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기자

민원은 시민의 권리다. 크고 복잡한 행정 조직일수록 사각지대가 생기고, 그 빈틈은 민원을 통해 보완된다. 행정 기관이 시민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마땅하다.

문제는 민원을 오남용해 정당한 공무 집행을 옥죄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한 지방직 공무원은 불법 쓰레기 투기를 단속했다가 "왜 나만 잡느냐"는 민원에 시달렸다고 한다. 눈길 제설이나 건물 안에 들어온 고양이를 잡아달라는 것과 같은 사적 요구가 민원이란 이름으로 둔갑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분위기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간 파악된 악성 민원인은 2784명에 달했다. 담당자 개인 휴대전화로 수백 통의 문자를 보내거나 상습·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사례가 가장 많았고, 폭언·폭행 유형도 1000여 건에 이른다. 반복 민원으로 건강이 악화되는 사례까지 보고됐다. 이는 단순한 '불편 제기'의 수준을 넘어선다.

제도적 대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24년 민원처리법이 개정되면서 소송 비용 지원과 전담 부서 지정의 근거가 마련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여전히 공무원 개인이 대응해야 하는 문제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악성 민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단, 인사 이동을 기다리며 피하자는 선택이 굳어지고 있다. 바로 잡히지 않은 악성 민원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이제는 반복·상습 민원에 대한 관리 체계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 동일 사안의 반복 고소와 악의적 민원은 기관 차원에서 일괄 검토·대응하는 구조를 갖출 필요가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소속 공무원 23명을 상대로 1600건의 고소를 제기한 민원인에 대해 기관 차원의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 좋은 사례다.

고의성 입증에 필요한 증거 수집과 법률 지원 역시 개인이 아닌 조직이 책임져야 한다. 폭언·폭행 등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초기 단계부터 단호한 대응 원칙을 확립해야 더 많은 공무원 피해자를 막을 수 있다.

공직자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전제돼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 영역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고, '적극 행정' 역시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