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임종 감독 송길원 목사(하이패밀리 대표)는 망자를 대신해서 전한다.
“아니, 왜 꽃을 줬다 뺐나?”
고인의 몸은 없고 영정 사진만 있는 비대면 장례식의 제단에 조문객들은 국화를 올린다. 제단 위의 꽃은 얼마 뒤 내려오고, 다음 사람이 다시 들어 올린다. 고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줬다 뺏었다 하는 셈.
대형 병원과 상조회사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 이란 말로, 고민 없이 단일화 시킨 장례 절차에는 ‘고인의 생애와 애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정신없는 접객, 조문, 국밥, 관과 수의 선택, 3단 5단 화환이 ‘상조 트랙’ 위에서 맹렬하게 돌아간다.
남은 자들끼리 쫓기듯 치른 이 ‘판에 박힌’ 예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지금의 염습과 완장, 영정과 수의가 예법에 맡기는 한 걸까. 불효자는 피하고 싶은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이쑤시개 하나도 돈으로 계산된’ 장례 청구서.
“과도한 제단부터 없애야 합니다.”
‘작은 장례식 운동’을 펼쳐온 국내 최초의 임종 감독 송길원은 말한다. 그 자리에 고인의 생애가 요약된 스토리텔링 사진과 유품, 편지 등이 놓인 메모리얼 테이블이 있어야 한다고.
“죽음과 장례는 ‘강렬한 엔딩 신과 명대사’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저라면 죽음의 스승인 이어령 선생님의 장례식에 화환 대신 굴렁쇠를 가져다 놓았을 겁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컨셉으로 ‘메멘토 모리’라고 쓰인 작은 유리병에 흙을 담아 조문객들에게 선물로 나눠줬을 거예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요.”
굴렁쇠, 흙, 메멘토모리, 선물이라는 단어로 이어령의 생애가 선명하게 요약된 장례가 눈 앞에 그려졌다.
장례는 ENDing 이 아닌 ANDing이라고 말하는 ‘엔딩 플래너’ 송길원 목사를 만났다. 양평 청란 교회 담임 목사인 그는 수목장 ‘소풍 가는 날’과 어린이 무료 묘원인 ‘안데르센 공원 묘원’을 직접 운영하는 묘지지기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 부활을 상징하는 푸른 알(청란 교회)과 수목장과 어린이 묘지가 이어진 자연 공간은 ‘생로병사’의 평화가 가득했다. 그는 좋은 죽음 수업을 위해 우리에게 ‘시신 냉장고’와 ‘디지로그 장례식’이 시급하다고 했다.
-목사가 임종 감독으로 나선 이유가 있습니까?
“제 어머니가 한때 염장이셨어요. 제가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죠(웃음). “다음 생에선 엄마가 내 아들로 태어나라”고 할 만큼. 그런데 10년 전 어머니가 한번 크게 아프셔서 돌아가실 걱정을 하니, 내 어머니 염습은 누가 하나 싶은 거예요.
낯선 남자에게 맡기는 건 편치 않고... 당시엔 여성 장례지도사도 없어서, 내가 하자 생각을 했죠. 그런데 덜컥 겁이 났어요. 과연 내가 엄마가 쏟아낸 마지막 분비물을 비위 안 상하고 혼자 닦고 수습할 수 있을까? 그걸 할 수 있다면 ‘진짜 내가 목사인데’….”
-당시에 어머니와 염습 얘기를 나누셨나요?
“그때는 다행히 몸이 회복되셨어요. 그 뒤로 ‘어머니의 염습’은 저의 버킷리스트였죠. 그런데 최근 들어 코로나로 급히 화장하면서 염습이 생략되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잖아요. 어머니께 물어봤죠. “어머니, 염습은 왜 한 거예요?””
-왜 하는 거죠? 염습.
“어머니 말씀이 그러세요. “야야, 시골에 살 때는 겨울에 돌아가시면, 아재도 와야 하고 당숙도 와야 하고… 5일, 7일이 훌쩍인대, 시신을 아랫목에 두고 군불 때면 썩고 물 흐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해서 구멍을 다 막았지. 요새같이 냉장 시설 잘돼 있으면, 사실 염습을 왜 해?””
-그 질문을 아무도 안 했군요!
