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지적 폭발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선지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사진작가 김용호

지난해 11월, ‘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이어령 선생의 특별한 죽음 수업이었다. 나는 1년 여의 시간 동안 평창동을 방문하며 그의 지적 여정을 인터뷰로 기록했다. 그는 책에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육체의 물기가 빠져나갈수록, 그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생생하게 죽음을 헤엄쳐 다녔다. 일상에서 느끼는 죽음의 불안, 그것은 ‘주머니에 깨진 유리 조각을 넣고 다니는 것과 같다’거나, 있던 곳으로의 귀가라는 점에서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만 놀고 들어오라’는 소리와 같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동물원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기분’이라는 말로, 척추 신경으로 죄어오는 공포도 숨기지 않았다.

태양의 고도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이 바뀌듯 선생의 죽음의 감각과 그것을 대면하고 초월하고자 하는 지성의 모양은 계속 바뀌어갔다. 이어령은 밤마다 어둠의 시침과 통증의 분침으로 압박해오는 죽음의 시간과 팔씨름 내기를 했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사유는 깊어졌다.

컵 하나로 마인드와 보디와 스피릿을 설명하며, 컵(육체)이 깨지고 그 안에 담긴 물(욕망, 감정 등의 마인드)이 쏟아져도 컵이 생길 때 만들어진 원래의 빈 공간(영혼)은 우주에 닿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를 위로했다.

그러니 자주 ‘마인드를 비우고 하늘의 별을 보라’고. 빈 찻잔 같은 몸으로 매일 새 빛을 받아 마시며 살라고. 비어 있는 중심인 배꼽(타인과의 연결 호스)과 카오스의 형상인 귀의 신비를 잊지 말라고 우리를 다독였다.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와 갑작스러운 강추위로 겨울의 시름이 깊어질수록 이어령의 병세도 깊어졌다.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원하는 그의 의지대로 의료용 침대가 들어왔고, 담요를 덮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누워 있는 시간조차 신문사 칼럼과 이어령 인터뷰 선집을 마무리하기 위해 구술하고 교정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새벽, 나는 그의 문자를 받고 잠이 깼다. 새벽 4시 44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일본 출판에 관련한 조언과 함께 몇 마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늘 밤을 부엉이처럼 뜬눈으로 지새워요. 이젠 어둠과 팔씨름을 해도 초저녁부터 져요. 빛나던 단추를 모두 뜯긴, 패전 장군의 군복 같은 수의를 입어야지요.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 죽어도 그 입술에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겁니다.’

스마트폰 액정의 밝음에, 무엇보다 이어령 선생의 지각의 밝음에 눈이 부셨다. 그리하여 어느 해보다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2022년 새해를 맞는 독자들에게, 그의 지혜가 한 번 더 전달된다면 세뱃돈 받은 것처럼 한 해를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더욱 깊어지고 쉬워진 이어령과의 또 한 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어령의 넥스트 메시지.

시대의 지혜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산소같은 지혜를 불어넣어주고 있다./사진작가 김용호

-라스트의 수세에 넥스트의 공세가 있다고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어요. 계절이 이음새를 모르고 이어지듯, 선생님의 마지막엔 늘 새로운 놀라움이 자리합니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말이 참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아직도 꿈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서가 생기면 거짓말을 못 해요. 많은 분의 부탁으로 ‘마지막’이 끊어질 듯 이어지지만, 나는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최상의 힘을 냅니다.”

복부 암이 깊어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하며, 그는 게 한 마리가 여기저기 갯벌을 헤집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럴수록 그의 생각의 텍스처 또한 썰물과 밀물 사이의 갯벌처럼 변해갔다. 그 사유의 밭에서 매일 새것의 지혜가 움트고 발굴되었다.

-’이어령이 마지막 수업’에서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와 마인드와 스피릿을 설명하셨지요. 우주와 나의 거리가 당겨진 흥분감에, 저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어요.

“하하. 지금까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은 다 어려웠어요. 어렵게 얘기해야 그 사람 이름이 오래 남거든. 음식 먹고 체해야 뭘 먹었는지 생각하지. 소화 잘되면 뭐 먹었는지 기억이나 해요? 그래도 내가 다시 쉽게 말해줄게요.

