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확산으로 메모리가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면서 중앙처리장치(CPU) 강자인 인텔이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에 다시 힘을 싣고 있다. 과거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제조 사업에서는 철수했지만, AI 시대 연산 칩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메모리와의 연결·적층 기술에 투자를 확대하는 모습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립부 탄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테크서지(TechSurge)' 팟캐스트 방송에서 메모리는 더 이상 단순한 범용 제품이 아니며 차세대 메모리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탄 CEO는 CPU와 메모리를 직접 쌓는 방식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구체적인 메모리 사업 계획은 공개하지 않았다.

AI 반도체에서는 연산 칩 자체의 속도만 높여서는 성능 향상에 한계가 있다. AI 모델이 커지면서 처리할 데이터가 급증해 메모리가 이를 얼마나 빠르게 공급하느냐가 전체 시스템 성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연산 속도를 메모리의 데이터 전송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메모리 벽(Memory Wall)'이 부각되면서 여러 장의 D램을 수직으로 쌓은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 가속기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립부 탄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작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포럼 2025'에서 발표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 인텔, 차세대 메모리 기술 투자 확대

인텔이 개발에 참여 중인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는 'XBM(Cross-Batch Memory)'과 'ZAM(Z-Angle Memory)'이 있다. 두 기술 모두 대량의 데이터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접근 방식은 다르다.

XBM은 HBM의 복잡하고 비싼 패키징 구조를 개선하려는 차세대 메모리 구상이다. 현재 HBM은 GPU와 메모리를 실리콘 소재의 연결판인 '인터포저' 위에 나란히 배치해 데이터를 주고받는다. XBM은 칩 간 고속 연결 기술을 활용해 이런 패키징 부담을 낮추는 새로운 구조를 제안한다. 다만 아직 특허를 통해 개념이 공개된 단계로 구체적인 제품화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ZAM은 D램을 수직으로 촘촘하게 쌓아 용량과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기술이다. 인텔은 소프트뱅크 자회사 사이메모리(SAIMEMORY)와 ZAM 상용화를 위한 공동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사이메모리는 2027 회계연도에 시제품 제작을 거쳐 2029 회계연도에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탄 CEO가 메모리 기술을 설명하면서 지난 6월 영입한 이석희 수석부사장(전 SK하이닉스 CEO)을 언급한 점도 눈에 띈다. 그는 인텔에서 첨단 패키징과 시스템 통합, 후공정 기술 개발 및 생산을 총괄한다. 인텔은 이 수석부사장 영입 당시 로직과 메모리, 네트워킹 등을 긴밀하게 결합하는 시스템 통합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 메모리로 출발한 인텔… 사업 복귀 가능성도 주목

인텔은 1970년대 초기 상용 D램 시장을 연 '1103'을 출시하며 메모리 반도체로 성장한 회사다.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이 거세지자 1985년 D램 사업에서 철수하고 CPU에 집중했다. 이후에도 낸드플래시 사업을 이어갔고, 마이크론과 '3D 크로스포인트(3D XPoint)'를 공동 개발해 '옵테인'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옵테인 사업을 중단하고 낸드 사업도 SK하이닉스에 매각하면서 현재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처럼 D램이나 낸드를 대량 생산하는 메모리 제조사는 아니다.

메모리 제조에서 손을 뗀 뒤에도 관련 기술 연구는 이어왔다. 특히 여러 종류의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빠르게 연결하는 첨단 패키징은 인텔이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분야다. 인텔은 최근에도 AI 반도체용 2.5D·3D 적층과 칩 간 연결 기술을 주요 파운드리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AI 확산은 인텔이 다시 메모리에 눈을 돌릴 유인을 키우고 있다. CPU나 GPU의 연산 성능만 높여서는 한계가 있고, 연산 칩과 메모리를 얼마나 가깝고 빠르게 연결하느냐가 전체 성능과 전력 효율을 좌우하게 됐기 때문이다. XBM·ZAM과 CPU 위에 메모리를 직접 쌓는 구상도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이에 향후 인텔이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을 넘어 메모리 사업에 다시 뛰어들 가능성도 거론된다. 탄 CEO는 아직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밝히지 않았지만, 메모리 구조의 혁신 가능성을 강조하며 관련 기술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실제 D램 제조 재진출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인텔이 메모리 사업의 보폭을 넓힐 경우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기존 메모리 업체들의 경쟁 구도에도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에서는 연산 칩과 메모리 사이의 데이터 이동 속도와 전력 효율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며 "인텔이 범용 D램 양산에 다시 뛰어든다고 보기는 이르지만, 메모리 기술을 핵심 사업 영역으로 키울 가능성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