“그렇죠. 다들 하니 그냥 하나보다 했던 거죠. ‘왜?’라고 질문이 결국 인문학이잖아요. 그래서 또 물었어요. “어머니, 묶는 건 또 왜 묶어요? 죄수처럼.” “산속에 매장할 때 상여꾼들이 가파른 길 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어. 시신까지 관 속에서 뒤뚱거리면 상여꾼이 힘드니까 묶었지. 지금은 차 타고 가서 화장하는데 왜 묶어? 다 헛짓거리야.”
어머니는 ‘장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라는 의식은 없었지만, 지금껏 그대로 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건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애들 장가보낼 때도 ‘니들 스몰웨딩 해라’ 그러셨거든요. 장례도 가족장으로 아름다워지려면, 스몰 장례식이 돼야 하는 거고요.”
송길원은 죽음과 장례, 임종 심리를 깊이 공부해서 ‘죽음의 탄생’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책에는 ‘장례를 망가뜨린 오적’이 나온다. 그는 장례오적으로 1수의 2 염습과 결박 3 완장과 굴건 4 국화꽃과 조화 5 이 모든 것을 모르는 무지를 꼽는다.
단적으로 과거엔 고인이 비단옷을 입고, 유족이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죄인이란 의미로 삼베옷을 입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인에게 죄수복인 삼베옷을 입힌다. 원가가 몇만 원에 불과한 중국산 삼베를 수백만 원에 바가지까지 쓰며.
염습 또한 산 자들의 혐오와 불편을 막기 위함이라, 요즘 같은 장례 문화에서는 간소화 되어야 한다. 미라 형태로 싸매는 복잡한 염습은 전 세계 유례가 없다. 가벼운 위생 처리 후 고인을 편안히 숙면 상태로 관에 모시면 된다고.
완장이나 리본도 조선총독부 의례준칙에 따른 것이며, 국화꽃 또한 일본 황실의 꽃이다. 우리 전통 장례는 꽃보다 만장, 병풍 등을 사용했다. 꽃을 쓰려거든 생명 없는 조화나 절화 대신 화분이나 고인이 생전 좋아했던 꽃을 쓰면 된다고. 모두 정신이 번쩍 드는 제안이다.
-기존의 장례 방식이 고정된 예법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새롭게 만들면 되나요? 혹 좋은 모델이 있습니까?
“인류의 바이블에 있어요. 성경의 창세기는 마지막 48, 49, 50장을 장례식으로 끝맺고 있어요. 야곱은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식들을 불러 한 명씩 그에 맞는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장사지내라’고 꼼꼼하게 사전장례의향서를 불러주지요.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장사를 지냅니다.
다음은 용서와 화해가 남아요. 야곱의 가정사는 ‘가폭(가정폭력)’의 비극이 있어요. 형들이 요셉을 질투해서 이집트에 팔아넘긴 사건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의 복수가 두려운 형들을, 요셉이 안심시킵니다. “당신들 자녀까지 내가 다 보살피겠다”고요. 창세기 마지막 문장은 ‘요셉도 죽고 입관하였더라’로 끝나요. ‘끄트머리’라는 말 있지요? 끝이 이렇게 좋은 머리가 되는 거지요.”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장례식에서 보고 들은 체험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맞습니다. 저는 장례식이야말로 최고의 ‘죽음 현장 학습’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교장 선생님이셨던 제 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우셨어요. 처음 느꼈죠. 죽음이라는 게 있구나. 슬픔이란 이런 거구나.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네 할아버지가 이런 분이었다’고 좋은 추억들을 얘기해 주셨어요. 힐링캠프가 따로 없었어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생명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아요. ‘학폭’도 자연스레 줄어요.
지인이 초등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에서 상여에 매다는 꼭두인형을 만드는 종이접기 수업을 했대요. 아이들이 적어낸 소감문이 파격적이었어요. ‘친구 괴롭히지 않을래요,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께 효도할래요’였어요.
죽음이 삶에 스며들면, 삶이 우울해지는 게 아니라 행복 지수가 올라가요. 사람을 존중하게 되고 험한 소리를 안 하게 되죠.”
-하지만 현실에 고착된 병원 중심 장례 문화에서 좋은 ‘죽음 수업’이 가능할까요?
“현재로선 웃픈 현실이죠.”
장례업이 비즈니스가 됐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비용에 거품이 너무 많아요. 제단 장식, 빈소 사용료, 접객비 등등 1,500~2000만 원이 훌쩍 넘죠. 이름난 대형 병원은 더합니다. 장례 트랙이 들어가면 유족들은 조문객 접대하느라 혼이 빠져서 고인을 애도할 시간이 없어요. 보는 눈을 의식해서 화환으로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부고를 뿌려 조의금도 받아야죠.
