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가전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두고 기술력 대결을 벌인다. 중국 기업들이 로봇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한국 기업들은 인공지능(AI)이 가정 내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 AI 시대에 맞춰 유럽 최대 기술 전시회도 변화하고 있다.
4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베를린 국제가전박람회(IFA) 2026'이 개막했다. 8일까지 메세 베를린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49개국 1900개가 넘는 브랜드가 참가한다. 홈페이지에 등록된 중국 참가 업체는 932곳으로 작년 691곳보다 241곳(34.9%) 늘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한국은 79개 기업·기관으로, 1년 전 106곳에서 27곳(25.5%) 줄었다.
IFA는 1924년 베를린에서 라디오 박람회로 시작해 TV·가전·전자제품을 아우르는 행사로 성장했다. 미국 소비자가전전시회(CES), 스페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와 함께 세계 3대 기술 전시회로 꼽힌다. 세계 각국의 유통사와 구매자가 한자리에 모여 거래·조달 상담을 진행해 유럽 시장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올해 주제는 '미래는 지금(The Future Is Now)'이다. AI를 별도 제품군이 아니라 전시 전반에 깔리는 기반 기술로 다룬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IFA 2026을 주최하는 IFA 매니지먼트는 AI가 이미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컴퓨터·스마트홈·웰니스·로봇·인터페이스는 물론 사업 모델까지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램도 ▲AI의 세계와 미래 기술 ▲유통과 미래 상거래 ▲마케팅과 창의성 ▲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스마트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 등 5개 축으로 구성했다.
◇ 역대 최대 휴머노이드 전시… 中 로봇 기업 25홀 집결
참가 기업 역시 AI를 제품 하나의 기능으로 보여주는 데서 벗어났다. 중국과 한국 모두 가전·모바일·플랫폼을 서로 연결하고, 기술이 사용자의 요구를 이해해 직접 행동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다만 힘을 실은 곳에는 차이가 있다. 중국 업체들이 휴머노이드와 각종 서비스 로봇을 앞세워 AI가 물리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강조했다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미 집 안에 자리 잡은 기기와 서비스를 묶어 일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 무게를 뒀다.
미래 기술 전시관 'IFA 넥스트'에는 약 300개 업체가 참여한다. 작년 260곳보다 약 15% 증가한 규모다. IFA 측은 올해 역대 가장 많은 휴머노이드가 나온다고 밝혔다. 주요 참가사에는 ▲유니트리(Unitree) ▲매직랩(MagicLab) ▲딥로보틱스(DEEP Robotics) ▲애지봇(AGIBOT) ▲푸두로보틱스(Pudu Robotics) 등이 포함됐으며 상당수가 중국 기업이다.
로봇을 직접 움직여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늘었다. 5일 열리는 '로봇 온 더 런웨이(Robots on the Runway)'에는 ▲엔진AI ▲도봇 ▲딥로보틱스 ▲애지봇 ▲유니트리 ▲아이모가 등이 참여한다. 이들이 개발한 휴머노이드와 사족보행 로봇이 무대에 올라 걷고 춤추거나 뒤로 공중제비를 도는 등 동작을 시연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연구진의 자율주행 로봇이 축구 경기를 펼치는 로보컵도 행사 기간 진행된다.
이들 업체의 전시 부스도 로봇의 실제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유니트리는 휴머노이드 'G1'과 사족보행 로봇 'GO2'·'B2-W'를 내놓는다. 딥로보틱스는 산업 현장용 사족보행 제품 '링스 M20S(Lynx M20S)'를 선보이며 전력 설비 점검·재난 구조·보안 순찰 등의 적용 사례를 강조한다. 매직랩은 휴머노이드 '매직봇'과 사족보행 '매직독'을 배치하고, 엔진AI와 애지봇도 별도 공간에서 범용 휴머노이드 기술을 소개한다.
로보락은 IFA에서 로봇청소기뿐 아니라 수영장 청소기와 잔디깎이 로봇 등을 공개한다. 에코백스 역시 가정용 청소기에서 출발해 여러 생활 영역으로 로봇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 AI로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스스로 이동하는 기술을 집 안팎으로 넓히는 것이다.
