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삼청동의 가을은 평화로웠다. 가을빛에 광합성을 하러 나온 몇몇 산책자들이 한가로이 골목길을 어슬렁거렸고, 한옥집 창가에서 사진 촬영을 하던 강금실을 보고 놀라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머리 위로 서까래가 단정한 ‘지구와사람(생태 문명을 연구하는 지식공동체)’ 한옥 사무실에서 강금실을 만났다. ‘지구를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출간한 직후였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그는 표표한 눈빛으로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터스텔라’는 어떤 의미인지, 왜 앞선 인터뷰들이 회자되는지.
일말의 호의나 적의는 절제한 채, 오로지 자신의 신체적 감각과 탐문으로만 상대를 조금씩 느껴보고자 하는 신중한 응대. 나를 믿거나 혹은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느껴보고자 하는 인터뷰이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나이와 주소를 묻는 사실 확인절차처럼 담담했으나, 타인에게 먼저 물음표를 권하는 행위에서 평등한 대화의 의지가 느껴졌다.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미간에 햇빛이 고였고, 웃음기 가신 낮고 얇은 음색이 가슴에 닿아 섬세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소근소근 부드럽고 차갑게.
-입술을 아주 조금씩 움직여서 말씀하시네요. 표정을 풍부하게 쓰지 않는 건 직업적 특성이겠지요?
“그런가요? 제 성격이 따뜻하지는 않아요. 차갑지만 솔직하죠. 포카페이스도 안되는 얼굴이고요.”
-포카페이스가 안되면 법률가나 정치가로 살기에 불편하셨을텐데요.
“불편하죠. 그런 의미에서 능력 있는 법조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색한 자기 평가와는 달리, 그는 24살에 사법 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됐고, 2003년 대한민국 첫 여성 법무부장관이 됐다. 2006년 서울 시장 첫 여성 후보,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났다.
법과 정치의 최전선에서 일하면서 ‘권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왜 그토록 한결같이 수직적이고 권위적이고 억압적인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생태와 영성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쓰시는 언어가 매우 사유적이고 포용적입니다. 저는 그동안 법률가의 언어는 제한된 시간에 ‘진실과 거짓’의 거리를 단축시키려는, 일면 ‘추궁의 언어’라고 느꼈는데요?
“오류가 나지 않으면서 논리의 정합성을 갖춰야하니까요. 법전은 비논리를 허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기본 문제를 명료하게 전달하려고 하죠. 인문학적인 문장과는 달라요.”
-오차 범위를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수학적인 문장인가요?
“아니요. 수학적 문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케이스가 다 관계의 갈등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논리적 적용을 위해 ‘사실이 뭐야?’를 따집니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는 이해력이 중요해요. 복잡한 사건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적용할 지. 드레퓌스 사건처럼, 유죄와 무죄의 경계에 있는 ‘유죄같은 사건’으로 무죄 다툼을 벌일 때 가장 흥미롭습니다.”
-법정이 아닌 법무부에 있을 때는 어땠습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샘플로 팩트를 어떻게 보느냐를 연구했지요. ‘라쇼몽’을 여러 번 보고 검사들에게도 권했어요.”
-검사들이 ‘라쇼몽’에서 뭘 배울 수 있나요?
“’증인마다 진술이 다르고, 진실이 복합적일 때 팩트를 어떻게 고정시키느냐’는 쉽지 않아요. 수사의 목적은 범인을 잡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진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면 안돼죠. 근대법에서 민법은 재산 관련이 많고, 형법은 신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죄형법정주의를 추구해요.
하지만 수사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게 우선입니다. 범인 잡는데 수사를 주력하면 오류가 생겨요. 검찰 경찰 수사권 정상화를 이야기하지만,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언론과 공동 수사를 하는 상황이라,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만만치 않죠.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사법제도의 본질은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진실 없이 평가가 이뤄지면, 사법제도가 흔들려요.”