큰일에 품앗이하는 그런 상부상조 문화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점차 ‘선(先)장례 후(後)부고’가 정착돼야한다고 얘기해요. 현장에는 초대받은 가까운 가족들만 와서 깊이 애도하고, 부고는 그 후에 올리는 거죠. 지인들은 발인 날짜에 쫓기지 않고 십시일반 조의금과 위로를 보태면 돼요. 디지털 조문 문화가 정착돼야죠.”
지금처럼 현장에서 화환과 방문자 숫자로 장례식을 정량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으냐고, 그런 장례 끝엔 유족들이 장례 수익과 유산을 가지고 크게 갈등을 겪는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가족장 위주의 ‘작은 장례식’으로 크기와 의미를 전환해야 합니다. 병원에서만 장례식 하라는 법 있나요? 장례식이 병원으로 간 건 30년도 안 됐어요. 아파트와 공동주택이 일반화되면서 고층에서 관을 계단으로 내리는 게 어려워졌죠. 엘리베이터도 안되니 곤돌라로 관 내리다, 빨래 걷던 이웃이 혼비백산하는 일이 생겼거든요.”
-임종 감독이 되어서 치른 장례는 어땠나요?
“저는 고인의 시신을 교회 정원에 마련된 안치실에 모셨어요. 장례식은 교회 공동 공간에서 했죠. 수의도 상복도 평상복으로 했어요. 관은 종이로 유골함은 한지로 만들었어요. 총비용이 430만 원 정도 들었습니다.
장례의 핵심은 고인의 ‘이야기’였어요. 컨셉을 ‘함박웃음’으로 잡고 웃음이 넘치는 사진들로 메모리얼 테이블을 채웠습니다. 꽃 대신 효자손 꽂고 손주들 편지와 고인의 신발 등 일상 유품을 전시했죠.
벽시계의 시간은 고인이 돌아가신 시간에 맞춰놓았어요. 산 자들의 시간에 쫓기지 않았죠. 눈물도 넘치고 웃음도 넘쳤습니다.”
-병원 장례식에서 벗어나려면 망자의 몸을 모실 공간이 필요하겠군요.
“요즘 김치냉장고 와인 냉장고 다 있지요? 좋은 장례를 위해선 시신 냉장고가 필요합니다. 저는 시신 저온 냉장 장치를 ‘레스텔(Restel)’이라고 불러요. 저희는 교회 마당에 설치해서 ‘호텔 막벨라(아브라함의 가족 묘지였던 동굴)’라는 이름도 붙였어요.
공공기관에서 이 냉장장치를 구비해서 빌려주면 교회나 성당, 절, 마을회관 등의 공간에서 가족장례를 치를 수 있어요. 레스텔이 있으면 ‘고인의 존엄성’이 보장됩니다. 시신 아래 시신 없고 시신 위에 시신 없잖아요. 하지만 병원의 냉장 창고에는 시신이 위아래로 가득 쌓여있거든요.
레스텔로 가족장 치르면 부패 염려가 없으니 전문 염습도 따로 필요 없어요. 알코올로 몸 닦고 스프레이로 물 뿌려서 머리 빗겨드리고, 흉하지 않게 살짝 분만 발라 드리면 표정이 평온해져요. 관포로 덮고 있다 ‘뷰잉’이라는 절차로, 가족과 대면 인사해야죠. 그게 고인이 주인공인 장례,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작별입니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을 쓴 LA장의사 케이틀린 도티를 인터뷰했을 때, 그녀도 그러더군요. ‘가족의 시신을 직접 닦고 돌본 사람이 더 자연스럽게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 삶의 유한함을 공유하면서, 생의 감각과 감사가 샘솟는다는 거죠.
“그럼요. 죽음을 똑바로 봐야 삶이 이해됩니다.”
-점점 더 고인과의 대면 장례로 가는 방향이 맞겠군요.
“네. 전 세계에서 비대면 장례는 일본과 우리밖에 없어요. 시신 없는 장사는 전사자 유고시밖에 없죠. 다만 시신을 싣고 화장터에 전부 몰려갈 필요는 없다고 봐요. 먼지가 되는 과정을 지키는 건 고된 장례 노동이고 트라우마가 되기도 해요. 여건이 되면 장례 전문가가 맡아서 해주는 ‘선화장 후발인’을 권합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절정에 있다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묘지가 도심 가운데 있는 유럽의 도시 풍경이 이해됐어요. 우리나라 정서에선 아직 멀었지요?
