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 만점으로 보면 설치비까지 고려해 80점 정도입니다. 누진세 걱정이 줄면 90점이고, 정부 지원까지 된다면 100점이죠. 에어컨 4대를 연결해 소음이 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고, 온수도 잘 나옵니다."(제주시 도남동 자택에서 삼성전자 'EHS 올인원'을 실증 중인 양창희씨·74)
"제주는 액화석유가스(LPG)가 너무 비싸 겨울에는 보일러를 거의 못 틀고 전기히터로 공기만 데워 썼습니다. 전기와 LPG를 합쳐 월 20만원 정도에 난방비를 맞춰 살다 보니 굉장히 추웠어요. 아직 히트펌프로 겨울을 나보지 않아 정확한 평가는 어렵지만 저희 집에는 공기열 히트펌프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 바로 신청했습니다."(제주 난방 전기화 사업 1호 가구에서 'EHS 히트펌프 보일러'를 사용 중인 김은애씨·54)
이달 10일 찾은 제주시 도남동의 2층 단독주택. 낮은 담장 너머로 한라산이 보이는 집 한쪽에 낯선 기계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일반 가정용 에어컨 실외기보다 몸집이 큰 삼성전자 'EHS 올인원' 실외기였다. 1992년에 준공된 집이지만 새로운 냉난방 설비를 들이기 위해 건물 외형을 크게 뜯어고친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장비가 들어왔지만, 집 안은 기존 에어컨과 보일러를 따로 사용하는 주거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층 부엌과 안방, 2층 거실과 안방 벽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벽걸이형 에어컨 네 대가 걸려 있었다. 에어컨에서는 찬 바람이 나왔고 동시에 수도꼭지를 틀자 따뜻한 물이 나왔다. 냉방과 온수를 함께 쓴다고 어느 한쪽을 멈춰야 하는 제약도 없었다.
삼성전자는 이 집에서 국내 출시를 준비 중인 EHS 올인원을 실증하고 있다. 기존 주택에서는 냉방을 위한 에어컨 실외기와 바닥 난방·급탕을 위한 보일러를 따로 둔다. EHS 올인원은 공기를 직접 냉난방하는 공기-공기(Air to Air·A2A) 방식과 물을 데워 바닥난방·급탕에 쓰는 공기-물(Air to Water·A2W) 방식을 실외기 한 대에 합쳤다. 도남동 집에는 16㎾급 실외기 하나에 벽걸이형 에어컨 네 대와 바닥난방·온수 설비가 연결돼 있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말 설치를 마치고 7월부터 실증에 들어갔다. 내년 여름까지 약 1년간 폭염과 한파, 간절기를 모두 거치며 냉방·난방·급탕 성능과 에너지 사용량, 실제 거주자의 사용성을 살펴볼 계획이다. 실험실에서 얻은 수치가 생활 패턴과 날씨가 수시로 바뀌는 실제 가정에서도 유지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주택 외부에 설치된 대형 실외기 한 대가 여러 실내기와 난방·온수를 함께 담당했지만 가까이에서 가동음을 들어도 일반적인 가정용 에어컨 실외기보다 유난히 시끄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양씨는 "에어컨 네 대를 한꺼번에 연결하는 큰 용량이라 소음이 심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예전에는 기름이 언제 떨어질지 확인하고 온수를 쓸 때 보일러를 켰다 꺼야 했는데 지금은 온도를 설정하면 알아서 움직여 편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유럽에서 EHS 올인원을 먼저 출시했고 한국 주거 환경에 맞춘 제품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 용인 삼성물산 주거성능연구소에도 EHS 올인원을 설치했다. 실제 아파트와 비슷한 환경에서 한 층은 기존 보일러와 시스템에어컨을, 다른 층은 EHS 올인원을 가동해 냉방·난방·급탕의 성능과 에너지 사용량을 비교하고 있다.
◇ LPG 대신 전기로 난방… 제주 1호 가구 가보니
삼성전자는 제주에서 추진 중인 난방 전기화 보급사업에 참여해 'EHS 히트펌프 보일러'를 공급하고 있다. 화석연료를 태우는 LPG·기름보일러 대신 외부 공기의 열과 전기를 이용해 난방과 온수를 공급하는 제품이다. 지난 6월 제주 애월 지역 단독주택에 이 제품이 처음 설치됐다.
제주 애월의 1호 가구는 현무암 돌담 너머로 바닷가 보이는 2층 단독주택이었다. 돌담 안쪽 주택 벽면에는 일반 에어컨 실외기보다 몸집이 큰 히트펌프가 자리했고, 현관 옆에는 '난방 전기화 사업 1호 설치가구'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올인원 제품이 냉방과 난방, 급탕을 실외기 하나로 해결한다면 이곳에 설치된 EHS 히트펌프 보일러는 기존 LPG·기름보일러를 대체해 바닥 난방과 온수를 맡는다.
