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시각) 유럽 최대 항만이 있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남동쪽으로 차로 20분 남짓 달려 도착한 리더케르크의 렘브란트베흐(Rembrandtweg). LG전자가 공기열원 히트펌프 '써마브이(Therma V)'와 지난해 인수한 노르웨이 OSO의 스테인리스 버퍼탱크를 처음으로 하나의 패키지로 공급하는 공동주택 건설 현장이다. 현지 사회주택 사업자 운콤파스(Wooncompas)는 기존 94가구의 지상부를 철거하고 기초·지하 구조물은 재사용해 4개 동, 102가구의 사회임대주택을 짓고 있다. 국내에서도 익숙한 62㎡(약 19평)와 68㎡(약 21평)의 방 3개짜리 아파트형 사회임대주택이 들어선다.
4개 동의 건설 단계는 각기 달랐다. 철제 비계와 파란색 안전망 안쪽으로 노란색 구조재가 노출된 동이 있는가 하면, 옆 건물은 목재 외벽과 창호 공정을 상당 부분 마친 상태였다. 공정이 앞선 동에서는 냉난방 설비 설치도 먼저 진행됐다.
이 동의 옥상에는 LG 로고를 단 흰색 실외기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줄지어 섰다. 겉모습만 보면 국내 아파트나 상가에서 흔히 접하는 에어컨 실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옥상의 써마브이 실외기는 실내 유닛과 연결돼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에어컨 역할은 물론 난방과 온수까지 책임진다. 국내에서는 주거용 히트펌프가 단독주택 마당이나 외벽에 놓이는 식으로 도입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전기·수도처럼 집을 지을 때부터 아파트에 냉난방 설비를 짜 넣는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히트펌프는 에어컨처럼 냉매와 압축기를 이용해 열을 옮기는 설비다. 에어컨이 실내 열을 밖으로 빼낸다면 난방할 때는 반대로 외부 공기에서 열을 가져와 물을 데운다. 냉매 흐름을 바꾸면 여름에는 냉방도 가능하다.
LG전자가 이곳에 공급하는 써마브이는 옥상의 실외기와 가구별 실내 유닛, 스테인리스 버퍼탱크로 구성된다. 실외기가 외부 공기에서 열을 끌어오면 실내 유닛이 이를 냉난방과 온수에 활용하고, 버퍼탱크는 난방수를 저장해 순환을 안정시킨다. 가스보일러를 대신하면서 냉방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어 탈탄소 전환과 여름철 기온 상승이 동시에 진행되는 유럽에서 수요가 커지고 있다.
◇ 단독주택 설비에서 아파트 '빌트인'으로
노숙희 LG전자 베네룩스법인장(상무)은 "한국에서는 이런 형태로 주거용 히트펌프가 공동주택에 들어가는 모습을 접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베네룩스법인은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3개국 사업을 맡는다.
써마브이에는 LG전자의 고효율 인버터 스크롤 컴프레서가 적용됐다. 이를 통해 소비 전력 대비 약 4~5배의 열에너지를 만들고, 기존 화석연료 보일러보다 에너지 사용을 약 40~60% 줄일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영하 15도에서도 난방이 가능하다. LG전자는 리더케르크 102가구 외에도 에인트호번 157가구 등 네덜란드에서 250가구가 넘는 공동주택용 히트펌프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한 동에 사는 모든 가구의 실외기가 같은 옥상에 모이면 소음과 진동이 발생할 수 있다. 클라우스 리더는 "1m 거리에서 소음이 44㏈(A) 수준이라 소음 문제가 중요한 밀집 주거지역에도 적합하다"며 "실외기 아래에는 진동을 줄이는 받침도 만들어 주거 공간에 맞춰 설치했다"고 말했다.
◇ OSO '물탱크'까지 묶었다… 설치·AS도 한 곳에서
렘브란트베흐 사회임대주택에 써마브이와 함께 들어가는 버퍼탱크는 LG전자가 지난해 인수한 노르웨이 온수 솔루션 업체 OSO가 공급한다. 난방수를 일정량 저장해 순환을 안정시키는 '완충 장치'로, 난방 수요가 달라질 때 히트펌프가 짧은 간격으로 켜졌다 꺼지는 현상을 줄여 압축기 등의 부담을 낮춘다.
1932년 설립된 OSO는 스테인리스 열저장 탱크와 전기온수기 등을 만드는 업체다. LG전자는 지난해 지분 100%를 인수해 히트펌프에 온수·열저장 설비를 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김 팀장은 "써마브이와 OSO 버퍼탱크를 패키지로 공급해 왔지만, 신축 공동주택에 100대 이상 규모로 대형 공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히트펌프와 탱크를 패키지로 묶으면 발주와 사후관리도 단순해진다. 기존에는 건설사나 설치업체가 서로 다른 제조사의 제품을 구입한 뒤 용량과 배관, 제어 방식을 맞춰야 했다. 김성빈 LG전자 베네룩스법인 팀장은 "히트펌프는 LG전자 제품인데 탱크가 다른 브랜드라면 설치업체가 여러 곳에 연락하고 어느 쪽 귀책인지 따지는 경우가 생긴다"며 "이번에는 패키지 전체를 일괄적으로 보증할 수 있어 설치와 사후관리 측면에서도 고객이 편해진다"고 말했다.
◇ '탈가스'에 폭염까지… 유럽 히트펌프 시장 반등
네덜란드는 히트펌프 업체에 '기회의 장'이다. 신축 건물에서 가스 사용을 사실상 제한하는 '탈가스' 정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2018년 7월 에너지전환법(VET)을 시행하면서 중대한 공익상 이유가 있는 예외를 제외하면 새 건물을 가스망에 연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가스보일러가 빠진 자리를 히트펌프나 지역난방 등이 채운다.
2019년 기후협약에서는 약 700만가구와 100만개 건물을 2050년까지 지속가능한 난방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개인의 히트펌프 설치비 일부를 지원하고 고효율 설비에 투자한 기업에는 세제 혜택도 준다. 렘브란트베흐의 102가구 역시 태양광 패널과 히트펌프를 적용해 가스를 쓰지 않도록 설계됐다.
유럽 전체 수요도 다시 늘고 있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에 따르면 2025년 주요 16개국의 주거용 히트펌프 판매량은 약 262만대로 전년보다 10.3% 증가했다. 여기에 더위가 새로운 수요를 만들고 있다. 유럽연합(EU) 가정의 냉방용 에너지 소비는 2018년 4만500테라줄(TJ)에서 2024년 8만400TJ로 6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됐다.
히트펌프는 LG전자에서 냉난방공조(HVAC)를 담당하는 에코솔루션(ES)사업본부의 핵심 성장 사업이다. LG전자는 가정용 에어컨·히트펌프부터 상업용 시스템에어컨, 데이터센터용 칠러까지 한 조직에서 맡아 2030년 HVAC 매출 20조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스페인 등 남유럽 5개국 10만가구 이상에 가정용 히트펌프를 공급했다. LG전자는 시장 성장에 따른 설치인력 부족에 대응해 현지 'LG 아카데미'를 10년 넘게 운영하며 1만명 이상의 설치기사를 무료로 교육·인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