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산업에 필요한 것은 정부 지원금보다 시장이다."

박재홍(61) 보스반도체 대표는 지난달 16일 조선비즈와 만나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과제로 '수요 부족'을 꼽았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도 중요하지만, 국산 반도체를 실제 사용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16일 경기도 성남 본사에서 만난 박재홍 보스반도체 대표./최효정 기자

보스반도체는 삼성전자 시스템LSI·파운드리 사업부 부사장 출신인 박 대표가 2022년 설립한 차량용 인공지능(AI) 팹리스 기업이다. 삼성전자에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맞춤형 반도체(ASIC) 사업을 이끌었던 인력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최근 87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차량용 AI 반도체 시장에서 퀄컴 중심 구도에 도전하는 토종 팹리스다.

보스반도체는 현재 차량용 AI 가속기 '이글-N(Eagle-N)'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제품은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과 자율주행, 차량 내 생성형 AI 서비스 등을 겨냥한 반도체다. 최근 자동차 업계가 단순 주행 기능을 넘어 차량 내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음성비서와 에이전틱 AI 서비스 도입에 나서면서 관련 AI 연산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보스반도체는 지난달 삼성전자 5나노 공정을 통해 이글-N 시제품 생산을 위한 테이프아웃을 완료했다. 이후 독일과 중국 완성차 고객사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성능 평가 절차에 돌입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현재 독일과 중국 고객사들이 이글-N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며 "중국은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내년 중 양산차 적용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지만, 유럽과 일본은 검증 절차가 길어 실제 양산까지 3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보스반도체가 승부수로 내세우는 것은 '칩렛(Chiplet)' 구조다. 하나의 대형 칩으로 모든 기능을 구현하는 대신 여러 개의 칩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수율을 높이고 제조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칩 크기가 커질수록 불량 발생 위험도 함께 높아진다. 반면 여러 개의 작은 칩을 연결하는 칩렛 구조는 생산 수율을 높일 수 있어 업계에서는 차세대 반도체 설계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 대표는 "AMD와 인텔 등이 데이터센터용 반도체에서 먼저 활용한 방식"이라며 "분석 결과에 따르면 칩렛 구조를 적용할 경우 제조 비용을 절반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자동차 업계에서도 칩렛 생태계 구축 움직임이 활발하다. 보스반도체는 현재 일본 자동차 업계가 주도하는 칩렛 컨소시엄과 유럽 연구기관 중심의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특정 반도체 기업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 반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박 대표는 퀄컴 주도의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대해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특정 공급사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며 "새로운 공급망에 대한 수요는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스반도체는 자동차 외에도 자율주행 농기계와 엣지 AI 시장을 새로운 성장 기회로 보고 있다. 최근 차량 내부에서도 생성형 AI와 에이전틱 AI 활용이 늘어나면서 단순 자율주행용 칩이 아닌 AI 컴퓨팅 플랫폼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박 대표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한계로 수요 기업 부족을 꼽았다. 그는 "팹리스 산업은 누군가 제품을 써줘야 성장할 수 있다"며 "정부가 팹리스 기업에 직접 지원금을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국산 반도체를 채택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과 중국 고객사들은 기업 규모보다는 기술력과 사업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역시 공급 기업과 수요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팹리스 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기술 개발뿐 아니라 실제 적용 사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장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며 "수요 기업과 공급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과제"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박 대표와의 일문일답.

―이글-N 개발은 현재 어느 단계까지 왔나.

"올 7월 삼성전자 5나노 공정을 통해 테이프아웃을 진행했다. 이후 독일과 중국 완성차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평가에 들어간다. 차량용 반도체는 평가와 검증 절차가 중요하다. 고객사들이 실제 차량 환경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양산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상용화 시점은 언제쯤으로 보고 있나.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중국은 의사결정 속도가 빠른 편이라 내년 중 양산차 적용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다. 반면 유럽과 일본은 검증 절차가 길다. 보통 3년 이상 걸린다. 차량용 반도체는 한번 채택되면 오랜 기간 사용되는 만큼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보스반도체가 내세우는 차별화 포인트는 무엇인가.

"가장 큰 차별점은 칩렛 구조다. 기존에는 하나의 큰 칩으로 구현하던 기능을 여러 개의 칩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칩이 커질수록 수율이 떨어지는데 칩렛 구조는 수율을 높일 수 있다. 우리는 자동차 반도체 분야에서 칩렛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칩렛 구조의 경제성은 어느 정도인가.

"AMD나 인텔 등의 사례를 분석하면 제조 비용을 절반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는 결과가 있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자동차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칩렛 생태계 구축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 역시 특정 기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칩렛을 중요한 기술로 보고 있다."

―자동차 외에도 적용 가능한 시장이 있나.

"자율주행 농기계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자동차 안에서도 생성형 AI와 에이전틱 AI 활용이 늘어나고 있다. 운전자와 대화하거나 예약 서비스를 수행하는 기능들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이글-N은 자율주행뿐 아니라 엣지 AI 반도체로도 활용할 수 있다."

―스타트업으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보수적이다. 고객사들은 보통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회사를 원한다. 우리는 아직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신뢰를 확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과거 프로젝트 경험과 업계에서 쌓아온 평판을 바탕으로 고객들을 설득하고 있다."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원금보다 시장이다. 제품을 실제 사용해주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 시장에서 피드백을 받고 제품을 개선하는 과정이 반복돼야 경쟁력이 생긴다. 그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해외 고객사들과 협업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독일과 중국 고객사들은 기업 규모보다 기술력과 사업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좋은 기술과 제품이 있다면 스타트업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 국내에서도 수요 기업과 공급 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