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매년 트렌드를 예측하는 '트렌드 코리아'를 발표해온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사진=오종찬 기자

우리는 여전히 바이러스의 시간을 살고 있다. 고정된 가치가 녹아내리는 불안정한 ‘액체사회’에서 사람들은 ‘해시태그 커뮤니티’의 순간 접착력에 따라 물방울처럼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원자 단위로 쪼개진 개인은 각자도생의 진화를 시작했다. ‘나노 사회’ 진입 후, 우리 모두 제 각자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찾는 기나긴 오디세이가 시작됐다고, 트렌드 분석의 권위자 김난도 교수는 진단한다.

찬 바람이 불면 내년 트렌드 관련 서적이 30개가 넘게 쏟아지는 나라. 한국인만큼 트렌드에 열광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취향이 까다롭고 변덕이 심해 일찍부터 글로벌 패션 기업의 ‘테스트 마켓’으로 사랑받는 한국에서 15년째 ‘트렌드 코리아’의 아성은 굳건하다.

‘트렌드 코리아2022′의 대표 저자이자 서울대학교 소비자트렌드분석센터장인 김난도 교수를 만나 ‘나노 사회’가 야기한 ‘나다움 광풍’과 그에 따른 사회 변화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수입의 파이프라인을 뚫는 머니러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득템력과 라이크커머스, 건강과 자기 성취를 향한 루틴과 헬시플레저... 저성장시대에도 나름의 출구 전략을 찾아내는 슈퍼 나노들의 투지가 놀랍다.

‘고진감래’를 믿지 않기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도, 삶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

집단의 일원에서 슈퍼 개인으로의 ‘각성’ 속도가 너무 빨라 ‘나다움’의 N차 분열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김난도는 조언한다. 안정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려면 ‘정체성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나다움의 총량’을 늘이기 위해, 우리는 드넓은 피드백 풀에서,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운 채, 쉼 없이 노를 저어야 한다고.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소비자를 생각하라’와 ‘테스트하라’였다. 국립대 교수이면서도 수시로 ‘컴포트 존’을 벗어나 ‘나다움’을 테스트하는 이 변화지향적인 학자를 만나보자.

-’트렌드코리아2022′가 지난 가을부터 베스트셀러 상위에서 내려올 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익숙한 진풍경입니다.

“파는 게 어려운 세상인데, 감사한 일이죠. 세상이 확확 바뀌고 있어요.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플레이어들은 사실 더 힘들어요. 기자님은 어떠세요? 단적으로 30년 전보다 지금이 기자 하는 게 더 어렵지요? 교수도 그렇습니다. 그럼 누가 편해졌을까요? 소비자죠.”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으니까요.

“그렇죠. 제 주변의 CEO나 퇴직자도 책 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한테 조언을 구하면 제가 그러죠. “책 내는 건 쉬워요. 파는 게 어렵죠(웃음).” 인생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거라면 마음대로 쓰라고 해요. 팔고 싶다면 첫마디가 그거예요. ‘소비자를 생각하라.’ 독자를 알아야 상품이 된다고요.

타깃이 예비 사장인지, 직장인 후배인지, 청춘인지, 여성 독자인지… 독자에 따라 주어와 서술어를 다 바꾸라고 해요. 네 위주가 아니라 소비자 위주로 단어도 조사도 다 바꾸라고요.”

"트렌드는 사라지지 않아요. 일상이 될 뿐이죠."/사진=오종찬 기자

-놀랍군요! 저는 교수 사회가 가장 변화가 느린 곳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웃음).

“책에는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렇게 살아라’고 하고, 저는 그대로면 사람들은 따지겠죠. “그러는 너는 뭐냐?” 저도 계속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 중이에요. 유튜브, 인스타 채널도 만들고,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서 ‘트렌드코리아’ 몰을 만들어 책도 팔아요. 일을 벌일수록 당장 득보다 처리할 일이 더 많죠. 그래도 일단 해봅니다. 유통 변화가 큰 이슈인데 몸소 체험하지 않고 안다고 할 수 없으니까.

