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개월 동안 투자 라운드를 진행하는 벤처·스타트업 중 'AI'를 홍보하지 않는 곳이 없다. 국내 하우스는 AI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하고, 기업들은 AI 간판만 달면 투자 가능성이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 전성시대다. 'AI 3대 강국', '포용적 AI', 'AI 액션플랜' 등 이재명 정부 정책 곳곳에 AI가 담겨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출범식에서 "AI가 촉발한 문명사적 대전환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며 "AI 등 첨단 기술은 국력이자 경쟁력이고 곧 안보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정부는 국가의 미래산업 경쟁력 강화의 핵심 축으로 AI를 꼽고 대규모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5년간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AI 딥테크 등 미래 신산업에 정책자금을 쏟아붓는다는 계획이다. 특히 2차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AI 관련 신산업 분야에 1조2000억원을 투입하는 등 범정부 차원의 통 큰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와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성장금융) 등 주요 모펀드 운용기관의 주목적 투자 방향도 정부 정책에 맞춰 달라지고 있다. 모태펀드는 내년 예산 1조1000억원 중 절반 이상인 5500억원, 성장금융은 1조4700억원의 신규 출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출자 키워드로 AI를 제시했다. 최근에는 산업은행이 'AI 코리아 펀드'에 1500억원을, 모태펀드는 '넥스트 유니콘 프로젝트 펀드'에 3100억원을 출자했다. 두 펀드의 결성 목표액은 1조원이 넘는다.
그러나 대규모 자금 유입의 뒷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국내 하우스들은 모태펀드 등 정책 자금을 따내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AI 포트폴리오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고, 이 기회를 틈탄 일부 벤처·스타트업은 'AI 간판'을 만들고 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원천 AI 기술 기업이 아닌 AI를 통한 마케팅 기업에 정책 자금이 투입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실제로 올해 들어 AI 관련 기업 투자는 급증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AI 기술 스타트업에 투자한 투자사는 131개로, 상반기 투자사 중 약 30% 이상이 AI 기업에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자료를 집계하는 '혁신의 숲'에 따르면 지난 8월 한 달 동안에는 총 투자 금액 4425억원 중 AI 분야에만 1446억원이 몰렸다. 지난 5월 102억원과 비교해 약 14배 증가한 수치다.
업계 관계자는 "민간 출자가 부족한 국내에서 VC가 펀드를 결성하기 위해서는 모태펀드 등 정책 자금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며 "정책 자금의 방향이 AI로 향하고 있는 만큼 향후 위탁운용사에 선정되기 위해선 AI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AI 없이는 경쟁 자체가 힘들다는 뜻이다.
벤처·스타트업 역시 AI 간판을 앞세워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나 이차전지 등 첨단 전략산업은 이해한다 쳐도 패션 플랫폼, 인테리어, 사진·동영상 편집 기술 등에 AI를 첨가해 스스로를 AI 기업이라 칭하는 곳이 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오픈소스를 가져와 붙이는 데 그치며 정책 자금을 빨아들이는 모습이다.
최근 글로벌 기술 흐름을 볼 때 'AI가 곧 미래'라는 명제를 부정하긴 힘들다. 다만 정부의 목표인 원천 기술 개발 등 산업 생태계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명확하고 선별적인 자금 집행 체계를 구축하는 게 필수적이다. 국민 세금이 '눈먼 돈'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출자자(LP), VC, 기업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