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조사들의 인공지능(AI) 활용 방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폐쇄형 환경과 자체 개발 솔루션에 무게를 두던 기업들이 챗GPT(오픈AI)·클로드(앤트로픽)·제미나이(구글) 같은 외부 모델을 사내로 끌어들이며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겁니다. 검색·요약·질의응답에 머물던 생성형 AI가 코딩·검증·프로그램 실행까지 맡는 에이전트(비서)로 진화하면서, 내부 솔루션과 최상위 범용 모델의 성능 격차가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제조 현장에서 다루는 설계도와 공정 조건, 제품 개발 정보는 밖으로 새는 순간 막대한 사업 손실이나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처럼 한국 경제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큰 분야에서는 일부 핵심 역량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엄격하게 관리합니다.
국내 제조사들은 이 때문에 그동안 범용 생성형 AI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사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모델과 폐쇄형 업무 체계를 구축하는 데 상대적으로 힘을 실었습니다. 민감한 내용을 외부 서비스에 입력하면 해당 정보가 사업자 서버로 전송·처리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큰 만큼, 전환에 따른 효율은 취하되 핵심 데이터는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자체 시스템을 회사 업무에 맞게 최적화하고, 자료 검색이나 문서 작성·요약처럼 위험을 관리하기 쉬운 영역부터 범위를 순차적으로 넓히며 다른 업종보다 비교적 천천히 변화해 온 거죠.
최근에는 이런 계산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에서 AI 전환을 담당하는 직원은 "최상위 모델이 단순 답변을 넘어 도구 호출을 거쳐 복잡한 추론·코딩 등 여러 작업을 연속 수행할 수 있도록 성능을 높이고 있는데, 자체 기술만으로 이런 개선 속도를 따라가려면 막대한 개발비와 인력 부담이 상당히 크다"고 했습니다.
이제 제조 기업은 보안을 위해 외부 AI를 차단해 얻는 이익과, 받아들이지 않아 포기해야 하는 효율을 함께 따져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입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4월 산업 운영이 기존 자동화에서 '지능형·연결형·점점 더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 전문 업무까지 적용… 개발·검토 시간 단축
최근 삼성의 'AI 대전환' 선언은 이런 변화가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난 사례로 꼽힙니다. 지난 6월부터 연구개발(R&D), 생산, 마케팅, 지원 등 관계사 업무 전반에 AI를 접목하고 있죠.
구체적으로 삼성전자 DX(완제품)부문은 약 2500명을 대상으로 실효성을 검증한 뒤 챗GPT·제미나이·클로드 3종을 도입했습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는 지난 5월 소프트웨어 인력을 중심으로 클로드 코드를 개방한 뒤 고객 맞춤형 시스템온칩(SoC) 기능 검증과 관련 프로그램 선행 작업으로 적용 대상을 넓혔습니다. SoC 기능 검증에서는 한 달 이상 걸리던 일부 과정이 이틀 안팎으로, 반도체용 소프트웨어 선행 개발은 약 4주가 필요했던 업무가 하루 수준으로 줄어드는 사례도 나왔습니다. 외부 모델을 전문 영역에 투입한 지 석 달 만에 구체적인 효율화 성과가 확인된 셈입니다.
LG전자도 외부 AI 활용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 2023년부터 사내 플랫폼 '엘지니(LGenie AI)'에 기업용 챗GPT 등을 탑재했습니다. 올 상반기엔 파일럿을 거쳐 마이크로소프트(MS)의 M365 코파일럿·클로드 등을 도입해 직원들이 직무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자체 고도화도 병행해 부품 탐색 에이전트 '파트리버(Part-Riever)'로 수일 걸리던 검토를 약 30분으로 줄이는 성과도 냈죠.
현대차그룹은 보호된 환경에서 챗GPT·제미나이·클로드를 이용하는 'H 챗 프로(Chat Pro)'를 운영합니다. 작년 일반직 전체에 개방했으며 지난달 활성 사용자는 3만명을 넘어 현대차·기아의 약 80%에 이르렀습니다.
