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것은 본래 창조적인 것이다. 참치 손질, 옷의 수선, 가봉, 옷을 자동차에 싣고 다니는 영업, 심지어 한 벌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조차 창조적인 일이다.
창조의 씨앗은 실패하는 것, 잘 못 하는 것,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싹을 틔울 수 있다. 나는 그랬다.”-‘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중에서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격조 높은 미의식을 보여주는 일본 브랜드가 있다. 미나 페르호넨. 밝고 거침없는 핀란드 마리메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텍스타일 리빙 기업의 창업자 미나가와 아키라가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라는 책을 냈다.
평소 위트 있고 낙관적이고 자연의 리듬이 살아있는 미나 페르호넨의 제품을 보면서 개성 넘치는 아티스트를 떠올렸으나, 예상과는 180도로 달랐다. 각국의 수많은 디자이너를 인터뷰했지만, ‘반짝이는 재능이 아닌 끈기와 반복’만으로 이토록 철학적인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낸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일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단언할 수 없어도 일은 시작하겠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좋은 기억이 된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할 일이 보인다.
그것이 기쁨일 때 사물에서 빛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가 일에 관해 써 내려간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헝클어진 책상과 서랍이 정리되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재능의 배신으로 멘탈이 널을 뛰는 시대에, 도리어 재능이 없어 재미를 붙이고 하나하나 일의 원리를 배워가는 미나가와의 모습은 경이롭다.
어시장 아르바이트와 유럽 여행으로 옷의 본질을 구술처럼 꿰어버린 일터의 현자, 미나가와 아키라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미나 페르호넨’라는 이름은 어떤 뜻인가요?
“미나(mina)는 핀란드어로 ‘나’라는 뜻입니다. 페르호넨은 나비예요. 만드는 사람도 입는 사람도 ‘나’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100년 가는 브랜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196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핀란드와 스웨덴을 여행하다 영감을 받아 1995년 패션 브랜드 ‘미나 페르호넨’ 론칭했다. 이후 독자적인 텍스타일과 옷, 소품, 리빙용품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선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어린 시절에 저는 유치원 마당에서 혼자 찰흙 구슬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구슬을 굴릴 때 느껴지는 감촉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만들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갔어요.
구슬은 반복해서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까맣게 윤이 났죠. 요령을 깨닫고 돌아보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조용한 시간이 좋았어요. 잡념 없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했어요. 그 시절의 어른들은 다 너그러웠습니다.”
-찰흙 구슬 만들기 말고 또 뭘 좋아했나요?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서 농구공을 튕겨 골대 밑까지 내달려 슛을 넣는 것. 그리고 달리기를 좋아했어요. 팔과 다리, 보폭 등 자세를 수정해가면서 궁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달리는 것 자체도 즐거웠지만, 기록에 따라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자극이 됐어요.
잠들기 전에는 항상 눈을 감고 달리기 시합을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어떻게 좋은 위치를 선점할지, 어느 타이밍에 스퍼트를 낼지… 기록이 월등하진 않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몰두했어요. 한계를 극복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육상의 감각은 이후 그가 하는 모든 일의 기본이 되었다. 그에게 미적 분위기를 심어준 어른은 조부모였다. 조부모는 일본의 고도성장기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수입가구상을 운영했다.
“이건 버팔로 가죽이란다”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은 낡아도 다시 깎아내면 새로워질 수 있어.”
외할머니의 밝은 목소리로 오래된 것들의 가치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그 일이 좋아서 하는 어른들에게선 자부심 넘치는 단호함이 풍겨 나왔다.
-패션에는 언제 매력을 느꼈습니까?
“열여덟 살 때 파리 체류 중에 파리 컬렉션의 백스테이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 경험이 계기가 됐어요. 이후에 일본에 돌아와서 봉제 학원에 갔어요. 정확하고 거침없이 잘려가는 천의 밝은 단면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재능을 발견했나요?
“아니요. 저는 재단 일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서툰 일을 반복하면서 실력이 쌓이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요. 패션은 저라는 사람과 너무 동떨어진 일이었고, 그래서 이 일을 하는 미래의 제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어요.”
재능이 아니라 적성을 찾아가는 끈기 있는 과정, 잘하는 일이 아니라 잘 맞는 일을 몸에 익히며 조금씩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방식. 일종의 수련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그랬다.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잘해서가 아니라 잘 하고 싶어서 계속하게 된다. 정체되거나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도, 하다 보면 완성이 되어 있고 운 좋게도 조금씩 늘기도 한다.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미나가와 아키라의 책에는 ‘어떻게 적성을 찾고 어떻게 계속해서 브랜드가 되고, 어떤 사람과 일할 것인가’에 대한 어른의 서사가 빼곡하다.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실용적이고 단단한 공력이 느껴진다.
유독 많이 발견한 단어는 흥미와 기쁨이었다. 남의 힘을 빌리기 위해선 상대가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거나(휴일에 체육관에 들어 가기 위해 수위아저씨에게 맥주를 선물하기도 했다), 흥미를 느끼면 단박에 쉽게 그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10대 때부터 죽.