제가 영화를 좋아해서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더라도 손님이 줄면 고민하잖아요. 재밌는 영화가 없나? 대여 기간이 짧은가? 그게 아니라 노트북으로 TV 보는 세상이 온 거라면, 나도 모델을 바꿔야죠. 마니아 대상 희귀본 가게로 가든가, 비디오를 인터넷으로 송출하든가. 후자가 넷플릭스잖아요. 자본이 있든 없든 변화는 기회예요. 노를 저어 가야죠.”

-노를 저으면 앞으로 나가나요?

“아니요.노를 저어야 제 자리를 지켜요. 제 자리 지키는 것도 안간힘이 필요한 시대죠. 안 그러면 유속이 빨라 순식간에 떠내려가요(웃음).”

-그런데 왜 ‘트렌드 코리아’는 15년째 같은 포맷입니까?

“처음엔 책 이름 빼고 다 바꾸려고 했죠(웃음). 그런데 영업에서 반대했어요. ‘브랜드’로 인식된 디자인과 카피를 바꾸면 독자가 혼란스럽다는 거죠. 새로운 시안이 아무리 멋있어도 독자가 못 알아보면 소용없으니, 변화도 미세하게 줘요. 무조건 소비자가 일 순위고, 그 소비자를 잘 아는 영업 파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요.”

트렌드 예측과 분석의 시작점이 된 ‘트렌드 코리아’. 그 시작은 ‘사치’를 연구해서 쓴 책 ‘럭셔리 코리아’였다. 그리고 2007년 1월, 돌출된 시장의 신호들을 종합해 ‘위클리비즈’ 지면에 ‘올해의 10대 키워드’로 발표했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테스트를 꼭 하는 편인가요?

“네. 저는 사소한 선택도 테스트를 거쳐요. 자동차를 산다고 해도 먼저 ‘렌트’ 해서 승차감도 맛보고 트렁크에 짐도 실어봐요. 테스트해서 결론을 내면 흔들리지 않고 쭉 가요. 집에서 학교 오는 길도 A 코스와 B 코스를 다 가보고 시간 재서 1분이라도 빠르면, 그 길로 가요.”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안 맞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구글의 혁신가 알베르트 사보이아도 ‘생각랜드’에서 오래 머물지 말고 시장에 나가 테스트부터 해보라더군요.

“옛날엔 사회가 안정적이라 내가 지금까지 한 성공과 실패 체험이 오늘과 내일에 적용할 수 있었죠. 지금은 아니에요. “이 시점에 이게 맞나?’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뇌피셜’이 안 통하니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빅데이터 접근은 못 해도, 데이터 수집은 가능하니까.”

-그 과정이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리지는 않는지요?

“의사결정에는 ‘무엇이 베스트다’도 중요하지만 ‘무엇은 아니다’도 중요해요. 막연한 로망을 가진 것보다, 해보고 아니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죠. 제일 나쁜 게 머릿속에서만 ‘이러면 어땠을까’로 남는 겁니다. 25년 출근길이지만 코로나 상황, 교통 상황이 바뀌면 그에 따라 실험도 해보고 시간도 재보는 거예요. 그러면 작게라도 실증 데이터가 나오죠.

친구들은 제 방식에 손사래를 쳐요.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냐?” 저는 그래요. “피곤하면 너는 살던 대로 살아라!” 저도 아이패드, 태블릿 써봤지만, 신문 보고 메모하는 게 더 맞아서 직접 손으로 써요. 라이프스타일은 괜찮습니다. 비즈니스는 다르죠. 변해야 할 것과 안 변해도 되는 것을 구분해서 행동해야죠.”

삶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고 믿는 김난도 교수./사진=오종찬 기자

-한국인이 트렌드 읽기에 광적인 건 변화에 대한 민감성 때문인가요? 다른 사람과 보폭을 맞추고 싶어서인가요?

