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의 꾸준한 오기가 이젠 무서울 정도입니다. 반도체 제조뿐 아니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에 지원을 퍼붓고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도 ‘무조건 한다’는 겁니다.”

지난주 국내 한 반도체 장비업체 대표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는 지난 8월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SMIC의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프로세서가 내장된 스마트폰을 출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 정부의 제재를 뚫고 내놓은 프리미엄 스마트폰 가격은 117만~150만원으로 고가이지만, 출시 후 두 달이 채 안 돼 160만대가 팔리고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이달 초 화웨이 온라인 쇼핑몰에 다시 나온 예약 판매 물량도 금세 동이 났다.

주문은 밀려드는데, 핵심 칩을 만드는 SMIC의 7㎚ 수율은 약 20%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현지 업계에서 나온다. 5개를 만들면 쓸 수 있는 양품이 1개뿐이라는 의미다. SMIC는 미 제재 대상인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대신 성능이 더 낮은 심자외선(DUV) 장비를 개조해 7㎚ 회로를 그리는데, 이 장비를 4번 돌리는 쿼드러플 공정을 사용한다. 이는 제조 비용을 높이는 요인이다. 업계에선 SMIC의 7㎚ 칩 제조 원가가 경쟁사보다 5배 이상 비싸다고 본다.

이런 와중에도 주문을 계속 받는 화웨이와 SMIC의 무모함은 중국 정부의 지원에서 나온다. 화웨이는 중국 최대 인터넷포털 바이두에 엔비디아의 최첨단 칩을 대체할 인공지능(AI)용 반도체를 납품한다. 이 또한 SMIC가 만든다. 낮은 수율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제조 비용은 중국 당국의 천문학적인 지원금으로 충당한다. “중국 정부는 수율은 노하우가 쌓이면 오른다고 보고,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듯 지원을 이어온 것”이라고 현지 업체 직원은 말했다.

중국이 외치는 반도체 자립은 산업의 뼈대인 소부장부터 ‘메이드 인 차이나’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장비 하나를 개발하는 데 5~10년이 걸려도 지원은 계속된다. 성과는 중국 생태계 곳곳에서 느리지만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7㎚ 칩이 쓰인 화웨이 스마트폰의 부품 절반은 중국산으로 채워졌다. 지난 여름엔 중국 업체가 28㎚ DUV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반도체 설계 핵심 기술이자 미국 텃밭인 반도체설계자동화(EDA) 시장에서도 지난 15년간 집중 지원을 받아 온 중국 기업이 점차 두각을 보이고 있다.

전 세계 공급망이 얽힌 반도체 산업 특성상 중국의 자립 시도는 일부 성공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미 국내 소부장 업계는 새로 부상하는 중국 업체들의 위협이 매섭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에 납품하던 국산 반도체 부품과 장비는 빠르게 중국산으로 대체되고 있다. 화웨이 최신 프리미엄 스마트폰에서도 기존에 쓰이던 일부 국산 부품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갈 길이 먼 국내 반도체 소부장 업계는 내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싱숭생숭한 분위기다. 부정부패로 낭비되는 예산은 없애야 마땅하지만, 당장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개발 지원을 끊는 건 겨우 자라나는 반도체 생태계 근간을 짓밟는 일이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외에 다른 반도체 분야에 뛰어든 건 불과 25년 전이다. 반도체가 그 어떤 산업보다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단기적 성과보다는 미래 50년을 내다보고 취약한 생태계 저변을 다져나가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