여기 컵이 있죠? 이게 육체예요. 죽음이 뭔가? 이 컵이 깨지는 거예요. 유리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 내 몸이 깨지는 거죠.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져요.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져. 안 사라지는 건?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에요. 비어 있던 컵의 공간, 그게 은하수까지 닿는 스피릿, 영성이에요.”

-영성은 갖고 태어납니까?

“그럼요. 원래 컵은 비어 있잖아. 거기에 뜨거운 물 담기고 차가운 물 담기는 거죠. 말 배우기 전에, 세상의 욕망의 들어오기 전에, 세 살 핏덩이 속에 살아 숨 쉬던 생명. 어머니 자궁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의 허공, 그 공간은 우주의 빅뱅까지 닿아 있어요. 사라지지 않아요. 나라는 컵 안에 존재했던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게 스피릿이에요.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질서… 그래서 한국 사람들, 죽으면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말은 태연하게 하지만 자신도 두렵다고 했다.

“죽음 앞에 식은땀 안 흘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만 죽어도 영성의 세계를 갖고 간다, 그게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영성이 컵 안의 빈 부분이라면, 그건 공간의 문제로군요. 비워야 채워지는 것이고요. 인터뷰도 그렇습니다. 공간의 문제지요. 내 안에 네가 들어와 섞이는 것이고, 내 생각을 뚫고 너의 말이 진격해오는 것이지요.

“대화는 함께 낳는 거예요. 초대해서 함께 낳는 거죠. 이 세상의 모든 생각은 개인이 했더라도 반드시 함께 만든 겁니다. 사람이든, 별빛이든 바람이든, 걷다가 처음 보는 노인의 얼굴이든…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어오고, 그들과 조응하면서 나의 단어와 발상이 만들어져요.

오늘날 청년의 언어가 나에게는 새로운 생각을 던져줍니다. 요즘 ‘멍때린다’라고 하지요? 과거에 나는 청중들이 내 앞에서 ‘멍때리면’ 신이 나서 강연을 했어요. 완전히 내 말에 흡수된 상태거든.

멍한 상태가 뭐예요? 서양에서는 엑스터시, 황홀경이죠. 그런데 요즘의 멍때린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판단 중지 상태예요.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방어 기재로 쓰는 게 요즘의 ‘멍때리기’야.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죠.”

거인의 사색./사진작가 김용호

-생각으로부터의 피난이군요!

“진공의 배예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든 겁니다. 그게 멍한 상태예요. 오늘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새로운 능동형 인간이 되고 있어요.”

-뇌를 비워 진공 상태로 만드는 것, 그 보호 행위가 ‘멍때린다’로 표현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 돼요. 한국어만의 특징이죠. 우리나라 말은 화석 같아요. 나는 생각의 원리를 찾아갈 때 말을 파고들어요. 한국말 속에 숨은 화석을 찾아볼수록 놀라운 사고의 힘을 느낍니다. 나는 책보다 우리나라 ‘말’에서 배운 게 참 많아요.”

-말이 글보다 중요한가요?

“말이 우선이에요. 글 쓰는 사람도 말을 떠나 존재할 수 없어요. 김소월 시인의 유명한 시가 있잖아.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감정도 말로 표현해야 감정으로 나오는 거예요. 소리 지르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죠? 말이 그거예요. 가만히 있다가도 어떤 말이 생기면, 그 감정이 생겨요. ‘슬픔? 아, 내가 슬프구나’. 슬퍼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말을 하니까 슬퍼지는 거죠.

인간은 말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어요. 북극의 에스키모에게 낙타라는 말이 있겠어요? 없지. 말이 없으면 사물도 없어요. 거꾸로 낙타가 있는 더운 지방에 눈이 있겠어요? 없지. 눈이라는 말도 없어요. 그러니까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말에서 벗어날 수 없죠. 라캉, 프로이트, 언어학, 기호학… 다 말이에요. 그걸 상징계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어의 세상에서 산다는 건 중요한 거예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은 제도와 법률의 세계인 노모스(nomos 법계), 물질과 자연의 세계인 피시스(physis 자연계), 표현과 상징의 세계인 세미오시스(semiosis 기호상징계)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했다.