생각해보면 법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추정의 원리로 설명한다. 갈등이 첨예할 때조차 단정이 아닌 추정의 태도로, 유죄추정이 아닌 ‘무죄추정의 원칙’을 견지해야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고, 강금실은 고요하게 설명했다. 알고보면 법을 다루는 사람이 매정할 뿐, 법전 자체는 얼마나 신중하고 슬기로운가.
전직법무부 장관이 내게 법에 관심이 많은 지 물었다.
-법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포용력 있고 정확한 문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명확성을 목표로 심오한 논증이 펼쳐질 때, 판결문은 종종 문학적 경지에 이르더군요. 가령 울지 판사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선정성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그의 현장은 켈트적이요 그의 계절은 봄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고도 했거든요.
“(미소 지으며)판사들이 깊이 고민하면 논리정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오죠.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사건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10건의 판결문을 써야할 때도 있어요. 하이퀄리티를 내기 쉽지 않아요(웃음).”
-이번에 쓰신 책 ‘지구를 위한 변론’은 변론문이었지만, 그 시야가 너르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지구의 변호사로서 어떤 언어, 어떤 문체를 쓰려고 했습니까?
“문체를 고려하기 보다는 사실을 잘 전달하기 위해 애썼어요. 지구법학은 미래적이고 이상향을 담은 이야기예요. 하늘과 바람, 나무와 강에 권리를 부여하는. 일종의 소명이지요.”
문명사상가 토마스 베리가 창안한 지구법학은 자연에게 법적 주체의 권리를 부여하는 학문이다. 2001년 최초의 지구법학 컨퍼런스가 개최된 이후, 자연에 법적 지위를 부여한 사례가 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를 비롯해 미국 36곳의 지방 조례는 자연의 법인격을 인정했고, 뉴질랜드는 왕거누이 강의 후견인으로 마오리 공동체를 지정했다. 인도는 갠지즈 강과 히말라야 산맥 빙하에도 법인격을 부여한 판결을 내렸다.
최종목적지는 법이지만, 그 율법 아래서 강금실은 우주적 시공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풀어냈다.
-우주의 상징 중 하나로 ‘생명의 나무’를 거론하셨는데, 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연결해서 생각했나요?
“성경의 생명나무는 아니에요. 하지만 선악과와 생명나무라는 두 개의 줄기를 머릿속에 그려봤어요. 한나 아렌트의 ‘의지와 사유’라는 책을 보고 ‘의지는 생명나무’로 ‘사유는 선악과’로 연결시켰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잖아요. 이후 인간 생명에 대한 의지적 삶이 과도해지면서 ‘선악을 성찰하는’ 능력이 약해졌습니다.
오로지 욕망으로 자연을 지배했지요. 산업문명을 이뤄냈지만, 결국 지금같은 생태 위기를 맞았어요. 기업들은 당장은 유행처럼 ESG를 부르짖지만, 지금의 ESG 대응 방식은 경제성장시대의 포맷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생태 가치로의 전환을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ESG는 환경을 인풋으로 집어넣고 아웃풋 뽑아내는 붕어빵 기계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해법이 있습니까?
“GNP중심의 성장 지표가 아닌 생물다양성 지표 같은 새로운 지수 개발과 측정이 시급하죠. 궁극적으로 생명나무의 꼭대기로 가려는 의지적 욕망을 줄이고 반성적 사유를 시작해야합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예로 이야기 하시니 문득 이런 추론을 해봅니다. 성경에서 신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추측컨데 ‘선악’은 그 넓고 깊은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식별이 가능한데, 인간의 시공간 인식 능력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니, 판단이 불가하죠.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고, 죄의 몸으로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에서 영원히 사는 고통을 당하지 말라고, 인간에게 추방령이 내려진 거죠. 그 뒤로 유한한 인간 세상에서 법률가는 ‘선악과’를, 과학자와 의사는 ‘생명나무’를 지키고 담당하게 된 것이 아닐른지요?
