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위에서 골프 채를 휘두르는 최경주 선수를 볼 때마다, 나는 바람과 햇빛으로 단단하게 여문 이 사내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다. 뱃사람처럼 검게 그을린 피부, 찌르는 듯한 눈빛, 바위 틈새가 벌어지듯 번지는 묵직한 웃음까지... 보기를 하든 버디를 하든 한결같이 나이스한 그의 제스처는 보는 관중을 안심시킨다.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지난 9월, 최경주 선수는 한국인 최초로 PGA(미국 프로 골프) 챔피언스 투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바람이 유난히 심한 캘리포니아 페블비치(파72)에서 버디 5개와 보기 1개로 4언더파 68파를 기록했다. 22년 전, 한국인 최초로 PGA투어에 진출하며 코리안 탱크의 위력을 증명해왔던 그가, 이제 50세 이상만 출전하는 시니어 투어에서 또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탱크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넘어야할 산을 정확히 넘어가는 중이다.
최경주는 “피지컬은 전성기 시절과 같을 순 없지만 나이 들면 힘을 더 정확하게 쓸 수 있다”며 “몸과 마음을 다 깨끗이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린에서는 남 탓도 내 탓도 안되며, 오직 ‘루틴’에 의지해서 좋은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국 골프의 레전드, 최경주를 만났다. 여주에서 열린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을 위해 잠깐 귀국한 그와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후, 본격적인 인터뷰는 출국 후 줌으로 진행했다. 불안정한 와이파이, 끊어진 줌 화면 안팎으로 여러번 들락거려야했지만, 대화 내내 웃음과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역경은 추억과 무늬를 만들 뿐, 인생 필드에서도 골프 필드에서도 그는 프로였다.
-혼자 신가요?
“혼자예요. 여기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회장 근처의 호텔입니다. 막내가 대학 입학(듀크 대학)을 앞두고 있어 집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있고, 저는 혼자 투어를 다니고 있어요. 프로와 아마추어가 내일까지 친선게임 하고 이어서 본선 경기를 시작합니다.”
-최근엔 페블 비치에서 열린 PGA 챔피언스 투어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아름답죠. 그만큼 난코스이기도 하고요.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코스를 만들다 보니 한 홀도 방심할 수 없었어요. 매 홀마다 여긴 티샷, 저긴 아이언샷 등 메시지가 분명하고 바람의 방향도 수시로 바뀌어요. 태평양의 가장자리에 있다보니 스윙을 할 때마다 독특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전해졌죠.”
-어떤 냄새지요?
“파도에서 거품이 날리는 냄새죠. 바람의 차가움 속으로 파도 거품의 수분이 날아갈 때 몸이 짜릿해져요. 그 바람을 가르면서 공을 치면 가슴이 확 열립니다. 마지막 홀에서 집중하는데, 바다의 파란색이 반짝반짝 빛나더군요.”
-고향인 완도에서처럼...
“향수가 있죠. 완도엔 바다 잡초가 해변 공기에 노출 돼서 썩는 냄새가 있거든요. 해조류, 조개, 굴 향… 남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저는 세밀하게 다 느껴요.”
-시니어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진출했고 또 우승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역사를 쓰고 있어요. 51세의 나이에 여전히 정상의 플레이어로 사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22년동안 PGA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건 축복이죠. 게다가 이번이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이후 10년만의 우승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오십이 넘어 챔피언스 투어로 오니 나이 먹은 사람들과 싸우는 맛이 또 있어요. 젊을 때는 젊은 부딪힘이 있다면, 오십이 넘어가면 파도가 바위를 때리며 서로에게 스미듯, 싸움의 맛이 달라져요. 깊죠.”
-멘탈도 실력도 다들 노련하겠어요.
“구렁이 100마리가 들어 있어요(웃음). 제가 한국 선수로는 처음 챔피언스 리그에 왔잖아요. ‘여기서도 우승을 한번 해야 하지 않나’하는 기대가 있었죠. 그런데 초반 두 세 게임 해보니 여기도 어우~ 경쟁이 엄청나요. 과거에 다 우승해본 분들이 모이다 보니…능구렁이들을 상대해야 하니 또다른 노력을 해야죠.”
-젊을 때 노력과 50대의 노력은 어떻게 다른가요?