“법계의 진리는 오늘이라도 바뀌어요. 방역 지침처럼 어제까지는 모이면 괜찮다가 오늘은 또 벌금 내잖아. 그런데 상징계는 안 바뀌어요. 어제까지 ‘산’이었던 걸 ‘손’이라고 못 바꾸죠. 0도에서 물이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못 바꿔. 자연계도 손댈 수 없어요.

정치가들이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돈이 많아도, 상징계와 자연계는 노터치예요. 그러니까 글 쓰는 사람이 버틸 수 있어요. 권력 가진 자들이 법은 지배해도 나의 언어는 못 건드리거든.”

-자연계, 법계, 상징계가 곧 진선미의 세계라고 하셨어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 이성 비판과도 다 연결된다고요.

“맞아요. 순수이성으로 보면 이 자연계에 신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칸트가 어느 날 산책을 가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종이 울어요. “주인님, 하나님을 여태 믿고 살았는데, 없다 시니 너무 슬퍼요.” “그래? 그럼 있다고 해줄게”하고 쓴 게 ‘실천이성비판’이에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한다면 신이 필요하다.

순수이성이 진이고, 실천이성이 선이에요. 마지막 미가 판단이성이예요. ‘제 눈에 안경’이라고 누군가를 보고 반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미적판단이거든.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 3가지 범주를 섞지 말고 분별해서 사고하면 돼요.”

이어령은 한국말의 화석에서 금광을 캐냈던 당대 최고의 기호학자이자 세계적인 비교문화학자였다./사진작가 김용호

-살면서 지적으로 위축된 적은 한 번도 없으신지요?

“없어요. 쫄지 않았어요. 칸트가 아무리 훌륭해도 문학가는 못 되는 사람이잖아. 산책 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칸트가 지나가면 동네 사람이 일제히 시계를 맞췄다고 해요. 문학 하는 사람은 기분 날 때 산책해요. 비 오는 날은 빠지고 기분 좋으면 아침에 갈 수도 있죠. 시간 맞춰 가면 그게 KTX지, 산책이야(웃음)?

플라톤한테도 프로이트한테도 아인슈타인한테도 나는 쫄지 않았어요. 라틴어, 그리스어, 한자로 남아 있으면 진리고, 우리말로 남아 있으면 별것 아니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해요. 우리말로 됐건, 외국말로 됐건 내가 보고 들어서 좋으면 그게 진리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하는 게 내 몫이에요.”

화기가 다한 장작처럼 보였음에도, 말하기 시작하면 불쏘시개로 살린 불씨처럼 금방 육체에 활기가 살아났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어쩌면 ‘한마디라도 더 듣겠다’는 우리의 욕심이 이어령 선생의 몸에 피를 돌게 하고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재미나게 살아오셨어요. 요즘 그토록 회자하는 ‘자기다움’이 결국은 나만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이어주는 여정이 아닐는지요?

“(다정하게)그럼요. 하나의 회의는 하나의 기쁨을 낳고 또 하나의 기쁨은 새로운 의문을 낳죠.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고 해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나를 향해 썼고, 내가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예요. 그걸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났어요.

나만의 ‘타우마제인’이 생기면 말하고 싶어서 못 견뎠죠. 밤중에 깨달으면 집사람을 깨워서 얘기해요. 자다가 일어난 아내가 좋아하겠어요(웃음)? 다 잠꼬대 같지. 그래도 누군가를 깨워서 감동을 나누고 싶을 만큼, ‘내가 깨달은 건’ 순수하게 기뻐요. 감동이 뭐겠어요? 느껴서 움직이는 게 감동이에요. 돈 줘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느끼면 움직여요.”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여행이 나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가장 능동적인 방법이라고들 합니다. 선생은 어떻게 책을 여행하셨는지요?

“책과 진리는 도서관에도 있고 길바닥에도 있고 쓰레기통에도 있어요. 쉽게 주어졌어도, 우리는 애써 못 가질 것들만 찾아다니니, 불행해요. 허허. 내가 빨간 옷 입었다고 산타클로스가 되는 게 아니듯, 책 읽었다고 지혜자가 되는 게 아니야.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서문부터 끝까지 읽고 ‘몇 월 며칠 독파’라고 쓰는 사람이에요(웃음).