“(미소지으며)역사 속에서 선악을 식별하려던 인간의 노력은 다 실패했습니다.”
-아... 법관도 ‘선악과’를 못지켰다고 생각합니까?
“법으로 합의된 규범은 있으나, 내가 합의된 규범이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에도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는 일어났어요. 국가에 의한 집단 학살이 얼마나 많았나요? 선을 행하려는 의도가 악이 되는 순간이 역사에 횡행했습니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직업이 정치인이었어요.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그 자신은 선을 의도한다고 했던 행위의 결과가 악이었죠.”
-핵심이 뭐죠?
“인간이 의도하는 행위가 너무 과해요.”
-’옳다, 그르다’를 의도하는 행위, 의지적 행위가 과하다는 말씀인가요?
“네. 필요한 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반성과 성찰입니다. 하나의 담론이 지배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지와 성찰이 균형을 맞춰야죠.”
-하지만 권력은 하나의 담론을 좋아하죠.
“글쎄요. 저는 보통의 법률가, 정치인들과는 결이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가령 국가보안법 하나만 봐도 간단치 않아요. 찬성, 반대라는 두 갈래 길보다 더 깊이 들여다봐야죠. 독일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함께 나치 전위정당을 위헌으로 볼 것인가가 부딪혀서 딜레마가 생겨요. 명백하고 구체적인 위험의 현존이라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논의가 필요하죠.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역을 한반도 전체로 규정하고 있어요. 남북이 대치상황이지만 정권과 시대 분위기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니,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법의 영역인데 정치적 찬반으로 넘어가는 현상은, 법의 복잡성을 고민할 근본 담론이 생성되지 않아서라고 봐요. 저는 법률가로서 그걸 명료하게 하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그만뒀죠.”
의견의 잘잘못으로 사실 공방이 벌어질 때, ‘서로 요구되는 법치적 절차를 지키고 있는가’를 준거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어디에서 무얼 하건, 항상 본령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공직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건 필연적인 선택이었군요.
“그렇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법관과 법무부 장관이라는 사회적 책임의 정점에서 답을 못찾으면, 내가 원하는 길을 가야죠. 솔직한 선택이었습니다. 2003년 46살에 장관직에 올라서 2008년 51살에 정치에서 떠났어요. 50대에 이르러서야 내적 고민을 붙들 수 있었죠.”
첫 여성 법무부 장관, 첫 여성 서울시장 후보, 첫 여성 로펌 대표… 그렇게 ‘첫 여성’이라는 시대적 짐을 내려놓은 그의 몸은 홀가분해보였다.
-법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요?
“(밝게 웃으며)헤맸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마음껏 방황하면서, 내 삶을 자유롭고 진실하게 대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내적으로 더 많은 위기와 불안을 겪었어요. 큰 역할이 주어진 것도 시대적 과제였지, 내가 잘나서 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판사 생활은 어땠나요?
“판사는 판사답게 살았어요(웃음). 판사들은 대부분 공적인 윤리가 강해서 사회 생활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가 왕을 사칭한 실정법 위반 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읽고 카톨릭 세례를 받으셨다지요. 왜 특히 그 대목에 눈길이 갔습니까?
“성경 이전에는 불경을 읽었어요. 저는 근원적인 질문이 많았어요. 개종의 계기는 사회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는 부패한 종교 권력자도, 열혈 독립운동가도 있었죠. 그들은 예수가 왕을 사칭했다며 내란수괴죄로 메시아를 십자가 형에 처했어요.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파워가 생긴 것도, 인간의 정치적 삶이 투영되어서가 아닐까요?”