한 분야에 정성을 다하는 일본의 장인 문화와 미나가와 아키라가 특유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는 베짱이 어우러져 매우 닮고 싶은 직업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시장에서 참치를 해체할 때나 봉제 공장에서 천을 자를 때, 모피 가게에서 손님의 몸에 줄 자를 대고 치수를 잴 때조차 그의 동작에는 본질을 가르는 동일한 기쁨이 깃들어 있다.
조급하지 않게, 낭비 없게. 기본을 알고 재료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퀄리티를 보증하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라고 단언한다.
-다들 들뜨던 80년대 호황기 시절에, 낮에 봉제공장에 다니며 밤에 전문학교를 다녔습니다. 휩쓸리지 않는 기질이었던가 봅니다.
“당시 문화복장학원의 야간 학비는 비싸지 않아서 봉제공장에서 받는 급여로 충분히 다닐 수 있었어요. 제 자유의사로 선택한 학교였고 그래서 스스로 학비를 내는 게 기뻤어요. 게다가 저는 패션 일에 유능한 편이 아니었어요. 수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낮 시간대의 수업은 따라가지 못했을 겁니다.”
-매사 어떤 느긋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학창 시절 육상부 선생님에게 ‘사람의 성장은 일정하지 않고 개개의 성장을 긴 안목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때의 경험 덕에 일도 사람도 장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달린다는 것은 타인과의 승부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자 스스로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어요. 뛰면서 정신이 신체를 만들고 신체가 정신을 지탱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됐어요.”
-부모님은 어땠나요?
“아버지는 제 길이 정해질 때까지 간섭하지 않았어요. 외롭기도 했지만 자유로움이 더 컸어요. 부모의 기대는 때때로 자녀의 길을 제한하니까요. 저는 제 갈 길을 처음부터 정한 것도 아니어서, 경험을 통해 천천히 찾아갔어요. 결과적으로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미나 페르호넨 브랜드 론칭 후 거의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그는 생계를 위해 어시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참치를 정형하는 일을 했다.
-어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것과 봉제 공장에서 천을 재단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같았다고요. 그걸 몸의 감각만으로 깨우쳤다는 거지요?
“네. 참치를 정형하는 것과 천을 재단하는 일은 정말 비슷합니다. 칼과 가위를 써서 정확하게 재료를 손질하는 일이니까요. 재료에 닿기만 해도 잘려나갈 정도로 도구를 갈아놓아야 했어요. 몸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피부로 감각을 느끼면 머리로 응용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어요. 손과 팔의 힘을 주는 방법, 잘라낼 포인트... 몸의 움직임 속에서 일하는 타이밍이나 속도가 조화를 이룰 때 합리성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태어납니다.”
-모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또 무엇을 배웠죠?
“체형과 옷의 관계라고나 할까요. 사람의 골격은 다 달라서 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손님들의 다양한 체형을 보면서 배웠어요.”
-전혀 모르는 일에 맞닥뜨릴 때는 어떻게 돌파합니까?
“가령 초기에 저는 영업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미나의 옷을 작은 차에 싣고 아무 곳에나 들어갔어요. 정해진 목적지도 없었죠. 시내를 빙빙 돌면서 주변을 살피다가 미나의 옷을 취급해줄 것 같은 가게를 발견하면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저희 옷 한번 봐주실래요?”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우리의 위치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죠. 센다이에서 실패하면 그다음에는 모리오카로. 점점 북쪽으로 향했어요. 나중에는 원피스와 블라우스를 트렁크에 잔뜩 채워 넣고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웨덴 스톡홀름, 벨기에 브뤼셀과 앤트워프를 거쳐 파리까지 다녀왔어요. 그저 부딪혀보는 행동이 상상 이상으로 공부가 됩니다. 몇 벌이라도 옷을 사준 고객들에게도 평생 감사하게 되지요.”
-책을 보면 선생은 여행할 때마다 점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더군요. 신문물도 접하고 배짱도 생기고, 호의도 경험하면서… 일본에 계속 머물렀다면 달랐겠지요?
“답이 안 보일 때 여행이 출구와 기회를 찾아줬어요. 몰랐던 걸 알게 되고, 알고 있던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며,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죠. 불안 속에서 태어나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도 느꼈고, 계획은 변해야 정상이라는 것도 깨달았어요. 하지만 여행을 가지 않고 비슷한 가치관에 둘러싸여 살았어도, 저는 지금과는 또 다른 보람 있는 일을 만났을 겁니다.”
-’우연을 자본화’하는 세렌디피티도 요즘 세상에선 큰 능력입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데이비드라는 청년에게 선뜻 ‘해외 구매 담당’으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놀라웠어요. 어떻게 아무런 의심 없이 우연에 몸을 맡길 수 있나요?
“신뢰는 시간으로만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순간의 느낌으로 오죠. 특이점이 보이면 저는 의심하기 이전에 믿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제안을 해요. “우연한 만남이지만 너는 훌륭한 파트너야. 앞으로 반년간 너를 믿을게”.
