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방송사들이 인공지능(AI)으로 더빙이나 자막만 손봐 신작(F/W·First Window)으로 편성하는 편법에 제동을 걸었다.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값싼 AI 재가공물을 신작인 척 편성해 채널 평가 점수를 올리는 시도를 걸러내기로 했다.
3일 유료 방송 업계에 따르면, KT(지니TV), SK브로드밴드(Btv), LG유플러스(U+tv) 등 인터넷TV(IPTV) 사업자와 케이블TV 사업자, 위성방송 사업자는 올해부터 PP 평가를 진행할 때 AI 슬롭(slop·저품질 콘텐츠)을 일부 규제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이 적용하는 '2026 PP 평가 기준 세부사항'에는 "생성형 AI 등을 활용해 조악한 더빙이나 자막을 붙여 부자연스럽거나, 객관적으로 방송물의 내용과 성격이 변화했다고 보기 어려운 프로그램은 신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각 방송사들은 이 기준을 토대로 채널 평가에 나설 계획이다. 2026 PP 평가는 2026년 1월 1일~12월 31일 기간을 대상으로 내년 초 이뤄지며, PP가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평가 기준은 사전에 공개된다.
채널 평가란 유료 방송사가 자사 플랫폼에 채널을 싣는 PP를 대상으로 매년 한 차례 점수를 매기는 것을 말한다. 시청률·편성·콘텐츠 투자비·제작 역량·운영 능력 등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채널 평가 점수는 이듬해 재계약 여부와 채널 번호, 콘텐츠 사용료 배분 등에 영향을 준다. 낮은 점수를 받으면 채널이 뒷번호로 밀리거나 계약이 끊길 수 있어, PP에게 채널 평가는 생존과 직결된다.
채널 평가 가운데 '편성'(30점)은 신작이 얼마나 많은지를 점수로 매긴다. 국내 유료 방송 가운데 최초로 방송된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합쳐, 가 등급(7.5점)에서 마 등급(1.5점)으로 나눈다. 기존 방송을 재탕하지 않고 새 콘텐츠를 편성할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구조다.
문제는 기존 방송물에 AI로 값싸게 더빙·자막만 입혀 '새 방송'으로 둔갑시키면 실제로는 재탕인데도 신작 점수를 챙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 유료 방송사 관계자는 "최근 정량 평가 기준의 한계를 노린 단순 짜깁기나 부자연스러운 AI 더빙 등 시청자 편익을 저해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모든 유료 방송사가 공통 기준을 마련해 제재 조치를 시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다른 유료 방송사 관계자는 "일부 PP 채널이 신작 방송 비율을 높여 채널 평가 고득점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AI를 단순 활용한 영상을 비인기 시간대에 편성했다"며 "IPTV·케이블TV·위성방송 사업자 협의로 이번 규정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유료 방송사 관계자는 "대형 PP는 아니고 일부 중소 PP에서 편법을 노리고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나왔다"고 했다.
AI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채널 평가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2026 PP 평가 기준 세부사항에는 "상당한 수준의 더빙 대본 수정이나 성우 변경 등을 통해 내용이 실제로 바뀐 경우는 신작으로 인정한다"는 조항도 함께 새로 담겼다. 인력과 비용을 들인 재제작은 인정하되, 낡은 방송에 AI 자막만 덧댄 조악한 재가공물만 걸러내겠다는 취지다.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유료 방송의 위기감이 자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시청자가 옮겨가며 가입자 성장이 정체된 가운데, 양질의 콘텐츠에 집중하려는 업계가 저품질 재가공물을 걸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료 방송사와 PP 모두 양질의 콘텐츠로 미디어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