-예수는 권력에 대한 기대와 권력이 작동되는 모든 방식을 해체했죠.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소지으며)개인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권력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에, 예수와 성경은 저에게 현실 정치의 맥락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당신이 책에서 말하는 지질 시대의 ‘깊은 시간’과 ‘행성 경계’ 같은 언어도 이 우주에서 ‘인간의 권력’이 작동했던 방식을 해체하는 것 같군요. 하지만 시공간의 좌표를 그토록 넓게 보는 지각 훈련은 빅히스토리에 익숙치 않은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설명하고 싶었어요. 이 생태 위기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지질 시대의 ‘깊은 시간’을 본다는 것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행성 전체의 변화를 상상하는 겁니다. 지질 시대의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은 신생대에 태어나 홀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어요. ‘행성경계’를 정량화하는 작업도 거대한 지적 도전입니다. 지구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위험 한계를 과학적으로 수량화하는 작업이지요.”
-하지만 원시 시대부터 인간의 뇌는 눈 앞에 닥친 당장의 위험을 해결하도록 단기적으로 설계돼 있습니다만.
“그래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학습해야죠. 우리 인간 종이 너무 커져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느껴야죠. 다행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생명 감성이 남다르잖아요. 희망이 있어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세요?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죠. 학자들은 20년 전에 이미 예고했어요. 2020년에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 UN의 보수적 예측으로도 이미 늦었다고도 하죠. 안정된 기후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존재니까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내리라고 봅니다.”
-지금의 코로나 상황을 보면 지구의 생태 전환 능력이 이미 인간의 노력 바깥에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게 바로 가이아 이론입니다. 지구 시스템 자체가 자기조직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실제 위험한 건 지구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지구 생태계는 순환시스템으로 조절되고 있어요. 그 순환 구조 안에서 자원 위기에 처했을 때, 식물이 광합성 창조로 지구를 살려냈죠. 배리 카머너가 1971년에 쓴 책 ‘원은 닫혀야 한다(The Closing Circle)’에 그 순환고리와 함께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옵니다. 그 책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함께, 환경이 정치 사회구조와 연결돼 있다는, 딥 에콜로지 운동의 서막을 열었죠.”
-식물광합성이 지구를 살려냈다는 대목은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맞아요. 지구는 결국 자체적으로 기온 조절을 할 거예요. 그 사이 인간 때문에 멸종하는 생명이 안타까울 뿐. 인간도 자기 서식지를 무리하게 넓혀서, 안 만나도 될 바이러스를 만나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워요.”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한 것은 ‘문화 명령’인데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지배로 성경을 오독하고 있다고 말이 많습니다.
“훌륭한 왕도 백성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지배자라고 하면 피지배자가 있어야죠. 인간이 잘난 건 사실이지만, 성경을 너무 인간중심적으로 읽는 것은 오독이죠.”
인간이 망하면 창피하지 않겠느냐고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창피하다’는 말이 서늘하게 감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의식이 인간’이라는 생각엔 변함 없으신가요?
“비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만 사는 반면, 인간은 처음으로 우주를 바라봤어요. 우주를 쳐다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리플렉션의 존재였죠. 그래서 저는 우주의 자의식을 인간이라고 해요. 생명 있는 행성이 흔치 않은데 지구에 태어나서 양자역학과 빅뱅까지 알아낸 존재가 인간이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에 눈을 뜬 존재죠. 그런 인간이 진화의 정점인 생명나무 꼭대기에 올라 AI를 만들고, 생명과학의 이름으로 유전자에도 메스를 대고 있어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이 모든 의지적 행위를 이제는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행성적 사고로 비인간 존재를 들여다 봐야죠.
인간의 문명과 전쟁사를 들여다보면, 큰 전환의 한가운데는 항상 기후변화와 전염병이 있었어요. 로마, 마야 문명, 중세 흑사병, 남미 정복…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비인간 존재에 정치적 맥락을 부여해서 인간 중심의 사건을 재해석해야 합니다. 비인간존재의 관점에서 인류학, 사회학을 공부하고, 지구법 체계에서 그 권리를 담아내야죠.”
-최근에 저는 이어령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계(피직스), 법계(노모스), 기호계(세미 오시스)’라는 3가지 범주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를 그려보았습니다. 가령 해일을 일으킨 바다에 태형을 때리는 왕, 코로나 바이러스에 사형을 언도하는 법정… 지구법학은 자연에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지만, 그또한 어쩌면 인간중심적 사고체계가 아닐른지요?
