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기획재정부가 처음부터 '금전출납부(金錢出納部)' 신세였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상사태 끝에 2017년 5월 9일 임기를 시작한 문재인 정부는 불과 26일만에 11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을 편성했다. 역대 정부 최단 추경 편성 기록이다. 7월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추경 예산은 정부 출범 두 달 만에 뚝딱 세상에 나왔다.
공무원 1만2000명 증원 실탄이 담긴 이 예산안에 대해 청와대는 "오롯이 일자리 예산만으로만 구성된 사상 첫 추경"이라고 했지만, 예산을 편성한 기재부는 "빚을 내지 않는 추경"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종시 관가에서는 '추경 규모를 키우자는 청와대 요구를 기재부가 막아낸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초과세수 등 가용 재원 범위 이내에서 편성해야 한다는 기재부 반대 때문에 11조원으로 결정됐다'는 것이었다.
추경 국회 심의 도중인 7월 18일 느닷없이 발표된 차관급 인사는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보탰다. 청와대가 "박춘섭 기재부 예산실장을 조달청장에 임명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정부 예산안 편성을 진두지휘하는 예산실장을 국회 심의 과정에 바꾸는 전례 없는 인사에 무성한 추측이 나왔다.
행정고시 31회 출신으로 엘리트 예산 관료 코스를 밟은 박춘섭 전 조달청장은 '재정 건전성'에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강직한 그의 성품이 청와대와의 타협을 어렵게 만들었고, 기재부 2차관으로 승진길을 가로막았다는 게 지금껏 관료사회의 중론이다. 최근 10년 동안 2차관에 오르지 못한 예산실장은 그가 유일하다.
문재인 정부 2년차까지 청와대 독주에 기재부가 제 목소리를 낸 것은 소신과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 1급 고위직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최근 정치 행보처럼 당시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그때도 오락가락했다.
2018년 12월까지 최장수 기재부 차관보 재임 기록을 세운 이찬우 전 차관보(행시 31회)는 사안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청와대 반대를 무릅쓰고 3.0%였던 2018년 정부의 성장률 전망치를 2.9%로 낮추는 작업을 주도했다. '고작 0.1%P(포인트) 낮춘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해 16.4% 인상된 최저임금이 경기에 악영향을 줬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징성이 있었다. 집권 5년을 마치는 지금까지 자화자찬에 목 매고 있는 현 집권 세력에게는 반기를 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혁신 성장'을 내세운 김동연 전 부총리가 최저임금 인상률 등을 둘러싸고 청와대에 맞선 것도 이 전 차관보의 역할이 컸다. 결국 그는 김 전 부총리 퇴임과 동시에 공직을 그만둬야 했고, 지난해 10월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차관급)에 임명될 때까지 2년 10개월 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청와대에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은 것이다.
홍남기호(號) 기획재정부가 '홍두사미(홍남기+용두사미)', '홍백기'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은 실력과 소신을 두루 갖춘 공직자들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민주당 요구에 토를 단 관료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 올해 초 60조원에 이르는 초과세수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재부 세제실장이 돌연 경질된 것은 재보궐선거와 대통령 선거용 추경에 민주당이 요구한 금액을 맞추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에 가까웠다.
소신 있는 관료들이 물러나자 하명(下命) 받드는 데 익숙한 '예스맨(Yes man)'이 득세했다. "부총리 측근, 호남 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자리 독식한다"는 푸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경제 통계가 나오면 청와대 입맛에 좋은 부분만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발표하는 게 일상이 됐다. 기재부가 매일 배포하는 언론 스크랩에서 정부 비판적인 기사, 칼럼을 삭제해 국회 국정 감사에서 지적 받기도 했다.
이런 일을 주도한 인물들이 지금의 기재부 고위직을 채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사람들이 차기 정부에서 또 중용된다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께 약속한 '경제정책의 정상화'는 요원하다. 문재인 정부 예스맨들에게 민간 주도 시장경제, 재정·부동산 정책 정상화로 향하는 '윤석열 노믹스'를 이끌 힘은 없다. 벌써 "현 정부에서 나랏돈 펑펑 쓰는 데 앞장섰던 인물들이 정권 바뀌니 재정 건전성 타령한다"는 뒷말이 나온다.
정책 정상화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고 했던, 소명 의식 있는 관료들이, 능력에 걸맞는 자리에서 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