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케이블TV 채널을 통해 본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자와 나오키’는 일본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로, 작년에 방영된 ‘시즌2′는 은행원인 한자와 나오키가 기업 회생을 돕는 모습을 그렸다. 극중에서 한자와는 기업, 은행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정치 권력과 맞섰다. 도쿄중앙은행이 제국항공에게 대출해준 500억엔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시라이 아키코 국토교통성 장관에게, 실무자인 한자와 나오키 차장은 조목조목 따졌다.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은행원, 그리고 나는 장관입니다. 비행기를 띄우는 것은 기장인 리더가 결정합니다. 현장은 나사와 같습니다.” (시라이 아키코 국교성 장관)

“저도 샐러리맨인 이상 하나의 나사로서 리더의 지시를 따르는 게 일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현장의 자긍심이 있습니다. 그런 자긍심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이 조종하는 나라는 불행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한자와 나오키 도쿄중앙은행 영업2부 차장)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 내용을 접했을 때 이 장면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확장재정을 요구하는 의견과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내년까지는 경기의 확실한 반등과 코로나로 인한 격차 해소를 위한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큰 폭으로 증가한 추가 세수를 활용한 추가 재정 투입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주문했다.

작년에 발표된 2020~2024년 중기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올해 8.5%인 정부 총지출 증가율은 내년에는 6.0%으로 낮아진다. 청와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기획재정부는 ‘내년까지 확장재정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지출 증가율이 확 꺾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2020~2024년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재정운용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회의를 앞두고 “내년부터는 정부 지출 증가폭이 줄어들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쏟아졌지만, 기재부가 해명자료 한번 안 낸 이유다.

재정전략회의를 준비한 기재부 실무진들은 문 대통령 발언을 접하고 ‘허탈했다'고 한다. ‘추가 재정 투입 가능성'이란 말이 예상하지 않았던 추경 논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현장의 자긍심’을 무시 당하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기재부 실무진이 작성한 자료에는 1분기 세수가 올해 세입 예산안에 비해 19조원 더 걷혔다는 점이 강조됐다고 한다. 국가재정법 원칙대로 더 걷힌 세수를 적자국채 상환에 쓰게 되면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정부 전망치(48.2%)에 비해 1~2%P 이상 낮아진다. 이 대로면 올해 중 국가채무비율이 50%를 넘을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도 사라진다.

실무진들은 2분기 이후에도 세수가 더 걷힐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국가채무비율 등은 전망보다 더 낮아질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독(毒)’이 됐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늘어난 세수를 빚을 갚는 데 쓰지 않으면, 민주당이 약속한 전(全)국민지원금을 뿌릴 수 있는 종잣돈이 생긴다고 계산했다.

청와대 재정전략회의 다음날(28일) 윤호중 원내대표는 2차 추가경정예산편성 방침을 공식화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추경 관련 뉴스가 여권발(發)로 쏟아졌다. 기재부는 이를 부인하는 반박자료를 냈지만, 여론은 전국민지원금, 소상공인 손실보상, 백신유급 휴가비를 위한 30조원 규모 추경 예산이 편성된다고 믿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4일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입안한 청와대 참모 출신 국책연구원장들 앞에서 “추경 편성을 검토하겠다”고 말한 것은 사후 확인에 불과했다.

‘세수가 더 걷혀서 빚 없는 추경을 한다’는 말은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국가재정법은 세입 예산에 비해 더 걷힌 세수는 당해 연도 발생 적자국채 상환에 1순위로 사용하도록 정했다. 미래세대에 빚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올해 중으로 나랏빚이 120조원 늘어나는 상황에서, 더 걷힌 세수를 빚 증가 속도를 늦추는 데 쓰지 않는 것은 ‘먹튀' 같은 짓이다. 흥청망청 쓸 돈을 위해 자식들에게 빚을 떠넘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몇몇일 밤을 새면서 보고서를 만들었을 기재부 실무진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 기재부 내부에서는 세수 증가를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세수가 더 걷힐수록 민주당이 요구하는 추경 예산 금액이 천정부지로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미래 세대에 떠넘길 빚이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의미다.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경제관료에게는 치욕으로 느껴질 일이다.


“나사 하나하나는 작고 미력하지만 잘못된 힘에 대해서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합니다. 나사에도 각각의 역할이 있습니다. 대형 여객기에 사용되는 200만개 이상 나사 중 하나라도 없으면 비행기는 날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저희는 작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합니다.”

시라이 장관이 요구한 채권포기안을 무산시킨 은행원들을 대표해 한자와 나오키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현장의 자긍심'을 무시한 나라에 미래는 없다.

2020년 3분기에 일본 T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시즌2의 한 장면. 일본 국민 배우 사카이 마사토가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