대개는 앞에는 줄 치고 뒤에는 다 새 책이지. 90%의 독자가 중도 포기해요. 오죽하면 끝까지 읽으면 돈 주는 테스트를 해도, 통과한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책을 재미로 읽지, 의무로 읽나? 컴퓨터의 브라우저는 새싹을 뜻하는 말이에요. 짐승이 새싹 뜯어 먹듯 독서 하면 됩니다. 재미없으면 덮고 느끼면 밑줄 치는 거죠.”

-선생님 댁 서가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요?

“하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두꺼워도 세 번을 읽었어요. 그걸 읽고 글을 썼죠. 그런데 대부분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이 없어요. 다 중간을 보죠. 의무적으로 연애해서 잘되는 거 봤어요? 책도 그래요. 만남이고 기회고 우연이죠.

나는 피난 가서 찢어진 책들을 재밌게 읽었어요. 지금도 제목이 뭔지 작가가 누군지 몰라. 찢어져서 모르니 상상을 해요. 책이 나한테 도전을 해와야지, 내가 책을 정복하려 들면 안 돼요. 책은 내게 말을 걸어요. ‘너 나 읽을래? 어렵지?” 슬슬 약 올리면서.”

지의 최전선에서 홀로 진격했던 이어령.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사진작가 김용호

-안 읽고 쌓인 책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군요!

“나는 이 방을 열어도 책 저 방을 열어도 다 책이야. 깔린 책이 몇만권이예요. 이걸 어떻게 다 읽어? 밤에 깨서 서가를 걸어 다니면, 애들이 요염한 자세로 나를 불러요. “나 여기 있어요~” 윙크하면서. 금박 칠한 제목에, 고운 디자인으로. 우연히 시선이 꽂힌 제목을 뽑아 훌훌 책장을 넘기다 기막힌 문장을 만나면, 딱 덮어요.”

-왜요?

“악 소리가 나거든. 감전된 것 같아. 내가 오늘 밤 깨어 이걸 펼치지 않았으면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문장… 그게 환희죠. 그게 독서예요. 기차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랑처럼, 운명이고 우연이죠. 난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보면 설레요. 저 속에 뭐가 있을까, 언젠가 만나면 운명적인 글을 쓰게 되겠지. 그래서 소가 풀을 뜯듯 자유롭게 책을 읽으라는 거예요. 책 쓰는 사람은 씨 뿌리듯 시스템을 쓰지만, 읽는 사람은 자유롭게 읽어요. 쓰는 감각, 읽는 감각이 서로 그렇게 달라요.”

그가 한밤에 깨어 홀로 서가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몽유하듯, 사유하는. 단독자에게 밤은 얼마나 짧은가. 그가 아흔아홉 마리 양으로 떼 지어 살지 말고 한 마리 양으로 생을 어슬렁거리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흔아홉 마리 양은 목자 엉덩이만 쫓아 눈앞의 풀만 뜯어 먹지만, 한 마리 양은 구름을 보고 꽃향기를 맡다 홀로 낯선 세계로 나아간다.

-혼자를 감각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게 생명이거든. 거대한 이념, 거대한 숫자로 환원하면 끝납니다. 한 명 죽이면 살인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사천 명 죽이면 그런 생각이 없어요. 히틀러는 마음이 여려서 자기 앵무새 한 마리 못 죽였지만,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대학살했죠.

인간이 집단이 되면 추상이 돼요. 코로나 때 느꼈잖아. 숫자로 표시되는 감각을. 몇백 명 죽으면 대참사고, 한 명이 죽으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져. 그게 바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예요. 주인공이 유탄 맞아 죽는 순간, 평화롭게 ‘서부 전선 이상 없다’고 발표하거든. 생명을 집단화하면, 개인의 얼굴과 숨결은 다 묻혀버려요.”

-한국 사회는 요즘 더 주체적으로 각성한 ‘슈퍼 개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 유니크해지는 거죠. 그래서 37억 인구 중 그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오징어게임’을 본 거예요. 나는 ‘오징어게임’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서양 사람들은 바닷속 스퀴드만 먹어서 마른오징어의 납작한 형태를 몰라. ‘오징어게임’이라는 한글 자음에 들어있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신비를 모른다고. 그런데 실제 우주의 모든 디자인은 동그라미, 삼각형, 네모예요. 한국인은 어릴 때 이미 바닥에 그걸 그리고 놀았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크리에이티브 세계에서 갈수록 유년이 새롭게 각성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 게임의 설계자가 나중에 고백하잖아요. 돈 많은 사람은 뭘 해도 재미가 없다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릴 때 온종일 싫증 안 내고 놀았던 게 바로 이 놀이더라고. 유년은 아직 육체가 마인드라는 물로 채워지기 전의, 영성의 세계예요. 언어로 설명되기 이전의 세계죠.”