“둘 다죠. 한국인들은 굉장히 변화 지향적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세상 돌아가는 걸 학습해요. 과거엔 트렌드가 어떻게 1년마다 바뀌냐고 했는데, 이제는 6개월 단위로 책을 내달라고 해요. 사회변화의 총량이 그만큼 크다는 거죠. 한국인에게 맞는 시대가 온 거예요.

아날로그 기술이 성숙하던 70~80년대는 일본인들의 전성기였어요. 일본은 변화를 꺼리고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죠. 장인이 대우받고 미국보다 잘 산다고들 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기술이 격변하는 시대가 오니 그 미덕이 걸림돌이 됐어요. 그래도 일본은 내수 시장이 있어서 먹고살아요.

우리는 내수 시장이 작으니 혁신의 속도에서 답을 찾았죠. 이전 것은 부수고 계속 새로 짓고 새로 만들어내요. 과거에 조롱받던 자칭 ‘냄비근성’이 이제는 끓어오르는 변화의 시대에 잘 맞는 온도와 속도가 된 거예요. K컬처도 그래서 빛을 보게 됐고요.”

-맞습니다. 요즘 한국인을 보면 혁신의 마음과 장인의 손이 붙어있는 것 같아요. J팝과 재패니메이션의 시대에서 어느새 K팝과 웹툰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응집형 에너지’인지 ‘폭발형 에너지’인지... 변화에 반응하는 태도에 따라 시대의 주인공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15년 정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감지한 가장 큰 흐름은 무엇인가요?

“제일 큰 흐름은 역시 소비자의 능동성이죠. 옛날엔 단순 구매자였지만 지금은 피드백 평가자, 생산자, 펀딩 투자자 역할까지 만능화 되고 있어요.”

-젊은이들은 ‘리셀’이라는 시장도 만들어냈죠.

“맞아요. ‘득템력’이 소비자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요. ‘사치의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젊은이들의 소비 패턴은 두 가지로 양극화돼요. 아주 비싼 것 그리고 가장 저렴한 것. 소비 능력 세상에서, 과거엔 친구들과만 비교했는데 이제는 인스타를 통해 지구 반대편 케냐에 있는 사람과도 경쟁하잖아요.

그래서 더 특별한 물건을 찾아요. 돈으로 되는 건 나도 살 수 있으니, ‘한정판’처럼 돈으로는 안 되는 걸 찾죠. 구별되고 싶으니까. 예전엔 여행이나 맛집이 그 역할을 해줬는데 코로나 이후엔 물건으로 쏠렸어요.”

-소비사회가 가속화되면서 시민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된 듯합니다.

“그도 그런 것이 요즘엔 투표도 유권자보다 소비자 마인드로 해요. 그래서 저는 선거도 소비자마인드로 접근하면 앵글이 달라질 거라고 해요. 예전엔 학연, 지연, 성별, 나이 등 귀속적 속성으로 투표했다면 지금은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해요. 누가 내 생각과 취향을 더 잘 실현해줄지, 누가 집을 사게 해줄지… 소비자의 안목으로 따져서.”

행복하려면 정체성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된다./픽사베이

-제대로 된 정치를 소비하고 싶은데, 네거티브 뉴스만 소비해야 하니 피로해지는 거죠. 여러 트렌드 중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노 사회예요. 과거 국민교육헌장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이라고 했어요. 회사의 사훈이 ‘사원을 가족같이’였죠. 지금은 ‘회사가 부자라고 내가 부자인가?’ 반문해요. 더 잘게 쪼개지고 파편화된 나노 사회에서, 개인은 집단에서 구하던 정체성을 나 스스로 구해야 해요. 제 각자 ‘자기다움’이 엄청난 과제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나다운 게 뭐야?’ 정체성을 요구받으면 순간 막막해져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납득하기 위한 노력으로 ‘MBTI’, 성격테스트에 열을 올렸어요. ‘나다움’의 증거가 되는 물건을 사고, ‘나다움’의 힌트를 주는 책을 읽고. 그렇게 스스로 ‘나다움’을 찾는 기나긴 오디세이가 시작된 겁니다.”