“젊을 땐 무작정 연습량을 늘렸어요. 무조건 남들보다 1시간 일찍 가고 1시간 늦게 끝냈죠. 밥 먹고 화장실 갈 시간만 빼면 스윙 연습을 해서 손이 채에 들러붙을 정도였어요. 나이 들고부터 에너지를 최소화해서 짧은 시간에 힘을 쓰려고 해요. 3개월 전부터 좋아하던 와인도 끊고 탄수화물을 조절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어요. 몸을 깨끗하게 만들고 동시에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공을 많이 들여요.”
-챔피언스 리그에 나이 제한은 없습니까?
“없어요. 최고령자인 버나드 랑거가 64살이에요. 아직 70대는 없어요. 저는 51살이니 아직 20년은 더 해야 돼요. 갈 길이 멉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한국 골프에서 가장 앞에 있어요. 미국 진출도 그랬고, 시니어 선수로서의 삶도 그렇고요. 제가 가는 길이 후배들이 갈 길이에요.”
-앞에 선 사람이 져야할 짐이 무겁겠군요.
“가볍진 않죠(웃음). 예전에 고 하용조 목사님께 그런 고백을 했더니 제게 성경의 이사야서를 읽어주셨어요.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부러지리라’...”
-아! 명예가 멍에가 되지 않도록...
“네. 멍에를 내리고 편하게 치라고 하셨죠. 그때 그 말씀을 외며 훌훌 털고 필드에 나가서 우승했어요.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언젠가 데이비드 프로스트라는 남아프리카 선수가 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러더군요.
“KJ 스트레스 받지마. 너는 코리안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엔조이 해. 그레잇 잡, 그레잇 석세스, 네버 스트레스 투 머치(great job, great sucess, never stress too much). 그 친구도 남아공 출신으로 40년 넘게 골퍼로 활동했어요. 그런 동료한테 이해받으면 더 울컥하죠.”
그런데도 골프채만 잡으면 승부근성이 나와 집중하게 된다고 소탈하게 웃었다.
-35세 전성기를 지나면 코치로 사는 게 이득이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압박은 덜 하고 돈 벌 기회는 더 많고. 프로 활동을 그만두지 않는 건 직업을 넘어서 소명으로 보입니다.
“(미소 지으며)돈만 보고 운동했으면 일찍 지쳤을 거예요. 여기선 KJ 초이가 사우쓰 코리아에요. 제가 하는 행동, 시합의 스코어가 전부 기록에 남아요. 기왕이면 저는 좋은 역사를 쓰고 싶어요. 스포츠는 결국 기록이고 제가 높은 기록을 세워놓으면, 그걸 깨기 위한 후배들의 노력도 더 힘이 생기죠. 최경주가 PGA 16게임 만에 우승했으면, 그 다음엔 15게임 만에 우승하는 후배가 나올 거예요. 물론 쉽진 않을 겁니다. 하하.”
나라는 존재를 개인의 삶이 아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인간의 몸이 피와 살과 뼈가 엉킨 게 아니라 마치 모래와 잔디와 진흙으로 퇴적되어 온 것만 같다. 퍼팅 그린에 앉아 물끄러미 홀을 바라볼 때나, 호쾌하게 장타를 쳐올릴 때나 최경주는 골프라는 스포츠가 가진 독특한 힘과 겸손을 보여준다.
-골퍼로서도 전설이지만,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골프 레슨도 귀에 쏙쏙 박히더군요. 가령 퍼팅할때 에너지 전달은 일정하니, 목측거리를 계산해서 리드미컬하게 시계추처럼 백스윙을 하라거나... 스윙의 정석을 그립, 앵글, 스피드, 파워, 균형으로 순차적으로 설명한다거나. 골프 코칭이 마치 수학이나 철학 레슨처럼 들렸어요.
“복잡한 설명이 왜 필요해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연습을 정리해서 들려준 겁니다. 아무리 골프를 잘해도 프로를 능가할 수는 없어요. 논리에 맞으면 단순해요. 주니어 골퍼도 전문 선수도 놓치고 가는 게 있어요. 자기가 치는 공이 어떻게 가는 지 몸으로 알아야 해요. 몸으로 느껴야 다음 샷을 할 수가 있어요.
스윙은 시계추와 같아요. 갔으니까 오고 온 만큼 가는 거예요. 반복할수록 몸의 기억이 정확해지고 정확해지면 재밌어져요. 그 궤도가 몸에 붙으면 자신감이 생기죠.”
