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재난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여러분처럼 나도 따끈한 목욕물, 여름날의 수영장 같은 안락한 일상에 머물길 원했지만, 삶은 늘 그렇듯 굽이치는 파도와 비바람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가 쓴 ‘최선의 고통’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그 최전선의 고난에 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는 책이다. 내가 못나거나 불운해서가 아니라, 더 진실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추구하는 인생 여정에서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마조히스트의 심리학자는 구약의 욥이 현대의 고난 전문가로 환생한 것 같은 치밀하고도 극적인 리포트로 ‘인생의 베이스는 고통이다’라는 사실을 설파한다. 예컨대 그가 ‘행복한 삶이라는 환상’을 깨는 방식은 매우 다이내믹하다.
우리의 뇌는 쾌락만큼이나 고통을 환대하며, 우리의 본성은 안락한 감각만큼 의미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는 것. ‘고난의 기쁨’조차 인지 오류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의 레시피가 알맞게 조절되었을 때 따라오는 우리 육체의 정상 반응이라는 것.
그가 집중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인간은 왜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드는가’.
‘삶에 쾌락을 더하고 몰입을 선사하며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선량한 고통이란 있는가’.
‘우리는 정녕 고난을 겪어도 파괴되지 않는가’.
고난과 인간의 애착 관계를 치열하게 통찰한 폴 블룸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전작 ‘공감의 배신’으로도 국내에 잘 알려진 폴 블룸은 언어심리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현재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신작 ‘최선의 고통’에서 그는 피와 시체에 탐닉하는 잔혹성 쾌락부터 운동 후에 마시는 맥주까지 통증과 행복의 역설적 결합을 총망라한 후, ‘인생은 가치 있는 만큼 고통스럽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고난이 뭔가요?
“평소에 피하고 싶은 모든 경험을 저는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불평합니다. 왜 그런 고난에 흥미를 느꼈나요?
“쾌락의 욕구는 뻔합니다. 음식과 섹스를 즐기고 안전하고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분을 누리고 싶은 상태죠. 반면 고난은 다채롭고 흥미로워요. 매운 음식을 먹거나 가학 피학적 성적 취향에 빠지거나, 끔찍한 공포 영화를 보러 가는 것,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이런 불편한 감각을 저는 ‘고난의 쾌락(The Pleasures of Suffering)’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동료 심리학자와 철학자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은 쾌락을 목표로 하지 않는 고생도 기꺼이 선택한다는 것에 주목했어요. 창업, 등산, 전쟁 참전, 육아 등등. 이 경험이 즐거움보다 위험과 모험, 고생을 더 요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과정을 충실한 인생을 보내는 귀한 재료로 선택합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고난을 수집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은 착각했어요. 인간이 본래 안락만 좇는 타고난 쾌락주의자라고요. 아닙니다. 의외로 인간은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마음을 흔드는 더 깊은 목표지에 기울면, 자발적으로 크고 작은 고통에 뛰어들고 감내합니다. 우리 뇌는 고통과 쾌락의 최적점인 ‘스윗 스팟’을 찾으려고 하죠.”
-고난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사실 고난의 쾌락은 도처에 있어요. 인간은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모험을 시도합니다. 결정적으로 인생이 잘 흘러갈 때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취약한지 잊고 살죠. 그러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면 깨지고 재조립되면서 세계가 확장됩니다.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첫째, 특정 유형의 선택적 고난은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잘 살아낸 삶은 쾌락적 삶보다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하여 고난은 고귀한 목적을 이루는 한편 충만한 삶을 사는 데 중요합니다.”
-한국의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긴 세월을 살아보니 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동의하는지요?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정말 아름다운 말이군요!”
-책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중요하게 등장하더군요. 빅터 프랭클에게서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빅터 프랭클의 인생 전반이 다 제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프랭클은 1930년대 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우울증과 자살을 연구하던 중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수용소에서도 동료 수감자를 관찰하며 연구를 계속 했어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과 모든 의욕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는 의미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살아남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더 넓은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랭클 자신도 부모와 아내를 수용소에서 다 잃고도, 나와서 삶을 재건했고 재혼해서 손주까지 봤어요.
