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을 쓴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사진=고운호 기자

영화 ‘조커’의 고담시는 뉴욕을 닮았다.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요!(아서)”

“아무도 당신같은 사람에게 관심없어요!(심리상담사).”

아픈 남자 아서 플렉스는 7개의 알약을 삼키며 분열된 자아를 통제하며 살아가다 마침내 병든 도시의 빌런 ‘조커’가 된다.

다행히 현실의 뉴욕에는 귀 밝은 정신과 의사가 산다. 예일대 정신과 나종호 교수는 8만 명의 노숙자가 사는 뉴욕의 정신과 응급실에서 수련의로 일한 경험을 책으로 썼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은 한 정신과 의사의 해맑은 확대경으로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그늘을 비춘 기록이다. 자살 충동으로 정신과 응급실을 찾은 노숙자, 자폐아, 싱글맘, 트랜스젠더, 이민자들, 조현병과 알코올중독으로 눈물짓는 변호사와 의사들… 각자의 곤경으로 그늘진 사람들에게 나종호는 경청의 체온을 더한다.

넓은 자간에 선명하고 굵은 글씨는 노인이나 어린이가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사람도 첫인상부터 순해 보였는데, 정신 질환자들을 기술하는 언어 또한 ‘의사스럽지’ 않아서 신기했다. 속 깊은 어린이가 아픈 친구를 염려하며 쓴 일기처럼, 편견의 티끌이 없어 문장의 명도와 채도가 높았다.

서울대의학대학원,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뉴욕대학교 정신과 레지던트를 거쳐 현재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나종호.

거쳐 간 명문대 이름만 들으면 보통 사람 기죽일만한 엘리트가 스스로 오만한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외부자와 소수자’를 자처해서 산 까닭이 궁금했다. 나종호는 문과생으로 심리학을 공부하다 늦은 나이에 의과대학원으로 전공을 바꿨고, 동양인 남자 정신과 의사라는 마이너 정체성으로 파란만장한 뉴욕 정신 질환자들을 상대했다.

정신과 의사가 된 이유는 ‘자살자들’에 대한 애달픔 때문이었다.

수많은 환자를 만났지만, 그가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연구한 분야는 중독과 자살이다. 특히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정확하게 에둘러 표현하는 한국의 언어문화가 자살을 왜곡할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초여름 더위가 시작되던 날. 잘 닦은 거울처럼 무표정에도 미소가 고인 온유한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뉴욕 병원의 응급실은 노숙자들과 자살 시도자들, 자살 생각을 막아달라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새통이더군요. 생경한 풍경이었어요.

“뉴욕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8만 명이 노숙자예요. 벨뷰 병원의 환자 중 70%도 노숙자죠. 정신질환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어 노숙자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응급실 전체 환자의 10%는 자살 충동으로 온 사람들이에요. ‘자살 생각이 심해지면 응급실을 찾는다’가 일종의 사회적 의료 공식이죠.”

그는 자살, 중독, 트라우마, 애도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사진=고운호 기자

-자살 생각만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는다? 그 ‘공식’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지요?

“자살에 대한 대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면 가능해요. 가령 AFSP(미국 자살 예방 재단)에서 만든 단체는 자살 유가족, 자살 시도자, 정신 질환자들이 밤새 함께 걷는 캠페인을 해요. 그런 행사가 주목을 받고 규모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제가 미국에 있던 7년 동안에도 변화를 체감할 정도죠. 상담을 정기 테라피처럼 받는 사람도 확실히 많아졌고요.”

침착한 눈을 빛내며 그가 말했다.

자살을 양지로 끌어내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여전히 한국 언론이 자살을 정확히 호명하지 않고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자살 고위험군이었던 가수 설리가 사망했을 때도 그 문제를 제기하고 이슈화됐지만, 어느새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로 다시 후퇴하더라고.

-모호하게 은폐할수록 역기능이 더 많아지나요?

“일단 자살을 ‘익스트림 초이스’라고 표현하면 미국에서는 논란이 될 거예요. 과거에는 이곳 언론도 자살을 ‘저지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커밋(commit)를 썼는데, 요즘에는 심플하게 ‘자살로 사망했다’고 해요. ‘선택’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거든요.

