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일그러진 부분과 잔혹하게 대결하면서 또는 어루만지고 돌보면서 인생의 국면을 돌파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당신이 지닌 소수자성 즉 약점이나 콤플렉스는 극복이 아니라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사와다 도모히로의 ’마이너리티 디자인’ 중에서.
그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카피라이터였다. 재능도 있어 시부야역에 그의 광고 카피가 도배 되기도 했다. 보람찬 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지만, 아들이 생후 3개월 만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간 머릿속 불이 꺼지고 세상이 캄캄해졌다.
‘다 끝났다! 내가 아무리 아름다운 광고를 만들어도 내 아들은 볼 수 없구나!’
32살에 그의 일과 보람은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아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알아보려고 장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직장 상사에게 아들의 시각장애를 알리고 업무의 90%를 줄였다. 장애 당사자와 가족, 장애인 고용자 등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둠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라이터는 한 손만 쓸 수 있는 사람을 위해 발명되었고, 구부러진 빨대는 누워서 생활하는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못 하는 일이 있는 건 당사자 잘못이 아니야. 사회를 바꾸면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저자 사와다 도모히로를 소개한다.
그는 아들에게 장애가 있는 것을 알고 강점만으로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20대 시절엔 필사적으로 강점을 갈고 닦았지만, 장애가 있는 아들과 친구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약점도 나다운 거야”
그는 지금 모든 강점과 약점을 두루 써서 일하고 있다. 카피를 쓴다는 강점, 운동 신경이 둔하다는 약점, 광고회사 직원이라는 강점,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약점… 모든 것을 그러모아서 ‘소수자 시장’을 개척했다.
‘운동치’ 들을 위한 대체 스포츠 ‘유루 스포츠’를 비롯해 그의 역발상이 히트시킨 아이템들이 일본 사회에 건강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컨대 거칠게 공을 다루면 응애응애 울음소리가 나는 ‘갓난아기 농구’, 가운데 구멍이 뚫린 라켓을 쓰는 ‘블랙홀 탁구’, 손에 미끌미끌한 비누를 묻혀서 하는 ‘핸드소프볼’, 고령화 문제를 역으로 활용한 할아버지 아이돌 그룹 ‘지팝’, 지체 장애인의 ‘보는 기능’과 시각장애인의 ‘걷는 기능’을 서로 빌려주는 신체 공유 로봇 ‘닌닌’...
“약점을 버리고 강점만으로 경쟁했다면 지금도 광고 카피밖에는 못 썼을 겁니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소수자의 ‘사회적 시력’으로, 섬세한 역발상 시장을 개척한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사와다 도모히로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질문에 답을 준비하며 ‘마이너리티 디자인2′를 쓰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들의 핸디캡으로 자기 안의 소수성을 발견하는 과정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런 선순환이 일어났나요?
“장애 당사자들과 관련자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어요. 장애 덕분에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좋은 사례’가 많았어요. ‘굿 뉴스’를 만난 덕분에 저와 아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아들의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200여 명의 사람을 만났다고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물어봤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꿈은 무엇인지. 다른 분을 소개해줄 수 있는지… 정말 큰 공부가 됐어요. 왜 지금까지 그들과 관계 맺지 않았을까.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어요. 모든 정보를 검색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정보는 사람에게 있어요. 검색하는 대신 사람을 만나 질문하면, 디지털에 없는 정보가 술술 흘러나와요. 실제로 장애 당사자와 관련자를 만나보니 제가 찾아 헤매던 온갖 단서와 아이디어가 가득했어요. 조금씩 아들의 인생이 그려졌죠.”
‘장애가 있다=불쌍하다’는 등식 대신 다른 해법이 생겼다. 못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대신 사회를 더 좋게 바꾸면 된다... 그 해법이 마이너리티 디자인이었다.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수혜자는 누구죠?