나중에 프랭클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의역해서 적었습니다. 이 말이 제 연구 전반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문입니다만, 불운을 감지해서 잘 피해온 사람과 고난을 의연하게 헤쳐 온 사람 중 누구에게 더 많이 배울 수 있나요?
“제 연구의 범주를 벗어났네요. 제 관심사는 우리가 자처한 고난입니다. 덧붙이자면, 고난을 겪은 후 이렇다 할 전리품이 없더라도 그 과정을 지나온 인내 그 자체는 명예가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기지요.”
-과감하게 고난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원치 않지만 고난을 자주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입니다. 겁이 많지만 위험에 뛰어드는 모순적 성격이라, 평안을 원해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죠. 그것은 기질과 관련이 있나요? 아니면 고난에서 교훈을 얻는 능력의 부재인가요?
“재밌는 질문이네요! 하지만 조심스럽습니다. 당신의 성격이나 기질에 대해 뭐라고 말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하니까요.”
-당신은 고난과 관련해서 어떤 기질입니까?
“지적인 면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색다른 문제를 찾아보기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으면 조급해지죠.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아주 안정적인 편입니다.”
-영화 ‘빅쇼트’에서 주인공을 표현하는 대사처럼 ‘불행할 때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를 종종 만납니까?
“심리학자로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렵고 도전적인 삶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죠.”
-적절한 도전이 쾌와 불쾌의 균형을 맞추기 때문인가요?
“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정한 만족은 쾌락과 역경 사이에 있는 적절한 균형점에서 옵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이 더없이 맛있고, 고생한 후에 담근 목욕물에서 삶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던가요.”
더불어 그는 인간은 고난을 감수해서 미래에 소비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여행 선택지 실험을 해보면 사람들은 환승 공항에서 기다리며 쇼핑하는 것보다 추운 날씨에 시내 구경하는 것을 더 많이 선택해요. 플로리다에 있는 체인 호텔보다 퀘벡에 있는 아이스 호텔을 더 많이 원합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경험’보다 ‘힘들지만 추억에 남는 경험’이 더 우세하다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뇌가 쾌락만큼이나 의미를 추구한다는 거죠.”
-제 주위를 돌아보면 베이비부머 등 윗세대들은 고난의 가치를 주장하는 반면, MZ세대들은 워라밸을 비롯해서 더 많은 안락을 추구하더군요. 세대별로 고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만.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사람들이 고난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사회와 세대 간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제 의견은 있지만, 왜 어떤 사람은 고난의 가치를 알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한 정확한 이론은 없습니다.”
-추측해보면 직선적인 성장사회를 살면서 고생에 대한 장기적 피드백을 받은 베이비부머와는 달리, MZ세대는 변동성이 큰 저성장 사회를 살아가면서 고난의 주기도 단기 프로젝트에 맞춰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신의 말한 ‘선택적 고난’은 어쩌면 우리가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더 필요하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질문을 살짝 비틀어보지요. 지금 시대는 과거보다 훨씬 진보했나요? 사람들은 더 행복해졌나요? 스티븐 핑커가 ‘지금 다시 계몽’에서 풍부한 데이터로 언급한 대로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인간 개개인이 괜찮은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앞으로는 기후 변화 때문에 더 어려워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강합니다.
생활 여건의 개선은 분명 행복에 기여해요. 그러나 미국은 부유한 나라인데도 2000년 이후 자살률이 30% 급증했습니다. ‘두 번째 산’을 쓴 데이비드 브룩스는 미국이 안고 있는 핵심 문제를 ‘의미의 위기’로 봅니다. 현대 세계가 과거에 비해 뚜렷한 목적이 없어서 불행한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저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고생을 수반하는)가 불행에 대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저는 분쟁과 가난이 있는 아프리카 등 극빈국의 국민이 행복 지수는 낮지만,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의미 지수가 높다는 데이터가 흥미롭더군요. 여기서 통찰의 포인트는 뭐죠?
“고통과 의미 사이의 관계가 강력하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자기 삶이 중요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았어요. 빈곤은 단기적 행복을 앗아가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게 됩니다. 반면 안락한 환경의 국민들은 ‘목적의식 결여’라는 우울함에 처할 수 있지요.”
