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고 해서 경영권 방어 행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26일 ‘기업 밸류업을 위한 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서 김지평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의 발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가슴이 덜컹했다.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으면 기업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경영권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숨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실제 김 변호사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고 경영권 방어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 뒤에 “그래서 자기주식을 취득해 소각이나 처분하지 않고 대주주가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액주주들을 아프게 하는 온갖 자사주 관련 꼼수(우리는 이를 ‘자사주의 마법’이라고 부른다) 지적에 대해 “우리를 지켜주는 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라고 반박하는 듯 들렸다.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는 동학 개미로서 섬찟했다.

차등의결권이란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의 주식에 대해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주는 것이다.

유능한 경영자가 이 제도를 활용할 경우 외부 투자를 많이 받아도 경영권을 지킬 수 있어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렇게 되면 주가가 오를 테니 경영자도, 주주도 모두 행복해진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주주는 골치아프다. 무능한 경영자도 내쫓지 못하는 참호 구축 효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이날 세미나는 한국 증시만 유독 저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타개하자는 차원에서 열렸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넓히자고 제안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면,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이사에 대해 책임을 물을 근거가 마련된다. 지분 얼마 되지 않는 개인 대주주에게 충성하느라 수많은 주주를 다치게 하는 많은 잘못된 의사 결정을 막자는 것이다. 이복현 원장은 그 대신 일부 경영권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배임죄도 폐지하자고 했다.

재계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한 건 기자들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이날 200여개의 좌석을 준비했는데, 의자가 부족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수십명의 사람은 서서 세미나를 지켜봤다.

결과적으로 재계 측의 태도는 당황스러웠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하면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단 으름장을 놓기에 바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넓히면 ‘대주주의 경영권은 어떻게 지켜줄 것이냐’는 식이었다. 경영만 잘하면 여기저기서 모셔가고 싶어 하는 게 최고경영자(CEO)다. ‘얼마나 자신이 없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으로 일관할까’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작정한 범죄는 사전에 막기 쉽지 않으니 사후적인 처벌을 강화하자는 게 재계의 답변이었으면 오히려 여론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게 싫었으면 ‘회사의 현금을 개인의 곳간처럼 활용하는 이들을 따끔하게 벌하자’라는 다른 대안이라도 내놨어야 했다.

이복현 원장은 세미나를 마친 뒤 “(상법 개정 없이) 지금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 근거가 명확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학 개미들의 울분을 재계는 귀 기울여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