언어가 정말로 중요한 게, 소수자인 당사자 집단에 상처가 돼요. 가령 ‘모든 정신질환자가 위험한 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바꿔서 ‘모든 아시아인이 폭력적인 건 아니다’라는 표현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죠? 당사자가 되면 문제가 더 선명하게 보여요.

그래서 ‘대부분의 정신질환자가 폭력적이거나 위험하지 않다’라고 써야 해요. 자살도 그렇습니다. ‘극단적 선택’으로 표현하면 일단 유가족이 낙인 찍혀요. 개개인의 자살 사유는 내밀해서 알기 힘든데, 차후에 “네 아버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어?” “왜 너는 그걸 못 말렸어?”라는 질문을 받아요. 이중적인 죄책감, 더 깊은 수렁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 ‘극단적 선택’이라는 상상의 어휘를 쓰지 말고, 자살을 자살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자살시도자가 테드 강연을 해요. 민감하지만 사회적 손실이 큰 문제니까, 공개적으로 나누는 거죠.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요.”

LA에서 활동 중인 정신건강가족미션의 김영철 목사(’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 저자)를 인터뷰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살 충동이 있는 사람이 ‘우울하다’는 사인을 보내면, 그 순간을 정확하게 붙잡아서 물어야 한다고 했다. “너 혹시 자살할 생각을 했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 “구체적인 방법도 생각한 거야?” 충동에 기름 붓는 것 같지만, 직면시키면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자살 의지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했다.

온유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신과 의사 나종호.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을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사진=고운호 기자

-문과인 심리학과에서 의대대학원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정신과 의사가 됐어요. 흔치 않은 경우인데 이유가 있습니까?

“학부 시절에 한 선배가 자살을 했어요. 잘 생기고 축구도 잘하고 모두가 좋아했던 분이라 충격이 컸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 뉴스로 본 배우 이은주 씨 죽음도 가슴 아팠고요. 그 뒤 한국 연예인들이 계속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걸 보고 결심이 섰죠.”

-요즘엔 좋은 정신과 주치의를 만나는 게 인생의 복이라고도 해요. 진심으로 이해받고 수용 받으면 삶의 곤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미소 지으며)정신과에서는 상담을 인터뷰라고 해요. 차트 기록을 보고 개인적인 질문을 하니까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환자의 의지를 바탕으로, 의사는 충분히 지지하면서 들어줍니다.”

-단 한 사람만 나를 믿어줘도 자존감이 지켜진다고 들었어요. 타인을 믿는 것도 능력이라고요.

“맞아요. 선생님 한 분만 잘 만나도 평생 살 힘이 생겨요.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그랬어요. 진심으로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다시 살 수 있다고요.”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믿는 건 듣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주는 거죠. 공감하면서. 대개는 ‘다음에 무슨 말 할까, 어떻게 반박할까’를 준비하느라 잘 못 들어요. 온전히 집중을 못 하죠. 그런데 잘 듣는 관계가 정신 건강의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판사도 의사도 그 업의 본질은 판단과 처방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이야기를 듣고 주목해주는 마지막 청자가 아닐까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인생을 장기적으로 보고 서사를 파악하는 직업이죠.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는 거예요. 치료하는 과정은 그래서 환자를 인터뷰하고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나종호는 환자의 믿음이 의사의 전문성을 만든다고 믿었다. 의학적 해결 방식을 가진 전문가임에도 환자를 구제해야 할 ‘문제적 인간’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고맙게 동등하게 바라보는 마음은 그를 ‘결이 다른’ 의사로 만들었다.

뉴욕 대학교 레지던트들이 수련을 받는 공립 벨뷰 병원의 환자 중 70%가 노숙자다.

-어떤 환자가 기억에 남습니까?

“환자가 했던 구체적인 말들은 잊어요. 반면 환자가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는지는 기억나죠. 중증 조현병 환자였던 샐리가 생각나요. 샐리는 스스로를 사랑했고, 열심히 봉사하면서 사회가 주는 혐오를 씩씩하게 이겨냈어요. 2년간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제게는 행운이었어요.

