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앤트로픽의 대규모언어모델(LLM) '클로드'를 도입해 일부 반도체 설계·검증 작업 기간을 대폭 줄인 것으로 확인됐다.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에게 클로드의 AI 코딩 도구 '클로드 코드'를 우선 개방한 지 약 석 달 만에 개발 현장에서 구체적인 효율 개선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고객 맞춤형 시스템온칩(SoC·프로세서와 메모리 제어장치 등 여러 기능을 하나의 칩에 집적한 반도체) 검증에서 한 달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작업이 이틀 만에 끝났고, 입사 2년 차 엔지니어가 한 달 이상 걸릴 수 있던 개발 업무를 하루 만에 마친 사례도 나왔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적은 설계 인력을 보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례로 퀄컴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SoC 시장에서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와 경쟁하는 업체다.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 인력은 업계에서 6000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반면 퀄컴은 작년 9월 기준 약 5만2000명의 인력을 두고 있어 전체 조직 규모로는 9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12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는 클로드를 고객 맞춤형 SoC의 기능 검증과 반도체 개발용 소프트웨어 선행 개발 등에 활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을 대상으로 클로드 코드를 우선 개방한 뒤 반도체 전문 개발 업무로 사용 범위를 넓혔다. 이어 제미나이·챗GPT 등 외부 생성형 AI까지 활용 대상을 확대하고, 연구개발(R&D)부터 생산·마케팅·지원까지 전 관계사의 모든 업무에 AI를 도입하는 'AI 대전환'을 공식화했다.
앤트로픽이 개발한 클로드 코드는 일반적인 문답형 생성형 AI와 달리 프로그램의 전체 코드 구조를 읽고 파일을 수정하거나 명령을 실행할 수 있다. 반도체 개발에서는 회로 설계 자료와 검증용 프로그램, 통신 규격 등을 바탕으로 검증 코드를 만들고 시험 환경을 구축하는 데 활용된다. 모바일 AP와 이미지센서 등을 설계하는 시스템LSI사업부는 클로드를 도입해 반복 업무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시간을 줄여 기존 인력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있다.
◇ 설계 자료 늦어져도 검증 가능… 한 달 넘던 작업 이틀로 줄여
시스템LSI사업부는 최근 고객 맞춤형 SoC의 데이터 연결 구조를 검증하는 프로젝트에서 한 달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검증 환경 구축과 검증을 이틀 만에 끝냈다. 내부적으로 작업 속도가 약 15배 빨라진 것으로 평가했다.
프로젝트는 고객사가 새로운 반도체 구조를 요구한 데다 외부 업체의 설계자산(IP)을 사용해 조건이 까다로웠다. 표준화된 설계 자료가 일부 없었고, 검증에 필요한 D램 컨트롤러의 RTL(Register Transfer Level·디지털 회로의 동작과 데이터 흐름을 코드로 표현한 설계 자료)도 예정된 시점에 나오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이 공백을 클로드 기반 AI로 메웠다. 확보한 SoC 설계 정보와 칩 내부 통신 규격, 전자설계자동화(EDA) 업체의 검증용 IP 정보를 클로드 기반 AI에 입력했다. AI는 검증용 IP가 필요한 위치를 찾아 배치·연결하고 가상 검증 환경과 시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D램 컨트롤러 설계가 나오지 않은 부분에는 검증용 가상 블록을 연결해 핵심 데이터 경로부터 검사했고, 실제 RTL이 나오기 전에 초기 오류도 찾아냈다. 검증 대상은 64개의 데이터 경로가 얽힌 복잡한 구조였는데, 검증 환경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는 사람이 반복 작업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수작업 오류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내부 평가다.
◇ 낯선 규격 사용해야 하는 개발 업무… 입사 2년 차가 하루 만에 수행
AI가 엔지니어의 경험과 전문지식 차이를 줄인 사례도 있었다. 실제 반도체가 나오기 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에뮬레이터 안에 키보드와 마우스 등 범용직렬버스(USB) 기기의 동작을 가상으로 구현해야 한다. EDA 업체가 제공하는 것은 기본 데이터 전달용 참고 코드 수준이어서 엔지니어가 USB 통신 규격을 익혀 기기별 모델을 별도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 업무를 입사 2년 차 엔지니어에게 맡기며 클로드 코드를 활용하도록 했다. 해당 직원은 바이브 코딩이나 클로드 코드 사용 경험이 없었다. USB 통신 규격을 새로 익히고 기기별 모델을 개발하는 데 통상 한 달이 걸린다고 한다.
이 직원은 클로드 코드에 만들고 싶은 기능과 USB 참고 코드를 입력했다. 클로드는 요구사항을 구체화하고 구현 방식과 코드를 제시한 뒤 수정까지 지원했다. 그 결과 키보드·마우스 모델 제작과 동작 확인은 하루 만에 끝났고, 이를 활용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의 USB 장치 드라이버 개발까지 마쳤다.
◇ SoC 적자·퀄컴 의존 부담… AI로 설계 인력 생산성 높인다
시스템LSI사업부는 AI로 구조적인 사업 과제를 풀려 하고 있다.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사장)은 지난 6월 경영현황 설명회에서 올해 1분기 역대 최고 수준의 매출을 달성했지만 SoC 사업 부진으로 연간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퀄컴 등 경쟁사보다 적은 설계 인력이 시스템LSI의 실적 부진을 낳은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지난달 공개된 갤럭시 Z 폴드8과 폴드8 울트라에는 전량 퀄컴 스냅드래곤이 들어갔고, 갤럭시 워치9과 워치 울트라2도 기존 엑시노스 대신 퀄컴 칩을 채택했다. 시스템LSI사업부는 AI 도입으로 반복적인 연결·검증과 규격 습득 시간을 줄여 숙련 엔지니어를 고난도 업무에 집중시키고, 경력이 짧은 직원은 더 빠르게 담당 영역을 넓히는 식으로 이런 격차를 줄이려 하고 있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의 AI 활용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3월 아날로그·로직 반도체 설계에 AI를 적용해 일부 설계 시간을 50%가량 줄였다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메모리사업부가 공정설계키트(PDK·반도체 공정 정보를 설계에 반영하는 기준 자료)를 공정 변화에 맞춰 다시 조정하는 시간을 95% 이상 줄여 실제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다만 생성형 AI는 작업 범위와 결과를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내부 평가도 있다. 한 검증 작업에서 오류를 수정하라고 지시하자 AI가 원인을 고치는 대신 오류 메시지를 일반 정보 메시지로 바꾼 사례가 나왔다. 또 특정 기능만 되돌리라는 요청에는 앞서 완료한 다른 작업까지 함께 원상복구했고, 검증 결과를 분석하도록 했는데 실제 회로 설계 코드인 RTL까지 수정하려 한 사례도 있었다. LLM이 하드웨어 설계 언어의 복잡한 의존 관계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문제라는 게 내부 평가다.
소프트웨어는 출시 이후에도 업데이트로 오류를 수정할 수 있지만 반도체는 양산 뒤 설계 결함을 되돌리기 어렵다. 삼성전자는 사람이 AI의 작업 범위를 정하고 결과를 다시 검증하면서 활용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이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LLM 기반 에이전트는 빠르지만 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하던 여러 수작업 단계를 줄여 전체 개발 시간을 단축하고, 엔지니어는 목표 설정과 최종 검증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