그 자신, 유년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성년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었다. 어린 날 굴렁쇠를 굴리며 놀던 기억을 살려 88 올림픽 무대에서 재현했고, 정오의 정적에서 느낀 죽음의 환청으로, 평생 서늘한 감각으로 ‘메멘토 모리’를 환기해왔다. 상징계에서 그 누구보다 신나게 놀았던 이어령.

사진작가 김용호가 이어령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하고 있다./사진작가 김용호

“(미소지으며)내가 말했던 상징계의 언어를 생각해봐요. 어린 시절 게임에서 ‘너 죽었다’ 하면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돼. 그런데 ‘오징어게임’에서는 ‘너 죽었다’하면 기관총으로 쏴 죽이잖아. 상징계의 언어와 법계의 언어가 부딪히니, 충격파가 그만큼 커요.

그런데 또 최후 승자는 어때요? 우리 현실에서는 인정사정없는 놈이 이길 것 같은데, 상징계에서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 이겼어요. 나는 그 주인공의 이름 ‘성기훈’의 성이 Saint로 느껴졌습니다.”

‘오징어게임’의 진짜 재미는 성기훈의 성이 Saint로 해석되는 언어 게임이라고 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보다, 실수하고 못났지만 그래도 인간을 믿고 희생애를 간직한 성기훈이 가장 예수와 닮은 사람이라고.

-‘오징어게임’이 돈과 빚에 찌든 한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밑바닥이 다 드러났지. 탈북자들, 이주 노동자들, 해고당한 사람들… 소외되고 짓밟힌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물어뜯잖아. 우리 속담에 ‘거지끼리 자루 찢는다’고 불행한 사람끼리 모여, 뺏고 뺏는 게임… 그 모습을 감추지 않았어요. 이 정도면 한국에 노동하러 오겠어? 악당들은 거기 다 있더구먼. 창피해서 살겠나, 싶겠지. 허허.

(정색하며) 그런데 “나는 바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에요. “한국이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하는 순간 거기서 이미 벗어난 거야. 진짜 무서운 건 그걸 감추는 나라죠. 우리는 모순을 드러냈기에 자유로운 겁니다. 고해성사 같은 거죠. 자신을 고발하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희망이 있어요. 결국 선이 악을 이기고 인간은 믿을 만 하다는 것, 세계인들은 그걸 보고 안도한 겁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선량한 자가 이긴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도 말했잖아요. 아우슈비츠 체험을 그린 빅터 프랭클의 ‘밤과 안개’를 보면 나치 앞잡이가 돼서 개처럼 종족을 물어뜯는 놈도 있지만, 이기적일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숭고한 모습이 더 많았다고. 이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사는 데도, 빵을 나눠주고 도와줘요. 인간이 그래. 극한 상황에 가면 위선도 위악도 다 벗겨져.

‘오징어게임’의 마지막은 리얼리스트와 휴머니스트의 게임이에요. 길바닥에 쓰러져 누운 홈리스를 누가 구할 것인가. 노인이 그러죠. 인간을 믿지 말라고. 자정까지 저 모양이면 내가 이긴 거라고.

‘이래도 인간을 믿어? 자네 운도 다한 모양이네’ 노인이 눈을 감는데, 삐뽀삐뽀 구조대가 와서 홈리스를 구해요. 그 순간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치죠. 모든 엽기적이고 잔인한 현실을 뚫고 메시아의 소리가 들린 거예요.”

"그러니 절망하지 마세요!" 스승의 손./사진작가 김용호

코로나 시대의 인류도 ‘오징어게임’과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도 친구도 바이러스 보균자가 되면 낙인이 찍혀요. 죽어도 장례도 못 치르죠.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묵묵히 그들을 돌보고 시체를 치우는 사람이 있었어요.