응급실에 자살 생각을 호소하며 찾아와서 샌드위치를 먹고 하룻밤씩 자고 가던 노숙자 테디도 생각나요. 테디가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어요. 개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준다고요. 뉴욕의 겨울은 혹독해서 그 강아지가 끙끙 앓던 밤, 테디가 무작정 정신과 응급실로 찾아왔어요. 그 밤에, 작은 생명을 입양 센터로 보내기로 결정하고는, ‘엄마’처럼 서럽게 울던 모습이 기억나요.”

타인을 한 권의 책처럼 대하면 많은 문제가 사라진다고 했다.

“책 한 권을 읽으려고 해도 감정의 준비가 필요해요.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죠. 공감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요. 첫째,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가치가 있다. 둘째,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셋째, 스위치를 잠깐 끄고 오롯이 집중한다.”

-가장 중요한 건 뭐죠?

“이해하고 싶은 의지죠. 환자에게 “담배 피우지 마세요! 술 끊으세요!” 백날 말해도 안 들어요. “당신이 넘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안전이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 순간 마음이 움직여요.

‘소수자 차별하면 안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잘 안 바꿔요. ‘노숙자는 뻔뻔하다, 위험하다’는 편견을 지적하는 것보다, 노숙들의 실제 서사를 들려주면 그때 느껴요. 아,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구나…”

-왜 어떤 사람은 편견이 더하고 어떤 사람은 덜한 걸까요?

“편견은 생존에 필요한 진화의 산물이에요. 뇌 용량이 정해져 있으니까 이 집단과 저 집단을 분류해서 재빨리 위험을 피하려는 거죠. 중요한 건 ‘내가 편견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거예요. 모든 개선은 인정에서 시작합니다. 저도 진료실에 들어가면 편견 없이 ‘경청’하려고 매번 노력해요.”

-나의 편견 정도를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안 보이면 문제의식을 느껴야죠. 예전엔 놀이터에 부잣집 아이 가난한 집 아이 다 섞여서 놀았잖아요. 어른도 직업과 환경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줄면, 그만큼 사고 영역이 좁아져요.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서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 제시한 방법도 단순했어요. SNS에서 정치 사회적 의견이 다른 사람을 팔로우하고, 정기적으로 점심 식사에 초대하라고요.”

그는 덴마크에 있는 사람 도서관을 빗대어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라는 책을 썼다. 편견을 없애기 위해 수련의 과정에서 만난 정신질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생생하게 기록했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MBTI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어요.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편견 억제에 도움이 될까요?

“(미소 지으며)MBTI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노동자가 부족해지면서 성격 유형에 맞춰 빠르게 직무를 맡길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가장 큰 장점은 16가지 성격을 기술하는데 나쁜 표현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다들 열광하는 지점일 테고요.

다만 학계에서 MBTI에 대한 신뢰도는 전혀 없어요. 성격은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수천 수만 가지예요. 그럼에도 MBTI가 나와 타인의 장점을 보도록 도와준다는 점은 인정해요.”

-MBTI 유행처럼, 한국인은 하나에 빠지면 극도로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콘텐츠 중심 세상에서는 확실히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지만, 정신의학적으로는 어떤가요?

“빛도 그림자도 다 있죠.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걸 몸으로 느끼면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빛 뒤의 어둠처럼, 성공 이면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걸 간과할 수 없죠. 미국에서 자살 위험군으로 치는 전역 군인의 자살률이 한국 전체의 자살률과 비슷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비교해도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예방 예산은 훨씬 적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어떤 이야기를 펼쳐가도 자살과 편견, 두 가지로 주제가 모였다.

책에서 그는 공감과 편견에 대해 교차방식으로 여러 가지 풍경을 보여준다. 백인 엘리트 의사들은 알코올중독과 자살 충동으로 응급실로 온 은퇴한 전직 의대 교수에게 깊은 공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동양인 이민자인 나종호가 환자 앞에서 인종 차별적 발언을 들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찾아와 위로를 건넨 사람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적이 있는 흑인 의사였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마음의 환부를 들여다보는 정신과 의사들조차도.