“누군가의 약점 덕분에 사회 구성원 전체가 수혜를 누릴 수 있어요. 구부러진 빨대는 누워서 생활하는 환자를 위해 발명됐지만 누구나 편리하게 쓰고 있죠. 소수자를 기점으로 보면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 장애가 있는 내 아이와 ‘운동치’라는 내 약점이 겹치면서, ‘혹시 잘못은 운동이 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는 부분에서 웃으며 무릎을 쳤어요.
“사회복지를 공부해보니 두 가지 모델이 있어요.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 뇌성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사람에게 ‘곤란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으니 재활해서 건강한 상태로 만듭시다’가 의료적 모델이고, ‘곤란의 원인은 사회에 있으니 문턱을 없애고 엘리베이터를 만듭시다’가 사회적 모델입니다.
그렇다면 운동을 못하는 건 제 탓이 아니라, 운동 경기의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저를 위해 제 능력을 쓰기로 했어요. 운동을 못하는 제 아이와 제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만들자. 그래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 버블 축구예요. 거대한 튜브를 장착한 선수들이 축구를 한다면? 해보니 서로 부딪힐 때마다 튕겨 나가고, 스릴과 폭소가 쏟아졌어요.”
-어쩌면 나를 위해 일할 때 가장 쓸모 있고 아름다운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의 교육에서는 학생이 무언가를 못 할 때 “네게 책임이 있다” “노력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도 체육을 정말 못해서 선생님이 “더 달려야 해”라며 연습을 시켰지만, 전혀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입니다. 물고기가 강에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면, 물고기뿐 아니라 물살이 거센 강에도 책임이 있는 거죠. 유루스포츠라는 새로운 강이 생겨나자 저와 아들 같은 약한 물고기들도 술술 헤엄칠 수 있게 되었어요. 물고기가 아니라 강을 바꾸면 모든 사람이 ‘물 만난 물고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아니라 강을 바꿔야 한다는 말은 대담하고 힘이 있었다.
-약자도 즐길 수 있으려면 스포츠에 어떤 설계가 필요한가요?
“핸디캡을 공유해야 해요. 가령 버블 축구는 몸에 대형 튜브를 끼고 해요.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공통의 ‘핸디캡’을 갖고 있으니 다 함께 웃고 즐기게 돼요. 그래서 저는 더 다양한 핸디캡을 생각했죠. 핸드볼을 하는 데 공이 미끌미끌하면? 비누를 뜻하는 ‘핸드 소프’와 ‘핸드볼’을 합쳐서 핸드소프볼이 탄생했어요.
또 어느 날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집에서는 기어 다니며 생활한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 순간 아이디어를 내서 애벌레 옷을 입고 기면서 하는 ‘애벌레 럭비’를 만들었죠. 경기해보니 비장애인보다 하반신 마비자가 훨씬 빠르고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줬어요.
중요한 건 다들 애벌레로 변신해서 맘껏 웃음과 땀에 흠뻑 젖었다는 거죠. 서로의 핸디캡과 실수에 한없이너그러워졌어요. 공에 충격 감지기가 달려 ‘응애응애’ 소리를 내는 아기 농구도 있어요. 이 경기는 공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아기 다루듯 움직여야 해요. 속도를 못 내니 모두가 서투른 사람이 되고, 모성이 있는 사람이 유리해요.”
-모두를 서툴게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출발선을 긋기 위해서예요. 그러면 누구나 긴장하지 않고 자기만의 경주를 할 수 있어요. 주류 세계 승리의 룰을 무효화하면 스포츠는 즐거운 카오스가 됩니다. 기존의 스포츠 룰이 강하거나 빠르거나 높은 사람이 피라미드 위쪽에 있었다면, 잘 기거나 모성이 있는 사람에게도 기회가 생기는 거죠.
유루스포츠는 운동 약자를 우대하지 않아요. 다만 이제까지 최강자만 살아남는 방식을 바꿨어요. 승리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도록. 그래서 상어만 살기 좋은 바다가 아니라 새우도 문어도 살만하도록.”
