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폭메모리(HBM) 호황을 맞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채용을 이어가면서 국내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의 핵심 설계 인력이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연봉과 성과보상 경쟁력이 높아진 메모리 대기업으로 경력직이 집중되면서 업계에서는 "메모리 기업이 인재 블랙홀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주요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에서는 7~12년 차 책임·수석급 설계 인력의 이직이 잇따르고 있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한 주요 디자인하우스에서는 에이스급 설계 인력 10여 명 이상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이동했다"며 "프로젝트를 이끌던 핵심 인력이 한꺼번에 빠지면서 일정과 인력 운영에 차질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세미콘 코리아 2026 인아오리엔탈모터 부스에 반도체 웨이퍼 이송용 원통 좌표형 로봇 등이 진열돼 있다./뉴스1

이들이 담당했던 분야는 RTL(Register Transfer Level) 설계와 DFT(Design for Test), 백엔드 설계, ASIC 검증 등이다. 모두 숙련도가 중요한 직무로 신입 인력으로 단기간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 설명이다.

다른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 관계자들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경력직 채용 공고를 내도 지원자가 많지 않고, 어렵게 채용한 인력도 대기업 제안을 받으면 이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예전보다 허리급 엔지니어 확보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공격적인 채용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국내에서 신규 직원 3201명을 채용해 전년(942명)보다 3.4배 늘렸다. 설계 직군만을 의미하는 수치는 아니지만, 제한된 국내 반도체 인력 풀을 고려하면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가 체감하는 인력 유출 압력은 상당하다는 평가다.

반면 SK하이닉스의 자발적 이직률은 지난해 0.5%에 그쳤다. 외부 경력 인력은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반면 내부 인력 유출은 제한적인 구조가 형성되면서 중소 반도체 기업의 인력난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HBM4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설계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는 점도 인재 확보 경쟁을 키우는 배경으로 꼽는다.

HBM4부터는 베이스다이에 첨단 로직 공정이 적용되고 고객 맞춤형(Custom) HBM 수요도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존 메모리 설계뿐 아니라 RTL, SoC 아키텍처, ASIC, 컨트롤러·PHY, CXL, 백엔드 검증 등 시스템반도체 역량을 갖춘 경력직 채용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핵심 설계 인력이 단기간에 양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실무 엔지니어가 독자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까지 최소 수년이 걸리는 만큼 허리급 인력 몇 명만 빠져도 테이프아웃 일정 지연이나 신규 프로젝트 수주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설계 인력은 생산직처럼 단기간에 충원할 수 있는 인력이 아니다"라며 "프로젝트 경험을 쌓은 경력 엔지니어가 빠지면 후속 인력이 자리를 메우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전문인력 부족은 이미 구조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2031년 국내 반도체 산업 필요 인력이 30만4000명까지 증가하는 반면 부족 인력은 최대 8만1000명, 이 가운데 설계를 포함한 전문인력 부족 규모는 5만4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력 공급 속도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27학년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협약 반도체 계약학과 전체 선발 인원은 460명 수준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대기업의 대규모 채용이 이어질 경우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의 인력난이 심화하고, 장기적으로 국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의 연구개발과 수주 경쟁력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