반도체 설계 업계도 같은 방향입니다. 회로 설계와 오류 검증, 배치·배선 등에 쓰는 핵심 소프트웨어인 전자설계자동화(EDA)를 공급하는 케이던스·시높시스·지멘스 EDA는 올해 상반기 외부 최상위 모델을 자사 도구에 연결하는 기술을 내놨습니다. 케이던스는 네모트론·제미나이, 시높시스는 네모트론 3 울트라를 각각 연동했습니다. 지멘스의 '퓨즈 EDA 인공지능 에이전트(Fuse EDA AI Agent)'는 챗GPT·제미나이·클로드 등을 지원합니다.
◇ AI 도입 느렸던 제조업… "쓰는 현장에선 하루 3시간 넘어"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 따르면 2023년 국내 제조업의 AI 도입률은 25.4%로 전체 업종 평균 30.3%보다 낮았습니다. 2024년 8~10월 조사에서도 제조사의 83.5%는 1~2개 부서나 개별 프로젝트에서만 썼고, 회사 전반의 운영·의사결정에 폭넓게 적용한다는 응답은 2.8%에 그쳤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이용 강도가 달라졌습니다. 삼성SDS가 5월 국내 기업·공공기관 재직자 1750명을 조사한 결과 공정 제조업 종사자는 하루 평균 3.37시간 이용했습니다. 조립 분야는 3.30시간으로 집계됐고, 전체 평균은 3.25시간이었습니다. IT·통신은 3.80시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전체 응답자 중 하루 2시간 이상 생성형 AI를 쓴다는 비율도 작년 11월 18%에서 올해 5월 72%로 54%포인트 높아져 4배 수준이 됐습니다.
학계에서도 AI가 제조업의 숙련 장벽을 낮출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홍콩이공대와 COMAC 상하이항공제조 연구진이 작년 12월 '저널 오브 매뉴팩처링 시스템스(Journal of Manufacturing Systems)'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LLM 기반 로봇 시스템을 활용하면 프로그래밍 경험이 적은 작업자도 항공기 패널 천공 같은 복잡한 공정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 SK하이닉스는 내부형 유지… 빨라진 만큼 오류·통제 부담도 커져
다만 모든 제조사가 외부 AI 모델 채택에 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자체 구축한 'LLM챗'을 내부 데이터와 반도체 지식 검색, 질의응답 등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사 측은 외부 모델도 보안 우려가 낮은 분야부터 가능성을 살피는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삼성전자도 보안 문제에는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DS(반도체)부문은 2023년 챗GPT 사용을 허용한 직후 임직원이 설비 계측과 수율·불량 관련 프로그램 소스코드, 회의 내용을 개인용 서비스에 입력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핵심기술 등 민감 정보를 다루지 않는 곳부터 외부 모델을 활용하며 허용 기준과 통제 방식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직접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움직이면 사고 범위도 커질 수 있습니다. 오픈AI는 지난달 안전장치를 일부 완화한 사이버 평가에서 GPT-5.6 Sol 등이 격리 환경을 벗어나 허깅페이스 인프라를 침해한 사건을 공개했습니다. 영국 국가사이버보안센터(NCSC)도 지난 5월 에이전틱 AI를 도입하는 조직에 최소권한 원칙과 행동 범위 제한, 이상 징후 감시를 권고했습니다. 반복적이며 위험도가 낮은 업무부터 작게 시작하라는 게 NCSC의 조언입니다.
제조 대기업의 한 임원은 "챗봇 시기에는 틀린 답을 걸러내는 게 숙제였다. 에이전트 단계에선 잘못된 행동을 어디에서 멈출지도 정해야 한다"며 "생산성과 통제력을 함께 확보하는 능력이 새로운 AI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