-그럴 땐 골프 채가 신체의 확장처럼 느껴지나요?
“그럼요. 골프 채는 멍청한 쇳덩이가 아녜요. 자기와 인연이 맞는 주인을 찾아가죠. 저도 느낌이 맞지 않으면 내려놔요. 내 맘대로 길들일 수 없어요. 그런데도 인연을 무시하고 거칠게 치면 골프 채만 망가져요. 맘대로 안되니 재미없다고 집어던지고 캠핑 가고 등산을 가죠. 다행히 팬데믹 이후에 많은 분들이 골프로 돌아왔어요(웃음).”
골프는 상금 랭킹으로 참가 기준을 정하고 영향력을 평가하면서 산업을 키워왔다. 최경주의 PGA 투어 통산 상금은 한화로 약 387억원으로 역대 상금 랭킹 34위다(2021.10.19 기준). 그는 버는 만큼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기가 열리는 현지의 쓰나미 피해자, 태풍 피해자 가족을 돕는 데 우승 상금을 헌납하고, 선교와 장학재단에도 공을 들인다. 스핀을 돌며 날아가는 골프 공처럼, 그의 우승 상금은 사회적 자본으로 변환되어 돌고 도는 중이다.
-공은 어떤가요?
“공은 둥글죠. 절대로 똑바로 나가지 않아요. 뱅그르르 돌면서 날아갑니다. 스핀이 있어야 바람의 저항을 뚫고 가요. 골프는 자기 갈 길 가겠다는 공을 상대하는 작업이에요.”
-제 갈 길 가겠다는 공을 어떻게 상대하죠?
“클럽 헤드의 무게를 알고 정확히 때리면 원하는 곳에 공을 놓을 수 있어요.”
그 무게와 힘의 원리를 어린 시절 아버지께 배웠다고 했다.
“어릴 때 마을에서 상수도 파이프 묻는 공사를 하면 집집마다 사람을 차출했어요. 큰 아들이니까 제가 대표로 나가서 도랑을 팠죠. 젊고 힘이 좋으니 곡괭이로 땅을 얼마나 세게 찍었겠어요.
그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빨리 하는 것 보다 한번 칠 때 힘을 정확하게 줘라. 곡괭이 무게를 이용해서 툭툭 쳐야 잘 들어간다.” 그 말씀이 지금껏 남아서 공을 칠 때, 공의 무게에 맞는 순간적인 힘을 써요. 그러면 작은 스윙으로도 웬만한 거리를 낼 수 있어요.”
-어린 시절에 역도를 한 경험도 도움이 됐겠지요?
“역도도 중요한 순간에 반동으로 일어나고 정확한 타이밍에 기구를 떨어뜨려요. 따져보면 어릴 때 곡괭이로 도랑 파고 역기 들고 일어서던 경험이, 지금 내 몸에 무게 재는 저울을 달아줬어요.”
그 덕에 덜 힘들게, 지치지 않게 공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서울에서 매끈하게 자랐으면 몰랐을 것을 완도 촌에서 다양한 굴곡을 만나다보니 하나둘 대처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하하. 완도에 가보면 알아요. 골프를 하기엔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저는 정말 다양한 코스에 놓인 공을 다 쳐봤어요. 돌에서 튕길 때 부드러운 흙에 빠질 때, 땅의 반응과 공의 반동이 다 다르죠. 18홀을 치다보면 우리는 늘 예상치 못한 환경과 만나요. 그때 머리로 짐작만 해서는 못쳐요. 몸이 그 환경을 정확히 알고 반응해야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땅에서 연습하라고 해요. 고무 매트에서도 쳐보고 콘크리트에서도 쳐보라고요. 땅의 반응, 공의 반응, 채의 반응을 다 느껴보라고요. 짐작만 하지 말고 자꾸 시도해보라고요.”
어쩌면 골프와 인생은 닮았다. ‘코스는 있는 그대로, 볼은 놓인 그대로, 플레이한다’는 골프의 대원칙을 생각할 때마다, 인생 플레이어들도 겸허해진다. 사방이 내 시야를 넘어서는 곡면이고 사각인데, 불평도 꼼수도 허용하지 않는다니! 바람이 불어도 도랑을 만나도, 있는 그대로, 놓인 그대로, 도망도 못 가고. 어쩌면 그 ‘단순한 직면’이 가장 어렵다.