생각해보면 제가 파리의 준코 코시노 컬렉션에 일손을 보태게 된 것도 모피 전문점에서 일하게 된 것도 누군가의 우연한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어요. 이젠 내가 손을 내밀 차례죠. 그 일을 지탱해주는 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신뢰 관계였어요.”
자연계가 그렇듯이 회사나 조직도 다양성을 끌어안아야 오래 간다고 했다.
-일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고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전문 기술은 개인의 특성에 맞춰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제 첫 어시스턴트였던 나가에는 ‘그건 내가 못 하는 일이야’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봉제를 못 해서 오히려 계속한 나의 사고회로와 비슷했달까요.
나아가 입바른 소리 대신, “뭐지? 이 사람은?”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에너지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미나를 이끌고 있는 다나카가 그랬어요. 돈보다는 성장을 원했죠.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그만두지 않아요. 브랜드나 회사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회사에는 좀 더 본질적이고 야생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한 건 무슨 뜻인가요?
“때로는 셈을 버려서라도 브랜드를 지키려는 힘이 필요해요. 어려운 일이나 중요한 문제를 맡아서 치고 나갈 기백이 있는 사람이요.”
-미나 페르호넨은 일단 옷을 만들기를 결정하면 직물부터 생산한다고요. 트렌드와 이익을 따지지 않고 이런 진지하고 근본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요?
“미나는 단기적인 대량 생산은 하지 않아요. 길게 보고 재료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기본입니다. 가령 레이스나 벨벳은 옷을 입는 경험을 다채롭게 만들지만, 디자이너가 사용하지 못하면 사라져요. 숫자에만 매달리면 옷을 입는 사람의 기분에 대한 상상력도 메말라갑니다. 그런 소재를 디자인에 도입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해요.”
-재고를 남기지 않으려는 태도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생선처럼 모든 재료에는 생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버려지는 부분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옷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가방을 만든다든지 수예 키트 등으로 재가공을 하고 있어요. 그 수익의 일부는 사회공헌비로 씁니다.”
남기지 않으려는 성향은 어시장에서 아르바이트 경험에서 왔다고 했다. 재료의 특성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봉제나 생선 요리나 마찬가지라고. 심지어 힘든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도 서덜탕에 쓰이는 서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어릴 적 찰흙 구슬 만들기부부터 여행지에서의 아르바이트, 북구에서 보낸 겨울, 초창기 영업 대참사의 경험까지 낭비 없이 배움으로 가져다 쓰는 그 실사구시의 반듯한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정말 낭비가 없으시군요! 그런 자세가 회사의 존재 방식에 영향을 미치나요?
“그럼요. 낭비를 없애기 위한 아이디어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일을 거치면서 깨달은 ‘일머리’의 진리가 있을까요?
“경험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제대로 일하면 다음에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돼요. 나 또한 참치 손질을 열심히 했고 모피 가봉도 한 땀 한 땀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손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정성을 들였죠. 언젠가는 잘하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거품 경제와 저성장 시기를 다 거쳤는데, 일의 태도에서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거품 경제 시기의 흥청망청 분위기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소박한 물건이나 오래된 것을 좋아했지요. 거품이 주는 풍요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거품이 꺼진 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회에 ‘욕심’이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았죠. 그 마음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행복이 지속될지 고민하게 됐고요. 욕심에는 마치 주파수와도 같은 움직임이 있어서, 적성을 잃으면 욕심으로 인해 행복을 잃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구나’라고 느껴요. 보람있게 하나하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맛있는 요리를 직접 해 먹습니다. 이런 행복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일과 생활을 애써 분리하지 않는군요.
“어시장의 스승님께 일과 생활을 분리하지 않는 멋진 태도를 배웠어요. 일은 삶의 소중한 일부이기도 하고, 지난 생을 되돌아보는 잣대가 되기도 해요. 저는 일을 하면서 생기는 어려운 점들은 인생에서 출제된 퀴즈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달릴 수 있는지는 일하는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지요.”
-한국, 일본은 물론 전 세계 모두 지금은 거품경제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를 살고 있어요. 불안이 크면 일도 ‘머니러시’의 부분으로 축소됩니다. 어떻게 일의 기쁨을 회복할까요?
“일하는 것은 원래 다 창조하는 것입니다. 직접 만든 옷을 자동차에 옷을 싣고 한 벌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조차 창조입니다. 청소기를 돌릴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도,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죠.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자발적으로 하는 모든 일에 우리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요.
상상력은 단순노동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힌트를 발견하는 힘입니다. 어찌 보면 저성장 시대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죠. 경제 지상주의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면 교육, 환경, 공생 등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사회를 재설계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옷이란 무엇인가요?
“옷은 인간이 처음으로 머무는 가장 작은 공간입니다. 몸이 바깥 세계에 닿는 최초의 기쁨이죠.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건, 분야에 상관없이 ‘어떤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은지’ 생각하라고 해요. 그러면 매일 작은 깨달음들이 올라올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