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확산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국내외 소프트웨어(SW) 기업들이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기존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던 일부 기능을 직접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외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자사 SaaS 제품 위에 AI 에이전트 플랫폼을 구축하거나 챗GPT·클로드·제미나이 등 주요 AI 챗봇과의 연동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지난 5월 36년 만에 사명을 '한컴'으로 바꾸고 '한국어 문서 처리 기업'이라는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AI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래아한글(HWP)'로 대변되는 문서 편집 소프트웨어만으로는 AI 시대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연수 한컴 대표는 "AI 에이전트의 운영을 총괄하고 조율하는 '소버린 에이전틱 운영체제(OS)' 기업으로 전환하겠다"고 말했다. 소버린 에이전틱 OS란 여러 AI 에이전트를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이다.
올해 상반기 한컴의 AI 제품 매출이 135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AI 매출(89억원)을 넘어서는 등 AI 전환 성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회사는 유럽 시장을 공략해 에이전틱 OS 사업을 확대하고, AI 관련 매출도 전체의 20%까지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최근에는 자체 개발한 에이전틱 OS를 프랑스 로봇 기업 샤크로보틱스의 소방 로봇에 탑재하기로 했고, 폴란드 국가공인 연구개발(R&D) 기관인 7불스·AI 기업 알고마인과 손잡고 유럽형 소버린 에이전틱 OS 개발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도 AI 시대 생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세계 1위 고객관계관리(CRM) 소프트웨어 기업 세일즈포스는 AI 에이전트 플랫폼 '에이전트포스'를 출시해 고객의 CRM 업무를 자동화했다. 기존 CRM 소프트웨어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였다면, 에이전트포스는 AI 에이전트가 사람 대신 실제 업무를 수행한다. 이에 맞춰 과금 방식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직원 수 기반에서 AI 에이전트가 수행한 작업량에 따른 사용량 기반으로 바꿨다.
올해 1분기 에이전트포스의 연간반복매출(ARR)은 12억달러(약 1조7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 에이전트포스와 업무용 협업 도구 '슬랙'에서 AI 에이전트가 수행한 업무도 누적 38억건에 달했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실적 발표 직후 "AI 에이전트는 플랫폼 사용량을 늘리는 새로운 원천"이라며 "소프트웨어의 경제 모델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어도비도 챗GPT, 클로드,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 등 주요 AI 챗봇과의 연계를 통해 어도비 도구 지원을 확장해왔다. 최근 어도비는 챗GPT에서 포토샵을 비롯한 자사 주요 제품의 기능 70개를 사용할 수 있는 '챗GPT 내 어도비 플러그인'을 출시했다. 이용자가 챗GPT에서 원하는 작업을 자연어로 대화하듯 요청하면 AI가 사진 편집, 영상 제작, 디자인, 문서 생성 등의 작업을 대신 처리해준다. AI 챗봇이 검색과 창작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부상하자, 어도비도 기존 이용자의 이탈을 막고 신규 이용자를 끌어들이는 생태계 확장 전략의 일환으로 AI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호주에 본사를 둔 아틀라시안도 기존 협업 소프트웨어에 AI 에이전트 '로보'를 탑재해 복잡한 업무를 자동화하도록 했다. 로보를 접목한 제품군의 수요가 늘면서 아틀라시안은 올해 4~6월(2026 회계연도 4분기) 202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익성을 기록했다. 워크데이도 최근 AI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인사·재무·행정 업무에 특화된 초지능 AI 에이전트 '사나'를 선보였다.
AI가 소프트웨어를 대체할 것이란 이른바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 공포가 이런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실제 올해 들어 세일즈포스, 어도비 등 주요 소프트웨어 기업의 주가는 최신 AI 모델 출시 소식 등의 영향으로 20% 이상 떨어졌고, 일부 SaaS 스타트업은 헐값에 매각되는 등 기업가치 하락세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발생한 인수합병(M&A) 사례도 사스포칼립스 우려를 키웠다. 이탈리아 소프트웨어 기업 벤딩스푼은 이달 업무·데이터 관리 SaaS 기업 에어테이블을 12억8500만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이는 에어테이블이 2021년 투자금 조달 당시 평가받았던 기업가치 120억달러의 약 10분의 1 수준에 그쳐, AI 시대에 SaaS 스타트업의 가치가 크게 낮아졌음을 보여주는 거래로 주목을 받았다.
AI 에이전트의 부상으로 소프트웨어의 구독 기반 수익 모델이 위협을 받으면서 생존 돌파구를 찾는 기업과 대응이 느린 기업간 격차가 벌어지는 등 산업 내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조지 브로클허스트 애널리스트는 "AI 에이전트는 소프트웨어 구축, 가격 책정, 소비 방식을 재편할 것"이라며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성장 기회를 확보하려면 AI 에이전트 기능을 자사 제품에 통합해 가치사슬 내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