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인가 봐 어떡해. 이런 차를 빌리다니”

‘쾅’하는 굉음과 함께 급발진 의심 차량에 타고 있었던 운전자의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지난 1월 경기도 포천시 한 도로에 렌트카 한 대가 전복돼 있었다. 경찰이 출동한 사고 현장에는 여성 사망자 두명과 화목했던 가정을 잃은 채 중범죄자로 전락한 운전자 A씨가 있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사고 현장이 있다. 급발진 사고 현장이다. 전문 지식이 없는 운전자가 급발진 차량의 기술적인 결함을 밝혀 무혐의 처분을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제조사 측은 운전자의 실수나 운전미숙을 주장하며, 급발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 대체 가해자는 누구란 말인가.

급발진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수십 건에 달하는 감정을 의뢰하지만, 차량 결함을 인정한 사례는 지금까지 ‘0′건이다. 급발진 의심 사고를 증명하기 위해선 핵심 소프트웨어인 전자제어장치(ECU)를 활용할 수 있지만, 차량 제조사가 공개할 리 만무하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선 수사기관이나 자동차 제조사가 아닌 전문 지식이 없는 사고 피해자들이 직접 차량 결함을 입증하라는 의미다.

자동차에 장착된 소프트웨어인 전자제어장치(ECU)는 급발진 원인을 규명하는데 핵심 자료로 쓰일 수 있지만, 자동차 제조사는 보안상의 이유로 제출을 거부한다. 유의미한 증거 확보가 어려운 만큼 법원은 운전자의 운전 경력, 사건 정황, 블랙박스, 사고기록장치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급발진 차량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A씨는 택시 기사 경력만 30년이다. 그가 탔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에서는 급발진이 의심되는 부분이 담겨있다. 블랙박스 영상에서는 A씨와 그의 아내가 “차가 왜 이러지”, “브레이크가 안 된다”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는 앞에 있는 오토바이, 트럭,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량과의 충돌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1분 19초 동안 고군분투했다.

해당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 급발진 사고로 의심된다는 여론이 고조됐다. 블랙박스에 담긴 도로 위 의문의 돌진 사고를 본 대다수 사람은 “운전미숙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 A씨는 두 딸에게도 차량 급발진 의심 상황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줄 만큼 운전에 있어서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자동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급발진 판단 근거인 사고기록장치(EDR)가 신뢰성이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EDR과 블랙박스를 비교해 봤을 때 일치율이 맞지 않는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전자기 이상이 생기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아 국과수에서 조사해도 장치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며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봐 온 대로 책임은 운전자의 몫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형사 사건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과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유죄가 인정된다. 피해자에게 가해자 누명을 씌워선 안 된다는 의미다. 수사기관이 제조사 측에 ECU 자료를 받아보거나, 의무적으로 자동차 페달 블랙박스 장착을 하는 등 제도적 개선이 절실하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애먼 사람을 중범죄자로 만드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급발진 사고의 진범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