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가 인공지능(AI) 시스템에 '나는 이제 자러 간다. 이 작업을 끝내라'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검증하고, 디버깅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쳐라. 내게 질문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죠. 마치 부하 직원에게 밤새 할 일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앵커 굽타 지멘스 전자설계자동화(EDA) 집적회로(IC) 제품 부문 수석 부사장은 11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지멘스 EDA 포럼 서울 2026'에서 이같이 말했다. EDA는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고 오류와 성능을 검증하는 소프트웨어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AI와 EDA의 결합으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으로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꼽았다. AI가 보조 도구를 넘어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멘스 EDA는 목표를 주면 여러 AI 에이전트가 역할을 나눠 설계·검증을 이어가고, 결과도 반도체 물리 법칙을 반영한 엔진으로 다시 확인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 대화형 AI서 '밤샘 검증' 에이전트로
굽타 수석 부사장은 "이제 고객들은 몇 년이 아니라 몇 달마다 새로운 기능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멘스는 작년 6월 AI와 자연어로 대화하며 EDA 도구를 쓰는 '퓨즈(Fuse)'를 내놨다. 퓨즈는 AI 모델과 지멘스 EDA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올해 3월 단일 AI 에이전트를 적용했고, 지난달에는 여러 에이전트가 협업해 장시간 작업하며 결과까지 스스로 검증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이런 기능을 추가하면서 반도체 기본 셀의 전력과 속도를 온도·전압·공정 조건별로 계산하는 '셀 특성화' 작업도 자동화했다. AI 에이전트가 필요한 파일과 도구를 찾아 계산·검증하고, 문제가 생기면 디버깅(오류 원인 분석)을 거쳐 수정까지 반복한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사람이 중간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특성화하고 검증하고 디버깅한 뒤 문제가 있으면 수정하라는 하나의 지시로 작업할 수 있다"고 했다.
AI가 만든 결과는 수학적 알고리즘과 반도체 물리 법칙을 반영한 EDA 엔진으로 재검증한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반도체에서는 작은 오류 하나도 칩 실패나 수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가 복잡해질수록 검증 부담도 커진다. 지멘스는 2000억개가 넘는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설계와 100W/㎠를 웃도는 열 밀도 등이 등장하면서 기존 방식만으로 개발 속도를 맞추기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서로 다른 종류와 공정에서 만든 칩을 한 패키지에 묶는 '이종 집적' 확대도 설계와 검증의 복잡도를 높인다. 지멘스는 AI 기능을 갖춘 반도체도 빠르게 늘어 2028년 전체 칩의 70%에 AI 연산 가속 기능이 탑재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멘스에 따르면 기능 검증용 '퀘스타(Questa)'와 반도체 테스트용 '테센트(Tessent)'를 함께 쓰면 자동 테스트 패턴 생성(ATPG·반도체 결함을 찾는 검사 패턴을 자동 생성하는 기술) 시뮬레이션 속도를 기존보다 3~5배 높일 수 있다.
◇ 엔비디아와 협력하되 AI 모델은 '개방형'
지멘스는 AI EDA 고도화를 위한 핵심 파트너사로 엔비디아를 택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GPU 제조사이면서 쿠다(CUDA·GPU 연산용 소프트웨어 플랫폼)를 오랫동안 구축했고, EDA 업체가 코드를 이전해 AI 에이전트 시스템에 연결할 기반을 갖췄다"고 말했다.
지멘스는 엔비디아의 오픈 AI 모델 네모트론(Nemotron)을 활용하는 동시에 퓨즈에는 오픈AI·구글·앤트로픽 등의 AI 모델도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AI 생태계에서 한 가지 모델에만 의존하면 혁신 속도는 느려질 것"이라며 "처음부터 고객이 원하는 모델을 가져와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지멘스는 이런 개방형 구조와 검증용 EDA 엔진을 경쟁력으로 내세웠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시높시스·케이던스 등 경쟁사와의 차이에 대해 "에이전트 시대에는 여러 에이전트가 서로 다른 도구와 대화할 수 있어 하나의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다"며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높은 품질의 EDA 엔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기업 지멘스는 2007년 이후 소프트웨어 분야에 250억유로(약 40조8100억원) 이상을 투자하며 관련 역량을 꾸준히 쌓아왔다. 2017년에는 미국 EDA 업체 멘토그래픽스를 인수하며 사업 영역을 대폭 넓히기도 했다.
지멘스의 2026 회계연도 3분기(4~6월) 매출은 207억9400만유로(약 33조94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7% 증가했다. 지멘스가 주요 산업 사업부의 수익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쓰는 산업사업 이익은 35억2400만유로(약 5조7500억원)로 25% 늘었다. EDA가 속한 디지털 인더스트리 매출은 49억3200만유로(약 8조500억원)로 12%, 사업 이익은 9억2300만유로(약 1조5100억원)로 44% 증가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최근 분기 EDA 사업이 30% 이상 성장했다며 "많은 고객이 한국 기업"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메모리뿐 아니라 AI 칩과 가속기 설계에서도 선도적인 시장"이라며 "한국 고객과 협력해 AI 시대에 필요한 제품을 더 빠르게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