“이조 때 진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 사신이 선물한 코끼리가 사람을 죽여서 그 코끼리를 귀양보낸 기록이 있어요. 저는 오히려 그런 어리석음이 법과 자연의 지나친 분리에서 나온 피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리적 사고가 강해 융합이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양자역학이 나왔지 않습니까. 점균류 곰팡이를 연구해서,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자기조직이론을 도출한 일리아 프리고진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을 탐독했어요. 철학과 과학이 서로를 배워서 생명 전체를 유기적 연결로 통찰하는 세계관이 전체론입니다. 그 반대편에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보았던, 기계적 이원론의 데카르트가 있었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선언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이원론은 흑사병 이후 자연을 두려워해서 배제한 인간중심의 사고 체계예요.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을 보면 생명 자체가 기호라는 대목이 있어요. 기호 그 자체가 생명을 이미 사고하고 있다는 거죠. 이렇게 개체의 정신성까지 인정하는 태도가 전체론인데 반해, 이원론은 인간의 합리성을 기준으로 인간 아닌 것과의 분리를 과도하게 밀어붙히고 있는 거죠.”
-그렇게 틀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강 변호사께서는 자연의 권리를 성문화하는 것부터 출발하자는 것이고요.
“그렇죠. 근대국가 사회는 권리가 없으면 보호받지 못해요. 그런데 지금 법체계 안에는 인간만 있죠. 인간이 자기 서식지에서만 살면 문제가 없지만, 자연을 침범하고 황폐화시키니 자연에도 법인격이 필요한 겁니다. 문명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좀더 확장해서 ‘존재가 있는 곳에 권리가 있다’고 했어요. 자연체계 안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서식지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인간의 법이 자연의 권리를 성문화하지 못하면, 자연의 법이 더 큰 역병과 재난으로 인간의 오만을 단죄하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강의 권리, 곤충의 권리, 바다의 권리… 계량과 특정이 어려운 자연의 권리를 법언어로 만들어내는 데는, 어쩌면 명확성이 아니라 서정성이 필요할른지도 모른다.
‘검고 끈끈한 화석이 얼굴을 뒤덮고 눈을 멀게 한 후 인간은 마음을 읽고 진화의 긴 그림자도 잃어버렸다’고 강금실은 책에서 쓰고 있다.
-어쩌면 법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가 더 필요한 세상 같습니다.
“(미소 지으며)시적인 세상을 꿈꿉니다. 시의 세계에서는 나무를 당신이라고 불러요. ‘it’이 아니라 너와 나의 세계죠. 은유를 통해서만이 생명이 파악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나의 같은 걸 발견하는 게 시죠. 그런데 우리가 같다는 걸 발견하기가 어려워요.”
인간의 눈이 숲과 바다와 하늘로 열려야 하는데 다들 스마트폰과 넷플릭스만 보고 있다고 그가 웃었다.
-법의 중심에서 생명을 외치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글쎄요. 점점 과학 쪽을 더 즐겁게 파고 있어요. 우리가 우주 전체의 전모를 알고 충돌하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우주를 너무 잘라서 쓰지는 못할 거예요.”
-우주의 전모를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알려고 노력하는 거죠.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
-법무부장관 직을 그만둘 때 ‘너무 즐거워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어요. 임용될 때만큼 그만둘 때도 파격이었습니다.
“기억나요. 지금보다 경험도 부족하고 철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지금 가면 더 노력해서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웃음).”
-법조인으로서의 삶은 자랑스러운가요?
“경력에 비해 여성이라는 점이 좀 독특하고 과하게 평가됐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게 더 많습니다. 법학적인 가치관도 분명하지 않았고요. 지구법학으로 더 노력해야죠.”
-재임 당시 호주제를 철폐했는데요?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당시 지은희 장관과 함께 해낸 일이지요.”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선 보탤 말이 있으신지요?