-미국에서 부흥한 긍정심리학의 부작용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인간의 욕구를 쾌락으로 한정한다는 것 바로 그 자체죠. 저는 인간은 여러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성적 만족, 배고픔의 충족 등의 쾌락적 욕구와 산에 오르고 공동체에 봉사하고 부모가 되는 것 등의 의미 지향적인 욕구. 두 가지 다 우리의 욕구입니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쾌락을 원해요. 나중에 먹을 두 개의 마시멜로보다 지금 먹을 수 있는 한 개의 마시멜로를 원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선택지를 준다면 인간은 지금 당장이나 먼 훗날이 아닌, 약간 미룬 후를 택합니다. 지연 후 맛보는 보상의 쾌감이 더 극적이니까요.
요는 인간은 더 다양한 동기로 움직인다는 거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때도 종종 끔찍한 세상을 찾아 나섭니다. 타인이 겪는 고통에서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직접 경험하는 고통을 즐기기도 해요. 매우 복합적인 존재예요. 쾌락만을 추구했다면 ‘매트릭스’에서 살았겠지요.”
-직접 연구해 보니, 사람들은 왜 굳이 힘들게 산을 오르고 아이를 낳아 기르던가요?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갖는 애착은 삶의 질이 하락하는 상황을 압도합니다. 현실은 ‘일하는 것보다 육아가 더 피로하다’고 느껴도, 뇌의 기억은 아이로 인해 얻은 기쁨을 더 강렬하게 재생하기 때문이죠.
조사 결과 자녀를 돌보는 데 더 오랜 시간을 들이는 사람일수록, 자기 삶이 더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더 의미 있다고 답했어요. 작가인 제이다 스미스는 아이를 키우는 일을 ‘공포와 고통 그리고 기쁨의 기묘한 혼합’이라고 묘사했죠.
등반에서도 감각적 쾌락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어요. 산악 등반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고통의 연속이죠. 가혹한 추위, 탈진, 고통, 배고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다른 요소는 자기 능력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욕구가 압도적으로 커져서 귀환을 거부해 사고가 나기도 하죠. 인간은 끝내 어떤 산이든 오르려는 욕구를 지닌 존재였어요.”
-하지만 노력은 역시나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에너지가 한정되었기 때문이겠지요?
“힘들다는 느낌은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더 나은 일이 있다는 신호예요. 노력에 따른 피로는 다른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대한 신경 반응이지요. 결과적으로 원하는 만큼 오래 정신적 작용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한한 자원이 소진되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활동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진화가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노력을 비교적 오래 쉽게 유지할 방법이 있을까요?
“과제를 놀이나 게임으로 볼 때 노력이 즐거워집니다. 톰 소여가 친구들에게 담장을 칠하는 노동을 놀이로 만든 것처럼. 사실 쾌락의 핵심에는 고생이 있습니다. 밀키트나 조립 가구처럼 사람들은 자기 노동이 가미된 경험을 선호하죠. 노력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 되는 절정은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라고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어요.
여기서 ‘몰입’ 개념이 나옵니다. 힘이 드는 데도 힘든 줄 모르고 집중하는 ‘몰입’이야말로 쾌락과 노력의 합일이 일어나는 상황인데요. 칙센트 미하이는 ‘몰입’이라는 책에서 ‘자기 목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그 자체로 즐기며 외적 목표를 좇지 않아요. 호기심, 끈기 등 ‘낮은 자기중심성’이 특징이죠.
일반인들에게 몰입 경험은 대개 즉각적인 피드백과 명확한 목표가 주어졌을 때 나옵니다. 너무 쉬운 것(지루해짐) 너무 어려운 것(스트레스와 불안) 사이에 딱 적절한 정도의 도전이 몰입을 일으킬 수 있어요.”
-때때로 성격 급한 부모가 실패와 역경을 미리 제거해줘서, 아이가 정상적인 인내를 배우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도 됩니다.
“어떤 우려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보살핌을 잘 받고 살았다고 해도 성장 그 자체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삶에서 고난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간섭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다면, 너무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고난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원죄로 에덴에서 추방돼 출산과 노동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 ‘예수의 고난’을 가장 고귀한 희생으로 보지요. 겉으로 보면 육체의 고난이지만, 핵심은 ‘단절’이라는 심리적 고난입니다. 고난과 종교의 밀접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종교가 하는 많은 일 중 하나가 원치 않은 고난, 즉 우리가 청하지도 않은 끔찍한 일을 겪는 데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그러나 저는 종교적 서사를 믿지는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죽음이나 슬픔 등에서 뇌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합니다. 우주의 물리법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과도한 의미 찾기를 중단하라고요.