드라마처럼, 인간도 반전의 역사를 반복했어요. 36억 년 전의 진핵세포가 여기까지 진화한 것은 선한 의지의 힘이었죠. 모든 생명체가 그 방향을 알기에, 캄브리아기보다 더 많은 생명체가 지상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마세요.”

양지를 향해 커브를 돌듯, 목소리가 따뜻하게 떨렸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에겐 더 구체적인 희망이 필요합니다.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며)알아요. 마음이 아파요. 나는 34년생, 태어나는 순간 식민지 아이였어요. 눈 떠보니 전쟁이었죠. 최악의 환경이기에 나아질 희망도 구체적이었어요. 전쟁 때는 살려고 발버둥 쳤지, 자살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나는 26살에 논설위원이 돼서 머리 허연 주요한 선생과 같이 논설을 썼어요. 다들 어려웠고 더 패기가 있었죠.

지금은 GDP 10위권의 거대 도시에 살아도, 더 막막하고 불행해요. 그러나 세계가 이미 다 세팅된 것 같아도, 더 나은 길과 몫이 반드시 있습니다. 단적으로 코로나 백신 누가 만들었어요? 터키 이민자였습니다. 남들이 다 포기한 messenger RNA로 다르게 가서 결과를 냈지요. 비주류, 마이노러티가 진짜 경쟁력이 되는 세상이 왔어요.

그러니 앞으로 한국 안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로 나가세요.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출구가 여러 개면 살 수 있습니다.”

상징계와 자연계가 고장 나면 끝이지만, 법과 제도계가 고장 나면 고쳐 쓰고 바꿔 쓸 수 있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병든 정부, 감옥 같은 국가를 인간은 다 바꿔서 썼어요. 선거를 통해서도 바깥으로 나가는 걸 통해서도, 우리는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희망의 존재인지 보세요. 아프간의 카불에서 탈출하려고 비행기 타다 떨어져 죽잖아. 눈물 나는 얘기예요.”

-살아남은 저희는 무엇을 의지해서 나아가야 합니까?

“마지막에 믿을 건 성기훈처럼 자기 안에 있는 휴머니티예요. 자기 안의 세계성, 자기 안의 영성… 그것이 치킨게임 같은, 오징어게임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을 아름다운 승자로 만듭니다. 믿으세요. 착한 자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여러분이 보는 악한 현실과는 다른 원리가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을. 지금 그것을 한국인이 만들어서 퍼뜨리고 있잖아요.

영화 ‘미나리’를 보세요. 힘없는 할머니가 아칸소 초원의 바퀴 달린 집에서 가족을 구원하잖아. 아무리 망가지고 변두리로 가장자리로 밀려나도, 한국인은 점점 더 최고의 인간이 되어갔어요. 신기하죠.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인간이 되었던, 그 바탕에는 휴머니티가 있어요. 그게 456억을 가져가는 승자의 DNA였어요.”

휴머니티가 결국은 생명 자본이라고 했다.

질서 있는 것은 무질서해지고, 뜨거운 것은 식어가고, 모든 것이 엔트로피 순방향으로 멸망해가지만, 오직 생명만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그러니 생명 있는 우리가 가진 반전과 역류의 힘을 믿으라고. 숨 쉬며 절망하는 것, 그것조차 승리의 예표라고 그의 목소리가 크레센도를 주문하는 오페라 지휘자처럼 높아졌다.

한국의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벼랑 끝에서도 늘 우물 찾는 기쁨을 목격하게 해준 우리 시대의 어른./사진작가 김용호

병 중의 환자였으나 말할 때는 홀로그램처럼 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마지막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듯 하여, 나는 다급하게 지혜의 수혈을 받기 위해 질문의 호스를 꽂았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가치는 또 달라지겠지요? 선생은 십수 년 전 이미 ‘디지로그’와 ‘생명 자본’이라는 아름다운 미래 문명을 선창하셨는데, 지금 메타버스 안에서 인간과 아바타는 어떻게 서로의 존재를 바라볼까요?

“아날로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에서도 하나밖에 없으면 가치가 특별해집니다. 블록체인 전자 열쇠로 가치가 매겨지면 디자인 하나도 몇십억에 팔려요. 사실 메타버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VR도 있고 믹스드 리얼리티도 있고 AR도 있죠. 증강현실인 AR을 활용하면 척추 환자가 나비처럼 날 수도 있어요.