“우리나라는 여전히 화장터, 묘지는 재수 없다고들 해요. 집값 떨어진다고요. 그런 분들이 맹모삼천지교 얘기하면서 맹자 어머니가 8학군을 쫓아다녔다고 하는데요. 제 해석은 달라요.
맹자 어머니는 교육 공학자였어요. 그래서 첫 번째로 장의사가 이웃인 곳으로 간 겁니다. 울고불고 생사의 과정을 교육했죠. 두 번째가 시장통. 무한경쟁의 생생한 삶을 보게 했어요. 그다음이 서당 근처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먼저 통찰해야 학문의 세상이 열리는 거죠.”
-수목장인 ‘소풍 가는 날’에는 어떤 분들이 옵니까?
“누구나 원하면 올 수 있어요. 다행히 자연장지가 많아지고 있어요. 다만 저희는 몇 가지를 금하고 있어요. 자연을 훼손하는 모든 것은 배제합니다. 줄기를 자른 절화, 죽은 꽃인 조화도 안 돼요. 뿌리를 살린 꽃이나 화분은 환대합니다. 죽음에는 계급이 없으니, 거창한 묘비도 안 돼요.
수목장은 나무 아래 1인당 노트북 사이즈의 컴팩트한 자리 정도예요. 요즘엔 그곳에 미리 가묘 자리를 잡고, 가족 단위로 와서 오손도손 자리 배치도 하세요.”
-아이들에게 죽음 교육은 어떻게 시키는 게 좋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셨던 저희 아버지 말씀이, 요즘 아이들이 한글을 다 떼고 오니 초등학교 교사들이 무기력해진대요. 때가 되면 배울 걸, 선행시켜서 교육시스템이 흐트러졌다는 거죠.
죽음 교육도 그래요. 선행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때가 오면 배워야죠. 장례식장에서 “할머니가 이런 분이었다”고 좋은 기억을 계속 발굴해서 이야기하고, 아쉬운 게 있어도 ‘긍휼의 마음’으로 엎어드리고요. 세상에 나쁘게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귀한 배움의 끄트머리를 아이들이 놓치면 안 되죠.”
송길원 목사가 운영하는 소아암 환자 무료 묘역인 ‘안데르센 묘원’에는 양부모의 학대로 세상을 떠난 ‘정인이’가 묻혀있다. 그는 정인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가슴이 살아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새벽 2~3시에도 지방에서 찾아오는 엄마들이 줄을 이었고,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따라와 정인이 무덤 앞에 과자와 선물을 두고 갔다.
“어둠 속에 개가 짖어 밖으로 나가보면, 동이 트기도 전에 각지의 엄마들이 정인이 묘지를 찾아왔어요. 한 어린아이의 짧았던 생애를 다들 한마음으로 슬퍼했어요.”
그렇게 그 해 새벽 눈밭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다 동상까지 걸렸다고, 그가 웃었다. 묘지가 한 사회의 굳은 몸을 심폐 소생시켰다고.
-애도는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구체적이어야지요. 제가 세월호 사건 때 팽목항에 하늘 우체통과 등대 트리를 설치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에서 임종 심리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100일이 되도록 그곳에 분노와 트라우마만 가득한 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항구에 하늘 우체통을 만들어 설치했습니다. 전국에서 날아든 편지가 수천 통이었어요. 등대에는 계란을 매달아 등불을 밝혔죠. 그때의 편지와 조형물이 아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기억하게 했어요.”
-부모님 장례 계획은 세워놓으셨는지요?
“그럼요. 돌아가시기 전에 ‘엔딩 파티’를 열어, 형제자매, 지인들과 정겨웠던 이야기 마음껏 나누게 해드리고 ‘자랑스러웠다’고 말씀드릴 겁니다. 임종이 가까워져 오면 ‘사랑한다’고 인사하고, 눈감으신 그 날 하루는 가족들과 충분히 애도할 거예요. 날짜 카운트는 다음 날부터 하고 장례식은 가족끼리 작게 치를까 합니다.