-인종차별 발언을 자주 듣습니까?

“같은 의사들 사이에선 없어요. 그게 문제라는 걸 알죠. 일례로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의사도 흑인 모델을 비하하는 말을 썼다가 직위를 박탈당한 일이 있어요. 환자들은 달라요. 술에 취하면 속마음 드러내듯, 약물에 취하면 억제되지 않은 본성이 나오니까. 모든 혐오가 그래요. 하는 사람은 잘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평생 기억에 남죠.”

-벨뷰 병원의 동성애자 의사와 싱글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인지적 공감의 좋은 사례더군요.

“네. 제이콥의 어머니는 싱글맘이었고, 자폐아를 힘겹게 키우고 있었어요. 제이콥이 환청을 듣는다며 응급실에 찾아와서, 한 달에 며칠씩 입원하다 돌아갔죠. 병원에서는 사정을 알고 눈감아줬지만, 동정만으로 계속 유지될 수는 없었어요. 그즈음 동성애자 교수가 가족 면담을 잡아서 제이콥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저도 아이를 입양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요. 아이가 없어서 어머니가 어떤 심정인지 모르죠. 하지만 듣고 싶고 배우고 싶어요. 어머니가 제이콥을 어떻게 키우셨는지.” 그때 제이콥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어요. 그 동성애자 교수는 1시간가량 어머니의 이야기를 정성껏 듣고 감사를 표현했고,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자폐아 부모 모임과 외래 클리닉을 주선해줬어요.

그때 정확히 알았어요. 공감은 동일시가 아니구나.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아도 노력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구나.”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아픔을 모르니, 오직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레비나스가 그랬지요. 몰라도 그 자리를 인정하려는 정직한 마음… 심퍼시에서 엠퍼시로 가는 단계에서 필요한 건 그런 지적인 분투겠지요.

“네. 측은지심으로 시작했어도, 인지적 노력이 동반돼야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동성애자 교수는 자폐아를 키우는 싱글맘을 동정한 게 아니라, 그 자리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싶어 했어요. 편견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계속 강조하는 거예요. 우울증이나 중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지만 공감은 의지의 문제라고.”

그는 정신과의사 어빈 얄롬 박사의 저서들과 신경과 의사 폴 칼라니티가 죽어가면서 쓴 책 ‘숨결이 바람이 될 때’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사진=고운호 기자

나종호는 그렇게 하루하루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정성을 기울이는 의사로 살고 싶다고 했다.

-매 순간 그런 의지력을 발휘하는 게 힘들지는 않은지요?

“심한 외상후스트레스 환자를 만나면 간접 트라우마를 겪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대단한 소명 의식보다 ‘의사는 직업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강해요. 그래서 그런지 힘든 과정을 함께 하는 게 특권처럼 여겨져요. 저를 믿어주면 고맙고 행복한 마음이 크죠.”

그가 쓴 환자의 이야기가 왜 슬프기보다 밝은지 알겠다. 치료자가 그들을 불쌍하게 내려다보지 않고 동행자로 아름답게 봐줄 때, 바늘 틈새라도 햇빛이 스며드는 것이다.

-실패한 환자도 있나요?

“맨해튼에서 매춘을 하던 남미 출신의 트랜스젠더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어요. 어떤 약도 그녀의 심연의 슬픔을 덜어주지 못했죠. 만성 우울증은 과거의 선택을 반복해서 후회하거든요. 그런 그녀도 성전환을 후회하진 않았어요. 애초에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그녀의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하고 끝이 났어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요.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와 함께 일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환자가 의사를 바꿀 때, ‘해고했다’고 하죠. 다행히 아직까지 해고당한 적은 없습니다.”

여전히 정신의학은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뇌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지의 블랙박스고 의사들은 모르는 게 많다고.

-정신질환은 왜 생기나요?

“조현병, 우울증, 양극성 장애, 중독 등은 뇌과학적인 기전으로 봐요. 신경전달 물질이 불균형할 때, 세로토닌, 도파민 등을 약물로 균형을 맞춰주는 처방을 하죠. 하지만 생물학적인 기전으로만 설명하긴 어려워요. 뇌과학, 심리적 기전, 사회적 환경 3가지를 두루 봅니다. 고혈압 당뇨처럼 중증 정신질환이 저소득층에 많은 것도 사회적 기전이죠.