-축구나 야구는 함께 하는 팀이 있고 수영이나 달리기는 명확하게 그어진 자기 레이스가 있잖아요. 팀웍도 라인도 없는 골프는, 18홀을 따로 또 같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가는데…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합니까?
“기왕이면 남 생각, 점수 생각을 안하려고 해요. 그것만 생각 안해도 자기 컨트롤이 되고 덜 흔들려요. 하다보면 본인 실수를 회피하고 싶어서 남 핑계 대고 캐디 핑계를 대요. 그럼 다 망치죠.
‘바람이 공을 움직여서, 백스윙할 때 소리가 나서, 캐디가 시선을 거슬려서, 옆 사람이 움직여서… 그런데 그 상황에서 스윙을 못 멈춘 나는 또 뭔가?’ 평상시에 그런 맘을 품고 있으면, 찌꺼기가 수면을 헤집고 부글부글 올라와요. 그래서 평소에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놓지않으면 힘들어요.”
-골프는 운과 불운의 경계가 너무나 미세해서 남 탓을 안하기가 참 어려울텐데요.
“하하. 남 탓은 인간의 죄성이죠.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숨었을 때, 하나님이 부르시니 바로 핑계를 대잖아요. “당신이 맺어준 저 여자가 권해서 그 열매를 먹었다”고요. 골프에서는 멘탈 관리가 중요해요. 그런데 혼란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으면 해결책을 못 찾아요.
강해지려면 핑계를 제거하고 내 몸으로 돌파해야죠. 그만두지도 않고 핑계만 대면 꼴만 사나워져요. 반복하고, 재미를 붙이고, 실력이 늘면 트로피는 제 발로 걸어와요. 돈이 나 좋다고 달려온다니까요(웃음).”
-남 탓 말고 내 탓은 어떤가요? ‘잘 안될 것’이라는 자기 불안, 실패에 대한 예감이 압박감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선수라면 누구나 압박과 불안을 겪죠. 경기 중에 세 번 정도 마음이 엎치락 뒤치락 해요. 시작하기 전에도 오고, 부담을 가진 홀 근처만 가도 긴장도가 훅 올라가요. 그런데 그것도 특별한 비법이 없어요. 사전에 샷을 더 많이 준비하고, 잠을 푹 자고... 연습과 대비를 더 많이 하는 거죠. 저는 실수가 생길 땐 바로 마음을 고쳐 먹어요. ‘얼마나 더 좋은 게 오려고 이러나?’”
-좋은 방법이군요. 공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너무 많은 부정적인 생각이 치고 들어오기에, 마크 트웨인은 “골프는 산책 잘하고 기분 망치는 운동”이라고 했어요. 쓸데없는 걱정을 대체할 자기만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죠. 혹시 플레이할 때 점수를 안보고 홀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인가요?
“점수를 놓고 보면 머리가 복잡해요. 리더 보드를 보면서 그에 맞춰서 잘 하는 선수도 있지만, 저는 홀에 집중하는 게 효과가 좋아요. 이순간 그 홀을 잘 끝내는 데만 최선을 다하는 거죠. 지금도 파에서 ‘보기’가 나오면 머릿속으로 이 문장을 떠올려요. ‘더블 보기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다 보면 버디가 나오고 조금씩 풀려요.
첫 홀에서 보기 나오면 안좋은 스타트라고들 하는데, 저는 ‘첫 보기는 살림 밑천’으로 생각해요. 버디로 시작한 게임이 방심해서 잘못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오히려 첫 보기는 리듬만 잘 타면 금방 회복되고 결과도 좋죠.”
-리듬을 타는 게 중요하군요!
“그럼요. 노래도 리듬이 있어야 살잖아요. 골프도 세게 쳤다, 살살 쳤다, 다양하게 쳐야 공에도 흥이 붙어요.”