시합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기면 기쁘다. 져도 즐겁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웃다 보면, 점수도 실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사와다 도모히로는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 모든 일을 좀 더 느슨하게 만든 것 뿐이라고 했다.
-주류 질서 안에 소수자를 세우는 것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의족 패션모델과 할아버지 아이돌 그룹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저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활용되지 않은 감춰진 매력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각자의 내면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신대륙’이 있다고요. 의족을 한 여성에게는 패션이라는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신대륙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들에게는 그 독특한 저음을 살려서 EDM 같은 음악과 접목할 수 있는 신대륙이 있었죠.
‘상대방에게 반드시 신대륙이 있다.’
이런 집념이 ‘절단 비너스 쇼’나 할아버지 아이돌 그룹 같은 기획을 낳았습니다.”
‘발견되지 않은 신대륙’을 찾기 위해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신체 공유 로봇’ 닌닌’도 그런 인식으로 만들어졌다.
-신체 공유 로봇 ‘닌닌’은 가장 인간적인 ‘휴머노이드’의 모델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장애인들이 서로를 돕는다는 호혜적 발상을 했나요?
“시각장애인 지인이 신호등 앞에서 늘 불안에 떤다고 해서 놀랐어요. 음성 안내기도 비가 오면 들리지 않는다고요. 가까운 사람이 곤란을 겪는다고 하면, 해결책을 찾아나서죠.
시각장애인의 어깨에 앉은 작은 로봇 ‘닌닌’이 “빨간 불이야” “택시 오니까 손 흔들어” 같은 정보를 알려줍니다. 안내자는 AI가 아닙니다. 누워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모니터를 보고 말해주는 거죠.
‘보디 셰어링 시스템’으로 시각장애인은 ‘닌닌’의 안내를 받으며 홀로 거리를 걸을 수 있고, 신체장애인은 외출한 듯한 경험을 합니다. 그 덕에 닌닌을 사용해본 시각장애인들은 “헤어지려니 쓸쓸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 기뻤다”는 감상을 들려줍니다. 앞으로는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닌닌’ 속에 들어가 손주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거예요.”
‘닌닌’은 곧 개인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할 거라고 했다. 아들의 장애 이후 ‘모든 약점은 이 사회의 가능성’이라는 사와다 도모히로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바야흐로 약점의 우주가 열렸다. 주류 세계에 균열이 생길수록, 세상은 더 친절해지고 다양해지고 재밌어졌다.
-약점이 사회적 자원이라면 주위에 다양한 소수자 친구가 있을수록 경쟁력도 커지겠군요?
“그렇죠. 누군가의 약점과 누군가의 강점이 손을 잡을 때 다양성의 불꽃이 일어납니다. 제가 눈이 보이지 않는 아들을 두었다는 약점과 카피를 쓴다는 강점을 조합한 것처럼.
제 지인 중 일본에서 성장한 영국인으로, 휠체어를 타는 여성이 있어요. 소수자 덩어리 같은 사람인데 자신을 ‘1인 UN’이라 부르면서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그녀의 독자적이고 포용적인 시선이 기업의 차별화 경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죠.
주류에 올라타지 않았기에, 소수자는 우리 사회의 핵심 잠재력입니다. 불편을 감지하는 사회적 시력이 탁월하죠. 그들이 “이건 위험해요” “이건 이렇게 고치면 더 좋아요” 개선점을 알려주고 우리가 잘 받아들일수록 사회는 더 다정해지고 안전해져요.”
-핸디캡이 있는 소수자를 너무 포커스하면 시장 자체가 작아지진 않을까요?
“그 반대예요.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의 소수자입니다. 모든 개인 안에는 다수성과 소수성의 양자가 공존하고 있어요. 제가 체육을 가장 싫어하는 ‘운동치’였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운동 약자다’라고 소리 내 말하는 순간, 이 세계는 변하기 시작했어요.
