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에서 신규 지식재산권(IP) 확보와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를 위한 연구개발(R&D)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실적이 양호한 게임사들은 확보한 현금을 바탕으로 R&D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실적이 부진한 업체들도 비용 효율화에 나서면서 R&D만큼은 줄이지 않는 모습이다. 당장의 수익성보다 기술력과 신작 경쟁력 확보에 베팅하는 전략이다.
3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R&D 비용을 가장 큰 폭으로 늘린 게임사는 크래프톤이다. 크래프톤은 올 상반기 R&D에 4268억원을 투입했다. 전년 동기(2861억원)보다 49.2%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매출은 2조6616억원으로 73% 이상 증가했다. 이에 따라 R&D 투자액을 대폭 확대했음에도 매출 대비 R&D 비용 비중은 16.0%로 나타났다. 가파른 매출 성장을 바탕으로 투자 확대에 따른 비용 부담을 흡수했다.
크래프톤은 AI를 게임 제작 보조 도구를 넘어 콘텐츠와 시스템 자체에 적용하는 연구를 확대하고 있다. 게임 특화 강화학습과 로컬 거대언어모델(LLM), 인터랙티브 스토리 생성, 페르소나 기반 챗봇과 함께 생성형 AI 게임엔진과 월드모델 기반 예측 기술도 개발 중이다. 여기에 크래프톤은 '빅 프랜차이즈 IP' 전략에 따라 신규 IP를 발굴하고 검증된 IP를 확장하고 있다. 2027년까지 순차 출시할 신작 제작이 본격화하면서 관련 투자도 늘었다.
올해 최대 화제작 '붉은사막'을 선보인 펄어비스도 R&D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올 상반기 R&D 비용은 79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30.2% 늘었다. 다만 매출 대비 R&D 비용 비중은 15.3%로 전년 동기(37.5%)의 절반 정도로 낮아졌다. 이는 검은사막 이후 11년 만의 대형 신작인 붉은사막이 흥행하면서 상반기 매출이 5211억원으로 339.3% 급증한 결과다. R&D 투자를 늘렸지만, 매출이 더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비용 부담은 오히려 낮아졌다.
펄어비스의 R&D는 AI보다 자체 게임엔진과 신작 개발 기술 고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요 연구 과제도 PS5용 레이트레이싱 기술과 렌더링 품질 개선, 게임 내 물리 현상 구현 등 차세대 게임엔진인 '블랙스페이스 엔진'의 성능 향상에 집중돼 있다. 사옥 '홈 원'에는 모션캡처실과 3D 스캔 스튜디오를 구축했으며, 별도의 아트센터와 자체 폴리사운드 작업실을 갖춘 오디오실도 운영하고 있다.
엔씨의 올 상반기 R&D 비용은 2129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32.2% 늘었다. 엔씨는 신작과 기존 IP 고도화에 투자를 집중하는 한편, 지난해 2월 사내 AI 조직을 물적분할해 설립한 엔씨AI를 통해 AI 기술의 독립 사업화도 추진하고 있다. 같은 기간 넷마블의 R&D 비용은 2969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2% 감소했지만, 크래프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넷마블은 'AI&테크랩'을 중심으로 게임 아트·애니메이션 생성과 플레이 봇, 품질관리(QA) 자동화 등 AI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매출이 감소한 게임사들도 R&D 투자는 유지하거나 확대했다. 카카오게임즈의 올 상반기 R&D 비용은 80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 감소했다. 같은 기간 매출이 2387억원에서 1579억원으로 33.8% 급감한 점을 고려하면 R&D 투자는 사실상 전년 수준을 유지한 것이다. 넥슨게임즈는 매출 감소와 영업 적자에도 R&D 투자를 확대했다. 올 상반기 R&D 비용은 452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2.0%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매출은 899억원으로 7.7% 감소했다.
국내 게임사들이 R&D를 확대하는 배경에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차별화된 기술력과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떠올랐다. 특히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는 언리얼 엔진5와 유니티 기반 렌더링 기술의 고도화, 클라우드 게이밍 확산 등으로 개발·서비스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신작 개발 기간은 길어지고 이용자가 요구하는 그래픽과 콘텐츠 수준도 높아지면서 자체 엔진과 AI 기술에 대한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분석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고 R&D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며 "특히 생성형 AI 등 혁신 기술을 게임 개발과 서비스에 얼마나 빠르게 접목하느냐가 향후 게임사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