“논쟁을 깊게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더 많이 준비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2남 4녀 중 막내지만, 70~80년대 태어난 여성은 저와는 다른 교육을 받았어요. 차별에 민감하죠. 2003년 무렵부터 그 여성들이 전문직으로 진출했고, 사법부, 검찰, 언론사 등 조직에 여성 인력이 늘어났어요. 10년 전에 이미 여성 검사가 40%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조직에선 여전히 야근, 술자리 관행이 이어지면서 사고가 났어요.
변화의 조짐을 알아채고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하는데 ‘여자는 골치아프다’는 식으로 덮었죠. 돌출되던 문제가 2018년에 ‘미투’로 폭발했고요. 안타깝지만 다보스 포럼 등의 여성지수를 보면 우리는 후퇴하고 있어요. 노동 시장의 임금 격차,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의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벌어진 격차를 젊은 세대는 심각하게 느껴요. 생명과 인권 문제는 항상 여성과 청소년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니까요.”
-20년 앞서 권력지향적인 남성 중심 조직을 관통해온 소감은 어떤가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법무부 장관에서 서울 시장 후보로 이어지는 커리어의 의미를... 당시엔 잘 이해 못했어요. 그리고 어느순간 미흡한 부분을 채우고 싶은 저의 갈망을 선택했죠. 이제 60살이 넘었고, 오랫동안 정치를 안하니 그런 제 모습이 이해받는 것 같습니다.”
-권력 욕심이 정말 없으신가요?
“경험을 통해 제가 알게 된 건 권력은 책임지고 기여하는 거라는 거죠. 저는 억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자연스럽게 살아요. 마음이 편해진 건 잘 살고 있다는 거잖아요.”
-마음이 편하시다니 정말 부럽군요! 공적인 자아와 사적인 자아가 균형을 이룬 듯 보입니다.
“나를 잘 펴고 살면 돼요. 잘 안피고 사니 불편하죠. 살아 보니 마음 편한 게 제일 중요해요.”
-뭘 할 때 즐거우세요?
“침대에서 TV볼 때 즐거워요. 요즘은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을 봅니다. 저는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걸 좋아해요. 수사물이나 추리극 그리고 생태학과 지구 이야기를 좋아하죠. 장르의 취향이 명료합니다. 드라마는 안봐요. 인간 갈등에는 흥미를 못느껴서 사극이나 역사 소설도 보지 않아요(웃음).”
-어떤 인간을 좋아합니까?
“‘진리와 정치’ ‘악의 평범성’을 탐구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제 성향과 잘 맞아요. 성격적으로는 친절하고 밝고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일관되게 자기 답게 살아왔습니까?
“자기를 드러내는 생명감각은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잘 찾아왔어요. 나와 갈등이 생기고 억압적일 때도 있었지만, 나라는 줄을 잃어버린 적은 없어요.”
-지구의 변호사로 마지막 변론을 부탁합니다.
“저는 10대들의 감수성에서 지구의 희망을 봅니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권력을 결합한 중앙집권적 파워 아래 숨죽이고 살았지만, 젊은이들은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살지요. 자기만의 서사와 맥락을 분출하면서요. 지구의 모든 존재가 이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멋진가요!
바라건대 지구를 느껴보세요. 아이가 열이 2도만 올라도 응급실로 안고 뛰어가죠. 지구도 열이 나면 아픕니다. 지구를 생명으로 감각해보세요. 과학의 힘으로 우주까지 나아간 존재가 기후 위기를 막지 못해 망한다면 얼마나 창피합니까!”
우주적 겸손이라는 말로, 강금실의 생태 오딧세이가 막을 내렸다. 인간은 얼마나 큰 존재인가. 동시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 ‘사이’의 균형 감각을 배우며 우리는 지질 시대를 살아간다. 권력의 지층을 통과한 강금실이, 이토록 진취적인 반성문을 써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