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지회사들은 수출을 위해서라도 고품질의 펄프를 들여와 쓴다. 구조적으로 저가·저품질 제품을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원자재 수입 규제가 강화돼도 서류 작업이 복잡해지는 것 빼고는 큰 영향이 없다. 문제는 원자재 수입 기준만 까다로워지고 같은 원자재를 쓴 완제품 수입 기준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최근 한 제지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만 옥죄는 정부 정책 때문에 저품질 수입품과 가격 격쟁이 벌어져 걱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목재 원자재의 수입 요건을 강화한 ‘합법 목재 교역촉진제도’를 2019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목재 수입 시 산림청장에게 신고하고 한국임업진흥원으로부터 합법으로 벌목된 목재인지 추가 심사받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올해 5월부터는 ‘목재펄프’도 품목에 포함돼, 제지기업이 제도의 영향을 받게 됐다. 펄프는 인쇄용지, 화장지, 식품 포장지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국내 제지기업은 유럽과 미국 수출이 많아, 이들 국가의 환경 규제를 따르기 위해 산림관리협의회(FSC) 등의 인증을 받은 합법 목재 펄프를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제도 시행으로 원자재 조달 비용이 늘거나 조달처를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기진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진짜 문제는 저가 수입지의 국내 시장 침투다. 현행 합법 목재 교역제도는 원자재 수입만 규제할 뿐, 같은 품목의 원자재로 만든 완제품은 규제하지 않는다. 국내 기업이 불법 벌목 목재를 들여와 생산하는 건 안 되지만, 해외에서 불법 목재로 만들어진 완제품은 국내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업계는 규제 대상을 완제품으로까지 확대해달라며 정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추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펄프 원료 제품의 수입 비중은 점점 늘고 있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인쇄용지와 화장지 수입 비중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0%에 미치지 못했지만, 지난해 기준 인쇄용지는 13%, 화장지는 17.8%를 기록했다. 특히 화장지는 2015년 7.1%에서 2020년 20.2%로 수입 비중이 5년 새 3배가 됐다. 인도네시아와 중국산 물량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 국내 제지기업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화장지는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중요하다”며 “국내 기업은 원자재 규제 때문에 저가·저품질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데, 수입산 화장지가 싼값을 앞세워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으니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종이 산업 위축 속에서 국내 제지기업들은 불황을 견디고 있다. 양강 기업인 한솔제지와 무림P&P는 연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0%가량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EU) 27개국과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은 자국 산업보호를 위해 완제품 수입에 대해서도 원자재 수입과 같은 기준으로 규제한다. 정부가 국내 제지산업을 직접 지원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운동장을 기울이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