-최경주 프로의 삶도 참으로 리드미컬합니다. 농사 짓고 고기 잡던 완도 소년이 갑자기 골프라니요... 그 시절에 시골 고등학교에 골프부가 잠깐 생겼다가 없어진 사연은 최경주를 골프 선수로 만들기 위한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하. 지금도 완도에는 컨트리클럽이 없어요. 연습장은 있어도 골프장은 없죠. 80년대는 프로 야구가 흥했던 시절이라,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 아이들이랑 야구에 빠져 살았어요.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방망이나 공도 없이, 뒷산에서 나무 잘라다 테니스 공을 쳤단 말이죠. 운동 감각이 있으니 부락 끼리 시합하면 제가 늘 4번 타자였어요. 그런데 선장이 되려고 들어간 수산고등학교에 골프부가 생기면서 갑자기 골프공을 맞닥뜨린 거죠.”
새하얀 골프공이 저 멀리 날아가던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처음 친 공의 비거리가 무려 140m였다죠?
“네. 7번 아이언으로 쳤는데 멀리 날아갔어요. 야구할 때 홈런과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어요. 테니스공은 천천히 날아가요. 골프공은 빨리 가면서도 뒤를 보며 ‘날 잡아봐’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시간이 아득하게 길게 느껴졌어요. 날아가는 골프공을 보면서, 저도 제 인생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종일 골프공만 쌓아두고 치고 싶더라고 했다.
-그 골프공이 완도에서 서울로 날아가고,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날아가고,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날아가면서 최경주를 리드해 간 거로군요!
“그렇죠!”
-개척자 기질은 누구에게 물려받았습니까?
“역시나 아버지죠. 아버지는 농부이고 어부였어요. 저는 큰아들이라 곁에서 농삿일과 뱃일을 거들었어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남들 안가는 곳에 큰 물고기가 있다.’ 바다엔 니 거 내 거 없으니, 부지런한 놈이 임자라고요.
먼저 나가 푯대 꽂고 그물 친 놈이 장땡이었어요. 그래서 남들이 바람분다고 안 나갈 때 저를 데리고 바다에 나가셨어요. 아버지하고 함께 더 멀리 더 깊게 가보면서 점점 배포가 커졌어요. ‘죽을 것 같아도 죽지는 않는구나. 해보면 되는구나.’”
그런 경험에 비하면 ‘서울 가서 골프해보자’ 훨씬 쉬운 결정이었다고 했다. 골프에 미친 17살 소년은 소 판 돈으로 선생님들 양복을 해드린 후, 다니던 완도의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서울 가서 비싸게 팔리고 싶었다’고 했다. 63빌딩도 눈뜨고 지나가면 돈 내는 줄 알던 촌놈이, 그렇게 2000년 미국 PGA 투어 한국인 1호 골퍼가 됐다.
데뷔 초기엔 말도 지리도 서툴러 지도 한 장 들고 대회가 열리는 골프장 찾아가는 일이 가장 힘겨웠다던 그가 이제는 KJ CHOI로 우뚝 서서 미국의 산과 바다를 누비고 있다.
-동양인에 키도 크지 않은 당신이 어떻게 그 백인 중심의 치열한 전쟁터에서 자기 기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요.
“억울하고 화가 나도 저는 그 분풀이를 다 공에 했어요. 하하. 그리고 필드에서는 저 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악수할 때 상대의 손을 꽉 잡는 거예요. 뼈가 아플 정도로요.”
-아! 시작은 역시 ‘그립’이군요!
“네. 그러면 상대가 놀라서 쳐다봐요. 그때 찌르는 눈빛으로 보면 아예 저한테 말을 안 시킵니다. “영어 할 수 있냐?”고 물으면 저는 되묻죠. “너는 한국어 할 수 있냐?” 멘붕 오는 건 그쪽이에요(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기자들이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영어로 좀 설명해 달라고 해서 제가 도리어 한국말을 가르쳤어요. “바람이 어땠나요?” 이렇게 한국말로 물어보라고. 미국 기자가 그 말을 계속 못 외워서 제가 호통도 쳤죠. 너희들도 못하면서 나한테 영어 못한다고 타박하지 말라고요. 하하. 지금은 다들 이해하죠.”
최경주의 기세에 PGA는 점차 한국 선수들을 위한 전문 직원을 뽑고 통역을 뽑았다. 지금 PGA에서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눈부시고, 국제 대회 개최국으로 한국 골프 산업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젊은 선수들에 비해 지금 자신의 피지컬은 어느 정도라고 느낍니까?
