 승인한 공시 유보 종료 후 뒤늦게라도 공개할 땐 사업자등록번호라도 기재했어야 한다.

일각에선 하나기술이 계약이 사실상 무산된 걸 알면서도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고 의심한다. 하나기술은 5월 14일 제출한 올해 1분기 분기보고서에서도 해당 계약을 ‘진행중’이라고만 표시했다. 보고서 작성 책임자인 모 전무는 앞서 4월 말 구독자 수 41만 명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대규모 장비 수주가 이어질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펼쳐놨다. 해당 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계약 해지 공시 후 많은 의문이 쏟아져 나왔다. 계약이 진행되지 않았는데 중간에 공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공시를 승인한 한국거래소는 비공개로 한 거래 상대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같은 것이다.

현재 거래소 공시 규정대로라면 판매·공급 계약 공시 이후의 중간 진행 상황은 공시 대상이 아니다. 한 관계자는 계약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거래소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거래소 공시 제도는 공시를 올리는 플랫폼 역할만 한다는 게 거래소 측 설명이다. 판단은 투자자의 몫이란 것이다.

거래소는 상장사가 제출한 계약서 등 서류에 기술적 오류만 없으면 공시를 승인한다. 계약서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지 않는다. 애초에 허위 계약서가 공시될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거래소의 제도 개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구조라면 작정하고 짜고 쳐도 사전에 막을 방법이 없다.

거래소는 공시 불이행·번복·변경의 경우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하고 벌점을 부과한다. 벌점이 15점 이상이면 상장폐지 심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부는 벌점을 제재금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하나기술은 올해 1월에도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 공시 미이행(공시 번복)으로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된 바 있다. 당시 거래소는 벌점 0.5점을 공시 위반 제재금 200만 원으로 대체 부과했다.

틈이 벌어진 제도는 고쳐야 한다. 거래소가 항상 강조하던 투자자 보호는 어디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