-저는 그 ‘나다움’의 증거 찾기가 결국 ‘일’로 모일 거라고 봤는데요.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이어질 거라고요. 아닌가요?

“일을 잘하면 월급도 오르고 승진도 하겠죠. 그런데 회사의 정체성이 이미 나의 정체성이 아니니까. 6시까지만 회사원의 정체성이고, 6시 이후는 다시 나를 찾는 시간이죠. 최근에는 일이 천직이나 소명의 틀을 벗어나서 형태적으로 다원화되고 있어요. 저도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지만 스마트스토어도 운영하고 기업 컨설팅도 하고, 유튜버도 하거든요

-다각도로 정체성의 총량이 늘어나는 셈이네요.

“행복연구의 대가인 최인철 교수가 그러더군요. “행복하려면 정체성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한 바구니에 담으면 깨지면 그만이잖아요. 예측불허가 일상화되니, 어느 날 내 정체성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확률도 높아졌죠. 결국 엔잡, 멀티 페르소나가 다 나노 사회로 연결돼 있어요.”

나노 사회는 이 밖에도 라이크커머스, 러스틱 라이프, 바른생활 루틴이, 머니러시 등의 트렌드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월급 외 수입의 파이프 라인에 몰두하는 ‘머니러시’ 현상은 ‘빚투’와 ‘영끌’로 표현되는 과도한 레버리지를 만들어냈다. 미술품, 저작권, 공모주, NFT 등에 투자 열풍이 일고 동학개미와 서학개미가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돈이 더 필요한 이유는 사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다. ‘등골 브레이커’라는 별명대로 어린 시절 죄책감 없이 고가품을 경험해본 세대는 그 눈높이를 낮추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소비하는 인간’으로의 정체성은 얼마나 짜릿하고 달콤한가.

나의 무한확장을 일으키는 메타버스 공간.

-최근에는 SNS로 소비되는 정체성 시장이 더 커 보입니다.

“그렇죠. 요즘엔 꼬맹이도 자기 틱톡 계정이 있어요. ‘틱톡에서의 나, 페북에서의 나, 인스타그램에서의 나’가 다 다르죠. 틱톡은 재밌는 나, 페북은 똑똑한 나, 인스타는 잘 나가는 나… 심지어 반려동물 대리인으로서의 나도 있어요. 지식인, 살림꾼, 장난꾸러기 등등 어떤 앱을 꺼내 쓰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나와요.

그러고 보면 BTS가 얼마나 탁월해요. 이미 몇 년 전에 이걸 예견하고 ‘페르소나’라는 노래를 발표했잖아요.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노랫말이 공허한 외침이 아니고 실존적인 질문이었던 거죠.”

이제 메타버스까지 들어왔으니, 당분간은 정체성과 세계관 ‘놀이’가 더 확장되리라는 건 자명해 보였다.

-정체성을 갖고 노는 이 상황이 실존적 자기 성찰에 더 좋을까요? 나쁠까요?

“좋고 나쁘고는 없어요. 팩트로 받아들이고 나는 무엇을 할까, 어떤 비즈니스를 할까를 생각해야죠.”

실험과 데이터를 중요시하는 행동주의 전략가답게 답변에 주저함이 없었다. 자기 학문의 범용성에 자신만만했고, 합리적 시장주의자답게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응대 매너는 꾸며낸 시늉 없이 편안했다.

우리는 잠시 그의 글쓰기 스타일과 2000년대 초반 그의 베스트셀러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신형철, 김훈 등 빼어난 문장가들의 글을 필사한다는 고백과 함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둘러싼 해프닝에 가까운 극과 극의 평가까지.