통계를 보니 일본 1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시장이 놓치고 있던 ‘구멍’이 있었던 거죠. 저처럼 약점을 노출하면 소수자를 중심으로 계속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져요. 승부의 과한 긴장을 없앤 대체 스포츠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내 안의 ‘소수성’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겠어요. 당신은 내면의 ‘소수자’ 기질을 얼마나 자주 감각하나요?
“사실 저는 태어난 순간부터 저는 외부자(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일 때문에 오랫동안 영국, 프랑스 등 해외를 전전했거든요. 일본에서는 외국인, 해외에서는 일본인… 모국과 타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발이 땅에서 떨어져 둥실둥실 떠 있는 것처럼 괴로웠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서 일어난 굴절이었죠.
글을 쓰면서 조금씩 깨달았어요. ‘이 세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리 불편한 세계라도 내 말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좋아하는 세계로.’ 광고 카피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요.”
-아웃사이더의 힘을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20대에 미국과 일본 느낌을 섞은 인디 밴드 보컬을 했는데, 어메이징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솔직히 제 노래나 기타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일본과 미국 사이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독특한 가치를 주었던 거죠. 그 뒤 기업과 일을 할 때도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매사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뒤로 미루지 말자’는 노동 구호도 산뜻했어요. 어떻게 나왔지요?
“사회에 뛰어들어보니 업계의 모든 크리에이터가 지쳐있더군요. 우수한 사람을 옆에서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한정된 시간을 남을 위해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닌가? 어쩌다 보니 다들 자본주의라는 강자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는 거죠.
자기 능력을 스스로의 인생과 소중한 이들에게 더 직접 연결하면 좋을 텐데... 그래서 저는 과감히 멈추고 나 자신을 의뢰인 삼아 기획서를 써보라고 해요.”
-‘나라는 의뢰인’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까요? 클라이언트, 소비자, 상사에게 맞춰온 삶이 길수록 ‘나를 향한 촉수’는 다 퇴화된 것 같습니다만.
“나다운 게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 구간별로 ‘희로애락 도표’를 만들어서 들여다보세요. 저는 ‘왜 내 아이에게 장애가?”라는 슬픔과 “왜 나는 스포츠에서 배제되어야 하지?’라는 분노가 강렬했어요.
내 강점과 내 약점을 모두 포함해 자신과 마주하면 ‘나라는 의뢰인’이 태어납니다. ‘이 사람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획서를 써보세요. 나를 위한 기획서를 쓰는 것은 나라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무슨 재료가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20대 내내 저는 출구 없는 회전문에 들어간 듯이 일했습니다. 미움받을 각오로 회전문을 뛰쳐나가 보니 드넓은 경치가 있었어요. 나를 포함해서 못 하는 게 많아서 매력적인 사람들, 지금껏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마주쳤어요. 경이로운 약점의 신세계였죠.”
-정말 내가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일해도 괜찮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기인가요?
“용기보다 정직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면 안 돼요. 저 또한 일하는 방식을 새롭게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일해야 한다’는 기존의 납품 노동 개념으로 되돌아갈 뻔한 순간이 있었어요. 상식대로 사는 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자문자답하면서 찾아낸 제 내면의 답은 같았어요.
내가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일해도 괜찮다.
사람은 어릴 적부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배우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많이 해요. 여러분들은 부디 자신의 마음에 정직해지면 좋겠어요.”
-모든 과정에서 유머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유루스포츠는 신흥 세력 같은 존재라 기존의 스포츠 업계 관계자들이 경계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농구공이 갓난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농구’나 라켓에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블랙홀 탁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픽 웃어버립니다.
그 ‘픽’하는 웃음소리는 마음속의 얼음이 녹는 소리예요.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죠.