그때 제일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예요.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입니다.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해요. 서양은 목 neck에 걸리면 나쁜 거잖아.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길목, 손목, 나들목… 어른들이 ‘사이 좋게 놀아라’ 하듯이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관건이에요.”

생명 자본, 디지로그 모두 이 ‘사이’를 부드럽게 풀어서 이어준 명명이라고 했다.

-언어의 신비가 그러하듯, 사랑과 권위로 명명하면 생명이 생기는군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발견해야 합니다. 사이의 언어를! 인터페이스의 생명을! 우리는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섞어 짜파게티를 만드는 민족이에요. 내가 얘기한 디지로그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등분이 아니라 융합하고 새끼 쳐서 새 생명이 나오는 생명 자본의 세계예요. 남녀가 만나 어린아이를 낳듯 이질적인 것이 섞여 새 세상을 만들죠.”

디지로그는 더 이상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고 태도의 문제라고 했다.

-다가올 AI 세상은 뭐라고 호명해야 할까요?

“초기에 내가 생명 자본을 이야기할 때 5가지를 꼽았지요. 농업, 의료, 헬스, 교육, AI. 이 다섯 가지가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산업에서 AI 몫이 커지면, 인간은 ‘생각하는 자’ ‘돕는 자’ ‘’마음이 따뜻한 자’로 서로의 차이를 느껴요. 똑똑한 사람은 아무리 높이 올라도 AI를 못 따라가죠. 지적인 사람과 착한 사람이 붙으면, ‘오징어게임’에서 그랬듯이 착한 사람이 이깁니다.

이젠 AI가 아니라 AW세상이에요.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Artificial wisdom이죠. AI로 전쟁 무기를 만들었다면 AW로는 행복의 무기를 만드세요.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잠들어도 한 몸처럼 느끼는 AW 베개 만드세요. 서양 사람은 기껏해야 깃털 베개 만들었지만, 우리는 조 넣고 콩 넣어서 바이오 베개 만든 민족입니다. 조상 중에 아인슈타인도 퀴리 부인도 없지만, 지혜와 멋이 배인 생활의 역사가 있어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사진작가 김용호

한국 사회를 세계 문명을,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 비춰주던 스승과 새해를 맞는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적혈구 수치가 줄어들어 점점 호흡이 가빠지는 와중에도, 인터뷰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말한 당신의 외로움은 ‘메타 언어’로서의 외로움이니, 곁을 지키던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은 오해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요즘에도 밤마다 어둠과 팔씨름을 하십니까?

“밤이 무한하기에 밤은 이렇게 암으로 아픈 내 몸으로 계속 걸어들어와요. 아침이 와야 그 싸움이 끝이 나지요.”

-언제 신의 은총을 느끼십니까?

“가장 고통스러울 때죠. 한밤중에, 새벽 3~4시에 가장 아파요. 그때 나는 신의 존재를, 은총을 느껴요. 고통의 한가운데서 신과 대면해요. 동이 트고 고통도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져요. 조금만 행복해도 인간은 신을 잊습니다(웃음).”

-봄 여름 가을 겨울… 살면서 어느 계절을 가장 사랑하셨나요?

“여름을 좋아했어요. 햇빛이 꽉 차오는 여름, 그것도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정오. 그게 생의 절정의 이미지였어요. 지금은 안 그래. 끝이 없는 눈벌판에 눈 쌓인 오두막집 풍경이 좋아요. 바깥은 희고 춥고 어둡고, 안은 밝고 노랗고 따뜻하죠. 장작 난로가 타들어 가면 혼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런 겨울…”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라고 그는 내게 말했었다.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는 말씀에는 변함이 없으신지요?

“변함없어요. 생은 선물이고 나는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번 겸허히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했어요.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참 슬픈 거지요.

그 슬픔에 이르기 전에 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생명을 달릴 때나 죽음을 달릴 때나 이어령의 손은 주저가 없었다./사진작가 김용호

당신이 예상하는 것보다 선생은 훨씬 야위었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세다.

모자도 쓰지 않았고, 양복을 입지도 않았으나, 생과 사를 연주하는 듯한 이어령의 흰 손이 인터뷰가 내내 지휘봉처럼 허공에 찬란하게 나부꼈다. 그렇게 거인의 어깨 위에서 우리는 또 한 번의 새해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