정신과에서 생물학적인 기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예요. 더불어 뇌의 오작동이라면 나도 당신도 정신질환에 완전히 예외일 수는 없다는 거고요. 변호사였다가 거리의 조현병 환자가 된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가 된 의대 교수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어요.”

생물학적 이유로 보면 누구나 알코올 중독이나 조현병에 걸릴 수 있다.

-‘사라지고 싶다’ ‘이런 암울한 삶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울할 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를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걸 인지하는 순간 ‘차단하면’ 됩니다. 쉽지 않죠. 항우울제 약을 먹으면 ‘반추’ 즉 부정적 생각의 되새김질이 확실히 줄어듭니다.

올림픽 23관왕에 빛나는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자신의 정신질환(우울, 불안, 자살 생각)을 밝힌 대표적인 유명 인사예요. 그가 입원했을 때 감정 노트를 썼다고 해요. 짜증, 불안, 불쾌 등등을 표시하고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패턴을 읽었다고요. 부정적인 감정의 전조 증상이 오면 주위를 분산시키는 등 일종의 루틴을 만드는 거죠. 펠프스처럼 자신에게 맞는 처방을 찾는 것도 방법입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당신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지요?

“(반색하며)제 인생의 가장 큰 특권은 부모님이셨어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님이 무조건적인 경청과 사랑을 가르쳐주셨어요. 공부 강요도 없었고, 통제도 없었고 그렇다고 방임하지도 않으셨어요. 상담사처럼 완전하게 믿어주셨어요. 어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것도 뒤늦게 의학 공부를 하면서 겪은 배부른 우울증 정도였어요.”

상처의 인장 없이 오직 경청의 노력만으로 타인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는 치유자가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처지가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뇌의 블랙박스는 풀 길이 없고, 아무도 완전할 수 없기에, 우리가 오직 낙인 없는 세상에서 서로 온전히 읽히길 바랄뿐.

검은 머리 이민자 출신의 정신과 의사가 만난 뉴욕의 아프고 아름다운 사람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뉴욕의 정신과 의사로서 사는 게 행복했나요?

“그럼요. 다양한 분들을 만났잖아요. 도시의 특성이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치마 입고 다녀도 조커 가면 쓰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요. 다들 개성이 강하고 제각각 아름다웠어요. 저는 저를 사람 도서관 사서라고 소개하는데요. 사랑스러운 서가에서 무슬림, 유대인, 트랜스젠더, 조현병 환자, 노숙자라는 귀한 책들을 다 만났어요. 다른 집단의 소수자를 만난다는 건 굉장한 특권이었어요.

생각해보면 저 또한 그분들께 특이한 책이었겠지요. 나이 들어서 미국에 온 아시아 출신 남자 의사를, 환자들이 언제 또 봤겠어요? 믿어준 게 기적이죠. 저한테 인종차별 발언을 했던 그 트럼프 지지자도, 어쩌면 ‘저를 너무 믿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모두 모두 서가 한 켠을 지킨 이야기라고 그가 미소 지었다. 악기들이 서로의 몸을 타고 소리를 내듯이, 만나면 결국 공명하게 된다고.

상처의 인장 없이 오직 경청과 노력만으로 타인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는 치유자./사진=고운호 기자

-마지막으로 대도시에서 안간힘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조언을 부탁합니다.

“항상 ‘내 기분이 어떤가?’ 물어주세요. 내 감정을 뒷전으로 하고 남만 챙기는 사람이 더 위험합니다. 일례로 코로나 기간에 봉사하는 의료진들도 정신질환 고위험군이 돼서 자살률이 높았어요. 부정적인 전조 증상이 올라오면 서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도 가르치세요. 도움을 청하는 게 약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감정을 이야기하는 문화, 정신과 의사와 카운슬러를 찾는 문화가 더 자연스러워지면 좋겠어요. 자기 관리도 자살 예방도 ‘마음을 물어주는 것’에서 시작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