“역도하던 시절의 피지컬은 안돼죠. 하지만 필요한 힘을 더 정확하게 쓸 수 있어요. 순간적인 힘, 그 힘의 분배에 대해선 자신이 있달까요. 스매쉬 팩터(Smash Factor)라고, 클럽헤드 스피드를 볼 스피드로 얼마나 잘 만들어내느냐를 측정하는 수치가있어요. 헤드에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스매쉬 팩터가 안 나와서 비거리가 짧은데, 저는 퍼펙트하게 맞아요.”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2004년 마스터즈 경기죠. 12번 홀에서 이글을 했고 KJ라는 이름을 한 방에 알렸습니다.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거침없이 왔어요.”
-30년 넘도록 골프를 쳐보니, 그 매력이 뭔가요?
“매일 매일 다르다는 거죠. 아침 다르고 오후 다르고, 어제 오늘 내일이 달라요.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적응할 뿐이죠. 그게 재밌어요.”
-매일이 다르면 콘트롤하기 힘들텐데요.
“인생이 그렇잖아요. 변화무쌍한 환경 앞에서 늘 미완성이죠.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모든 인간은 도전을 좋아해요. 그 과정에서 성공과 성취의 색깔이 달라지니까요.”
-어떤 날씨를 좋아하나요?
“비가 내리면 비 사이로 치고 바람이 불면 안 부는 대로 쳐요.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성취감이 있어요.”
-어떤 상대와 치고 싶은가요?
“빨리 치는 사람이요(웃음). 필드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마… 꾸준하고 의리가 있는 분들이죠.”
-루틴은 어떻게 활용합니까?
“똑같은 동작이 루틴이에요. ‘내가 친 공을 내 몸이 알고 있다’는 그 감각이 루틴이 돼요. 중압감이 올 땐 몸에 새겨놓은 루틴에 의지해서 치거든요. 생활 루틴은 계속 만들고 있어요. 최근에는 밤 8시에서 11시 사이에 성경을 필사합니다. 긴 시간 쓰고 나면 팔과 손목이 뻐근한데, 연습실에만 가면 말짱하니 신기하죠.”
-홀과 홀 사이에서 성경 구절을 꺼내 읽으시더군요.
“은혜가 되는 말씀을 찾죠. 때로는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구를 낳고… 성경에서 굉장히 지루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요. 생략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 고통과 기쁨과 환란이 다 있잖아요. 결국은 복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끝맺습니다.”
-때로는 인생의 룰이 나한테만 불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필드에서는 어떤가요?
“골프는 스스로가 심판이 될 때가 많아요. 공이 처박힐 때는 손대고 싶은 유혹도 들죠. 하지만 저는 단 한 차례도 공에 손을 댄 적이 없어요. 오히려 자진 신고해서 억울하게 벌타도 받았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 어느 입을 통해서든 밝혀지게 돼 있어요. 작은 것에 흠집 내면 큰 것을 잃습니다.”
-골프 룰은 공평하다고 생각하나요?
“지켜야 하니 지키는 거예요. 그거 자체가 훈련이죠. 부정적 요소를 따지기보다 모든 선수가 지키면서 엔조이하는 게 현명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치게 될까요?
“그럼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이 걷기와 골프예요. 장수하려면 골프해야 해요(웃음). 골프를 하면 인생을 더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립, 스윙, 퍼팅, 벙커샷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립인가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최전방의 접촉이 잘못되어 있으면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요. 클럽이 몸으로 도달하는 게 그립이에요. 그립을 잘 잡고 쳤을 때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요. 그걸 몸에 새기고, 그 원리로 티샷도 벙커샷도 어프로치도 퍼팅도 해내는 거죠. 숏게임이나 벙커는 소홀히 하고 퍼터만 백날 잘 한다고 스코어가 좋아지지 않아요. 교과서처럼, 골고루, 균형 있게 운용해야죠.”
-마지막으로 최경주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믿음이 있는 사람, 믿음을 주는 사람 그리고 끝이 좋은 사람이요.”
필드에 나갈 때 최경주는 스스로 골프가 된다. 몸을 돌려 궤도를 그리는 막대가 되고, 상공을 날아오르는 공이 되고, 구르는 땅이 되었다가, 미소 짓는 관중이 된다. 바람 불어도 해가 뜨거워도, 잘 나가던 공이 홀 앞에 멈춰서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렇게 골프는 그 날의 날씨, 그날의 친구, 그날의 운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출렁이는 독특한 공의 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