12년 전, 스무 살이 된 아들을 위해 쓴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광적으로 사랑받았고, 순식간에 내동댕이쳐졌다. “내용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다만 그때는 미래가 남아 있다고 느끼던 시기였고, 지금은 아니죠. 시대적 가치가 변했고, 청년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중요해졌어요.”

그동안 그가 낭만적 조언자에서 데이터에 기반한 현실의 조언자로 몸을 바꿨듯이 청년들의 코어 방어력도 튼튼해졌다.

-헬시 플레처 트렌드는 청년 문화의 또 다른 축으로 보입니다. ‘no pain no gain’의 슬로건이 사라지고, 건강 관리조차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으로 소환된 건 MZ 세대 특유의 현재지향성 때문이겠지요?

“미래의 불확실성이 깊어서 너무 많은 걸 감내하기 싫은 거죠. 고진감래를 믿을 수 없으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몰두해요. 길티플레저였던 음식들도 그에 맞춰서 저칼로리 아이스크림, 프로틴 브라우니 등으로 쾌적하게 모습을 바꿨죠. 이런 순간 지향성은 지속될 거예요.

참 아이러니한 게 인류는 번영을 위해 이제껏 속도를 높여왔어요. 국민소득 1천 불 시대에도 성장률이 10%였죠. 지금은 3만 불 소득 시대가 됐어도 성장률이 제로니, 서로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요.”

BTS의 페르소나.

-책에서 말씀하신 ‘내러티브 자본’도 결국 내일을 빙자한 거품을 걷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에 집중하겠다는 욕구로 읽힙니다.

“맞아요. 예전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이었지만 이젠 서사의 진정성을 파고들어 가죠. 가령 영화 ‘ET’에 M&M 초콜릿이 나왔다면 이제 소비자는 궁금해해요. 그 회사는 우주개발에 투자했나? CEO가 양성평등을 말하면 이사회에 여성 임원은 몇 명인가? 상품의 스토리나 CEO의 말보다 그 회사가 가진 제품과 경영의 진정성을 캐내죠.

그 진정성이 내러티브로 확인되면, 소비자는 제품을 사고 주식을 사요. 내러티브는 단순 스토리와는 달라요. 세계관의 문제고 진정성의 문제죠. 개인도 기업도 결국 자기 정체성의 내러티브가 중요한 자본이 되고 있어요.”

-세대 간의 정체성 파워 게임도 치열하죠. 90년대 문화의 주인공이었던 ‘엑스틴의 귀환’이라는 트렌드가 반가웠어요.

“그동안 베이비부머가 장기 집권하고 밀레니얼에게 관심이 집중되면서 사회주도권이 X세대를 건너뛰었어요. 최근 기업의 CEO도 MZ 세대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소외된 면이 있었죠. 그런데 따져보면 X세대는 ‘나는 나’라는 세대 담론의 시작이었어요. 현재 소비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면서, Z세대인 하이틴 자녀와는 문화 공유도 가능하죠.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새로운 기술 혁명의 정착이 ‘엑스틴’에게 달려 있어요. 메타버스, NFT가 대세가 될까? 3D 안경처럼 사라질까? 답은 X세대가 갖고 있어요. 그들이 메타버스에 들어가는 순간 트렌드는 일상이 될 겁니다.”

-X세대의 파워를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뭐죠?

“X세대는 양손잡이예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요. 베이비부머는 디지털을 모르고 MZ은 아날로그를 모르잖아요. X세대는 감수성 예민할 때 아날로그를, 늦지 않게 디지털 변화를 순차적으로 경험했어요.

잡지 ‘세시’와 ‘보그’ ‘코스모폴리탄’을 읽으며 라이프스타일의 진화를 종이 잡지로 배웠죠. 손끝의 지류가 통하는 마지막 세대고, 그래서 그 세대에 아티스트가 많아요. 그런 류의 문화적 완충성을 무시할 수 없어요. 박진영, 방시혁 같은 막강한 제작자들을 보세요. 엑스틴과 MZ이 협업하기 시작하면 그 폭발력이 더 엄청날 거예요.”