“우주의 기원 이론은 몰라도 되지만,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하죠. 존 로버츠 대법관은 2017년 졸업 연설에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고난조차 의미가 있다는 근거로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이 외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친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가끔 불운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삶에서 운의 역할을 인식하고 여러분의 성공이 전적으로 마땅한 것이 아니며, 타인의 실패가 전적으로 마땅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테니까요.”
로버츠 대법관의 말대로 고난은 객관적 관점을 부여하고 공감 능력을 촉진하죠. 건강한 심리적 기능을 얻는 핵심 수단은 적절한 고난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치 있는 만큼 고통스럽다’라는 제이다 스미스의 인용문을 좋아해요. ‘고통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거든요.”
-하지만 저는 책에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엽기적 관음증 또한 뇌의 쾌락의 일부라는 사실을 읽고 나니 혼란스럽더군요.
“재난 현장에 타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 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만큼, 구경하고자 하는 욕구도 신경학적으로 인간 본성의 일부예요. 우리가 그런 양극의 모순을 지닌 존재라는 걸 알아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타인이 고통받는 뉴스, 그리고 그 고난을 극복한 뉴스... 오늘날 잘 팔리는 뉴스가 두 가지 타입인 건 이유가 있군요.
“맞아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원해서 겪는 고통과 원치 않는 고통 둘 다에 끌립니다. 도로에 끔찍한 교통사고, 전쟁 영화와 공포 영화… 혐오성 픽션은 안전한 방식으로 위험하고 힘든 상황을 탐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악인이 벌 받는 모습을 보는 단죄의 쾌락도 커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모든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가요?
“우리 모두는 불완전합니다. 때론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출석만 하면 A 학점을 받는 수업처럼. 하지만 목적이 분명할 때 인생에 활력과 동력이 생깁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다가 기후활동가가 된 툰베리는 트윗에서 이렇게 썼어요.
‘등교 거부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활기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지금은 그 모든 게 사라졌다…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활동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아를 확장하죠.”
-우리가 달콤한 고통을 인생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수영장에서 나날을 보내면 우리 삶은 만족도가 낮은 경험적 행복으로 가득할 거예요. 쇼핑, 수면, 탐식… 그런 삶은 권태로워질 겁니다. 의미 있는 활동에는 성찰, 봉사, 자기만의 프로젝트 등이 있죠.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의미 있는 활동에 쾌락을 더하자 태도가 느긋해졌어요. 충분히 즐겁다는 학생들에게 의미를 더하자 삶이 고양됐죠.
행복과 의미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어요. 행복한 사람은 내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할 가능성이 더 높고, 의미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할 가능성이 더 높아요.”
-행복만 좇는 것은 큰 문제가 되나요?
“역설적이지만 행복해지려고 너무 노력하면 행복을 망칠 수 있어요. 키스를 얼마나 잘하는지를 생각하느라 키스를 잘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일례로 행복 추구 경향 조사에서 ‘행복감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항목에 체크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감과 외로움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행복의 성취 기준을 비현실적으로 높이 정해서 실패하는지도 모르죠. 혹은 칭찬과 보상에 매달리는 등 잘못된 방법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행복을 추구하면 지루해진다는 문제가 있어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인공적으로 쾌락을 극대화하려는 체제 수호자에게 저항자가 하는 말은 인간 본성을 함축하고 있어요. ‘저는 안락함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시를, 진정한 위험을, 자유를, 선을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고난을 찾아 나서야 합니까?
“아니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충분한 고난이 당신과 사랑하는 이를 덮칠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더 많은 고난을 찾아 나설 이유는 없어요.”
-마지막으로 고난과 사이좋게 잘 지내기 위한 조언을 부탁합니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행복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팩트는 우리가 환희와 쾌락 속에 머물지 않고 고통을 통해 더 개선되게 하는 것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거죠. 다소 암울한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 담담한 희망의 여정이 시작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