◇ '움직이는 AI' 전면에 배치한 中
중국 가전 기업들은 전시장 전면에 '로봇'을 배치해 기술력을 뽐냈지만, 최근 시장의 최대 격전지로 부상한 AI홈 전략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TCL은 'AI가 영감을 주는 삶(AI Inspired Life)'을 주제로 TV와 모바일 기기, 에어컨, 세탁기 등을 하나로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 전체를 기술 생태계로 구성한 '넥스트홈(NXTHOME)'도 내놓는다. 가족용 AI 동반로봇 '에이미(AiMe)' 역시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하이센스는 이번 전시에서 로봇 자체보다 AI홈에 무게를 뒀다. 차세대 운영체제 'V AIOS'가 사람과 기기, 주변 환경을 인식한 뒤 의도를 이해하고 필요한 서비스까지 실행하도록 설계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 'AI 컴패니언 스위트(AI Companion Suite)'는 ▲요리 ▲세탁 ▲공기·에너지 관리 영역에서 TV와 생활가전을 연동한다.
IFA에 처음 참가한 샤오미는 3300㎡(약 1000평)가 넘는 공간에 약 380종을 배치하고 스마트폰과 가전, 전기차를 '사람×자동차×집(Human × Car × Home)'으로 연결했다. 전시장에 배치한 휴머노이드 '사이버원(CyberOne)'은 단순 시연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전기차 공장에서 제조 작업을 바탕으로 성능을 시험하고 있다.
◇ '집 안에 스며드는 AI' 보여준 韓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로봇과 AI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IFA에서 힘을 준 지점은 로봇 자체의 운동 능력보다 집 안에 흩어진 기기와 서비스를 하나로 묶어 사람의 생활을 돕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메세 베를린을 벗어나 도심의 훔볼트 카레에 별도 전시장을 마련했다. '당신의 AI 일상 동반자(Your Companion to AI Living)'를 주제로 6일까지 운영되는 전시장은 ▲엔터테인먼트 ▲홈 ▲셀프케어 등 세 공간으로 구성됐다. TV와 생활가전, 갤럭시 기기를 연결해 여가와 건강관리, 에너지 절약 등에서 사용자별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AI가 일상에서 직접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을 보여주는 데 전시 초점을 맞췄다.
LG전자는 메세 베를린에 3745㎡(약 1133평) 규모의 공간을 마련하고 약 150개 핵심 제품을 선보인다. 차세대 AI홈 허브 '씽큐 온(ThinQ ON)'에는 새 에이전트 '씽큐 클로(ThinQ Claw)'가 핵심이다. 이용자의 생활 패턴과 상황을 파악한 뒤 필요한 기능을 먼저 제안·실행하고, 채팅을 통한 가전 제어부터 웹 검색·캘린더 등 외부 서비스까지 연계한다.
스마트홈 플랫폼 기업 앳홈(Athom)의 '호미(Homey)'를 활용한 홈 에너지 관리 시스템(HEMS)은 가전과 조명,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전력 흐름을 한데 묶는다. 가정에서 구축한 관리 기술은 '씽큐 프로(ThinQ Pro)'를 통해 빌딩·오피스의 냉난방공조(HVAC)와 각종 설비까지 범위를 넓힌다. 개별 제품에 AI 기능을 추가하는 수준에서 집 전체가 이용자의 생활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LG전자도 홈로봇 'LG 클로이드(LG CLOiD)'를 전면부에 배치한다. 클로이드가 생활가전과 TV, 공조제품을 지휘하며 각종 기기·공간·서비스를 조율하는 'LG AI 오케스트라'를 통해 가사 노동을 줄이는 '제로 레이버 홈(Zero Labor Home)'의 미래를 보여준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AI가 현실 세계에서 직접 움직이는 능력을 집중적으로 뽐냈다면, 삼성전자나 LG전자는 같은 기술을 집 안 생태계에 어떤 방식으로 편입할지를 제시한 것"이라며 "양국 기업 모두 AI를 화면 속 챗봇이나 가전의 부가 기능에서 꺼내 현실의 행동과 서비스로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프 린트너 IFA 매니지먼트 최고경영자(CEO)는 "미래는 더 이상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지금"이라며 "하지만 기술만으로 진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술을 이해하고 직접 경험하며 그 변화를 함께 만들어갈 때 비로소 잠재력이 온전히 발휘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IFA는 혁신을 직접 체감하게 하고, 기술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는 시기에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