저희는 기존 스포츠의 반대편이 아닙니다. 대안이나 대체재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자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상대방과의 사이에 불꽃이 아니라 웃음을 일으키는 게 중요합니다. 유머의 역할이 크죠.”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죠?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생태계가 어떻게 성장해갈지 몰라야 해요. 육아와 마찬가지죠. 아이의 성장을 계획할 수 있고 계획대로 자란다면, 부모는 육아에서 손을 뗄지도 몰라요. 내가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아이가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는 육아에 대한 동기를 잃지 않을 수 있죠.”
-살면서 누구에게 가장 큰 영향 혹은 영감을 받았나요?
“아들입니다. 그만큼 저를 극적으로 (거의 하룻밤 만에) 변화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아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아. 그 뿐!’이라는 당신의 카피는 진실한가요?
“아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 외에는 평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숙제하고, 놀고, 씻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지요.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장애’라는 한 가지 면만 지나치게 클로즈업하곤 합니다. ‘장애가 있지만, 장애가 있을 뿐’이라는 다면성을 봐주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는 당시 ‘시각장애인 축구’ 포스터 카피에서 ‘그 뿐’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청각장애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고요하고 좋은 세상이라고요. 눈을 가리고 시각장애인 축구를 했을 때, 당신 몸에 비친 세상은 실제로 어땠나요?
“시야를 ‘OFF’로 전환한 순간, 부드러운 담요로 몸을 감싼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각을 빼앗기는 무서운 경험이 아니라 시각이 닫히는 안도감이 들었죠. 우리는 수많은 자극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업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미디어는 시선을 끌기 위해 요란한 시각 자극으로 사람들을 에워쌉니다. 그런 시각적 포위 상태에서 풀려나 ‘OFF’가 상태가 되니, 해방감이 느껴지고 자연스럽게 내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폐를 끼쳐줘서 고마워”는 이 책에서 제가 발견한 가장 보석 같은 말입니다. 일본 사회는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회로 알고 있었는데, 당신이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아시다시피 일본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사회가 점점 전환되고 있죠. 사람들이 일찍부터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타인의 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관을 들이면, 나이를 먹었을 때 주위와 원활한 ‘민폐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사회관계 자본을 이루는 화폐의 단위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의 화폐 대신 관계의 자원인 ‘민폐’가 돌고 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훨씬 더 귀엽고 뻔뻔해질 수 있을 텐데.
-한국에서 벌어지는 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보탤 의견이 있으신지요?
“일본에서는 1970년대 이후 장애 당사자들이 이동권을 계속 주장해왔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이 혼자 탈 수 있는 버스 등이 늘어났어요. 하지만 지금은 노동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인 전철역이 많아졌죠. 역무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완벽한 사회는 어떤 국가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당사자가 ‘계속’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해요.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멀리 돌아가는 길 같겠지만, 그보다 짧은 길을 저는 모릅니다.”
-’일하다’는 ‘남을 돕기 위해 내가 잘하는 것을 한다’ 혹은 ‘더 잘하기 위해 수련한다’로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일하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군요.
“저는 모든 일이 ‘케어(care, 돌봄)’라고 생각합니다. ‘케어’는 일본어로 옮기기 어려운 말인데, 저는 ‘마음을 쓰다’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무언가 힘든 일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 구체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미는 것. 그렇게 제가 지닌 것을 상대방에게 내주고, 반대로 상대가 지닌 것을 받기도 합니다.
‘일하다’란 그렇게 내어주고 받으며 서로의 인생을 포개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도움과 민폐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인생을 포개어 가는 것, 그것이 일하는 것이라는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가 곧 남을 돕는 결과로 이어지는 마법의 순간들. 그 마법의 스위치가 바로 각자의 ‘약점’들이다.
인생 희로애락 중 내가 느꼈던 ‘슬픔’과 ‘분노’의 장면을 외면하지 않고, 정중하게 해결해주려고 애쓰는 것. 그게 일이라면, 우리는 평생 숨을 헐떡이며 살다 졸도하는 자본주의의 페이스메이커가 아니라, 가슴 뛰는 자기 인생의 해결사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