김난도 교수는 코로나 이후, 좋은 공간에 대한 욕구가 폭발할 거라고 내다봤다.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안하는 현대백화점 여의도점.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요? 나노 사회와 현재의 즐거움, 머니러시와 진성성이 믹스된 사회는 또 어떤 수요를 만들어낼까요?

“변이가 잦아들면, 좋은 경험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겠죠. 몸의 직접 감각을 확장시켜줄 매력적인 공간으로 사람들이 몰릴 겁니다. 공간을 거점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대화되겠지요.”

-즐거움을 소비하는 추세는 계속 이어질까요?

“즐거움만 쫓아가진 않을 거예요. 즐거움과 편리함, 자기과시와 자기다움이 믹스된 미세 소비 시장이 열리겠죠. 시간을 아껴주는 HMR 등의 편리 상품과 시간을 써야 하는 영화, 맛집, 여행, 미술관 등의 경험 상품으로 시간 자원을 호환시키면서.

어쨌든 공평한 건 시간이에요. 24시간은 똑같이 주어지니까. 돈 있는 사람은 즐거운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 테고, 즐겁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줄이겠죠.”

-코로나 기간 동안 디지털 시간은 이미 감각을 추월해 우리는 2025년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속도가 관건입니까? 방향이나 밀도가 아니라?

“네. 방향과 밀도도 중요하지만, 당분간은 무조건 속도가 베이스입니다. 빨리 해보고 답을 내는 게 최선이죠.”

-김 교수는 변화에 어떻게 대비하시나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살아요. ‘럭셔리 코리아’와 ‘차이나 트렌드’를 거쳐 ‘트렌드 코리아’로 정착한 것처럼.”

-정보는 어디서 얻지요?

“200명의 트렌드헌터, 신한 카드 빅데이터, 코난 테크놀러지 소셜 데이터, 전문가 인터뷰를 두루 총합합니다.”

-’삶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는 확신엔 변함이 없으신지요?

“네. 저는 그 말을 믿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습니까(웃음). 오래 변화의 추이를 관찰하고 훈련해온 바에 의하면, 인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냅니다. 다만 내 일의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적극적으로 ‘피보팅(Pivoting 환경 변화에 따른 사업 방향 전환)’을 권유하죠.”

-책을 완성하기 전에 500명에게 원고를 보내 피드백을 받는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사실이에요. 50만 명에게 욕먹는 것보다 50명, 500명에게 듣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멘탈갑 ‘이시군요!

“순두부 멘탈 이에요(웃음). 나중에 크게 깨지기 전에 미리 보험을 드는 거죠.”

-피드백 풀을 유지하면서 소비자 반응을 반영하면 ‘망하기’가 더 어렵겠군요.

“제 어머니의 삶의 태도가 그런 식이었어요.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셨죠. 역지사지.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까’를 수용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어요.”

"아는 건 어렵지 않아요. 실천하는 게 어렵죠."/사진=오종찬 기자

-마지막으로 변화무쌍한 이 시대를 헤쳐가기 위해 개인과 기업은 어떤 노력을 해야할 지 조언을 부탁합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건 가설검증 능력입니다. 자잘한 시도로 가설을 시뮬레이션하고, 실패를 통해 역량을 키워야죠. 개인은 ‘열심히 사는 나’와 동시에 그걸 ‘지켜보는 나’를 만드세요. 메타 인지로 스스로를 관찰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왜 달려가지?’ ‘왜 멈춰섰지?’

연구해보니 아는 건 어렵지 않아요. 실천이 어렵죠. 제가 건강이 나빠진 후 내린 결론이 있어요. ‘통증이 스승이다’. 과식, 술, 자세… 옛날 습관으로 돌아가면 고통이 반복되니, 결국 통증 때문에 나를 바꿔요. 어쩌면 혁신의 최적 타이밍은 어쩔 수 없이 강제된 바로 그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