‘천국 바캉스’라고 컨셉도 잡아놨어요. 노래는 아버지는 평소 흥얼거리시던 ‘섬마을 선생님’을 틀어드리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자장가를 준비했어요. ‘자장자장 우리 엄마, 잘도 잔다, 우리 엄마…’
지인들에겐 장례식 사진과 두 분의 생애를 담은 ‘엔딩 노트’를 공유할 참입니다. 선장례 후부고로 폐 끼치지 않고, 조의금이 들어온다면 ‘독거노인’을 위해서 쓰려고 해요. 장담컨대 장례만 잘 치러도 행복 지수가 올라가요. 효도하라, 강조할 필요가 없죠. 반대로 장례를 잘 못치르면 분노가 쌓이고 사회적 비용이 올라가죠.”
-그야말로 좋은 장례가 우리의 장래를 보여주네요.
“힐링캠프가 따로 없죠. 거짓되게 살지 말아야겠다. 어머니보다 더 잘 살아야겠다. 우리 큰 아버지 멋있었다. 서로 사랑하고 끌어안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죽음과 장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해보세요. 마다하지 않으실 거예요. 가장 큰 관심사거든요. 저는 어머니 모시고 대학로에서 ‘염쟁이 유 씨’ 연극도 보고 묻힐 곳도 함께 보러 가요. ‘종활(임종 활동)’이라고 하죠. 수의는 뭐 입으실래요? 평상복은 어때요? 여쭸더니 어머니가 웃으며 그러세요. “역시, 우리 장남이 최고다!””
-어른도 아이도 죽음 이야기를 피할 것 같은데, 아니었군요. 어차피 우리의 무의식은 끝없이 죽음을 생각하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을 듯 합니다.
“우리 말에 시집살이, 타향살이라는 말이 있듯이 ‘죽살이’라는 말도 있어요. 우리는 죽고 사는 것을 한 묶음으로 봤어요. 거기서 죽음을 떼어놓으면 불안만 커져요. 장례를 통해 죽음이 스며들면, 존중이 생기고 담대해져요. 죽음과 삶도 통합하는데, 사회 통합이 뭐 어렵겠습니까?”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례가 있습니까?
“제가 말기 암 환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앰뷸러스 소원재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최근에 죽기 전에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노을 한번 보고 싶다는 분의 소원을 들어드렸어요. 그분이 병원에 돌아와서 호흡기를 낀 채 가족과 세족식을 했어요. 당신은 기력이 달려 못하고 아내와 딸이 발을 씻겨드렸죠.
그렇게 작별을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분 장례식장에 동백꽃 화분을 놓아드렸어요. 딸이 영정 사진을 들고 아내가 유골함을 들고 따랐어요. 상주는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편견이 깨졌죠. 장례에는 인간과 인간이 있을 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없습니다. 제가 그분께 동백으로 훈장을 드렸어요(웃음). 인간답게 존엄하게 잘 돌아가셨다고요.”
장례식은 고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찍는 것과 같다고 했다. 코스모스를 좋아하면 코스모스로 공간을 꾸미고, 윷놀이를 좋아했으면 입구에 윷놀이판을 설치해도 좋다고.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것은 추모사라고 했다.
-보통 사람의 장례식에도 추모사가 꼭 필요한가요?
“그럼요. 모든 영화는 라스트신과 명대사로 기억되죠. 인간의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임종 감독으로 제가 추적하는 것도 바로 한 인간이 남긴 명대사예요. 우리는 그걸 추모사로 들어야 해요.
반목이 컸던 가족도 아이가 읽은 추모의 편지 한 장에, 서로 마음을 돌이켜서 부둥켜안습니다. “미안하다”고 혹은 “고마웠다”고. 짧아도 그 한마디가 모두를 울려요.”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고인이 주인공인 장례식이 정착될 수 있을까요?
“과거에 장례는 교회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의 사업이 됐어요. 병원 장례식장에서 죽어버린 죽음을 종교가 심폐소생 시켜야 해요. 충분히 애도하는 장례를 치를 수 있어요. 교회, 성당, 절, 마을 회관에서. 가족 단위로 작게 치르면 됩니다. 대기업에서 시신 저온 냉장 장치를 사회적 자원으로 기부해주면 좋겠습니다.
24년 전에 SK그룹의 최종현 회장이 매장이 아닌 화장을 선택하면서, 단번에 문화가 바뀌었어요. 놀랍게도 한 세대만에 화장이 정착됐어요. 지금 코로나라는 또 한번의 변곡점으로 무염습, 선화장 등 많은 것이 바뀌고 있습니다. 희망이 있어요. 꽃보다 고인이 주인공인 장례가 머지않았습니다. 스몰 장례의 사례가 모이면 범례가 되고, 범례가 모이면 곧 표준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