실외기 옆 별도로 만든 판넬 공간의 문을 열자 성인 여성 키 정도 높이의 흰색 물탱크와 굵은 빨강·파랑 배관, 펌프와 압력계가 빼곡하게 설치돼 있었다. 일반 가정용 보일러와 비교하면 밖에서 보는 설비는 크고 복잡했다. 반면 이곳에서도 집 안의 사용 환경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벽에 설치된 7형 터치 디스플레이로 현재 물 온도와 운전 상태, 월별 에너지 사용량을 볼 수 있어 편리했다. 이 제품은 삼성전자의 스마트홈 플랫폼 '스마트싱스'와 연결해 스마트폰으로도 난방과 온수를 제어할 수 있다.
김씨 가족은 난방비 부담을 덜기 위해 지난 6월 말 이 제품을 설치했다고 한다. 김씨는 "바닥을 제대로 데우려면 보일러를 오래 틀어야 하는데 비용 걱정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30평 규모 2층 집에서 전기와 LPG 비용을 합쳐 월 20만원 안팎에 맞췄지만 실내를 충분히 따뜻하게 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다. 제주 일부 단독주택에는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아 LPG나 기름보일러를 쓴다. 특히 가구 수가 적은 단독주택 지역은 LPG 단가가 더 비싸다.
아직 히트펌프로 겨울을 보내지는 않았다. 설치 후 한 달여간은 주로 온수만 사용했다. 김씨는 "온수는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쓰고 있다"며 "세 식구가 아래·위층에서 동시에 온수를 사용해도 물이 부족하거나 중간에 찬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실외기 소음도 크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실외기 팬에 수리부엉이 날개에서 착안한 구조를 적용해 최저 운전 소음을 35㏈까지 낮췄다.
◇ 에어컨이 버리던 열로 온수… 전기 1로 최대 5배 난방
히트펌프의 기본 원리는 에어컨과 같다. 가스나 기름에 직접 불을 붙여 열을 만드는 대신 냉매를 압축하고 팽창시키며 집 안팎에 존재하는 열을 이동시킨다. 여름에는 실내 열을 밖으로 내보내고 겨울에는 외부 공기가 가진 열을 끌어들인다.
신문선 삼성전자 생활가전(DA)사업부 상무는 "히트펌프에서 '펌프'는 에너지를 옮긴다는 의미"라며 "화석연료를 태워 열을 만드는 것과 달리 밖에 있는 열을 모아 이동시키기 때문에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EHS 히트펌프 보일러는 35도 출수 조건에서 계절성능계수(SCOP) 4.9를 기록한다. 전력 1만큼을 투입하면서 외부 공기에서 끌어온 열을 더해 약 5배에 가까운 난방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EHS 올인원은 여기에 냉방까지 묶었다. 눈에 띄는 기능은 '열 회수'다. 여름철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은 집 안에서 빼낸 열이다. 기존 에어컨은 이를 그대로 밖으로 버린다. EHS 올인원은 냉방 과정에서 발생한 열을 물과 다시 열교환시켜 생활 온수를 만드는 데 활용한다.
삼성전자는 에어컨과 히트펌프를 각각 설치하는 방식과 비교하면 이 같은 열 회수로 여름철 전력 사용량을 약 20%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 상무는 "여름에는 별도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에어컨을 돌리면서 버려지는 열로 따뜻한 물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 남는 전기는 '뜨거운 물'로 저장… 제주서 VPP 연계
제주에서 히트펌프를 확대하는 이유는 난방비 절감에만 있지 않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중이 높은 제주에서는 발전량이 전력 수요를 웃도는 시간이 생긴다. 남는 전기를 어떻게 활용할지도 중요한 문제다.
삼성전자는 히트펌프를 이용해 이 전기를 열에너지로 바꿔 저장하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축열식'이다. 전력이 남을 때 히트펌프를 미리 가동해 큰 물탱크의 물을 데워 놓은 뒤 필요할 때 바닥 난방과 온수에 쓴다. 배터리에 전기를 저장하는 대신 에너지를 뜨거운 물 형태로 보관하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가상발전소(VPP)와 히트펌프를 연계하는 방식도 시험 중이다. VPP는 여러 지역에 흩어진 태양광·풍력 발전 설비와 전력 소비 장치를 정보통신기술로 묶어 하나의 발전소처럼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전력이 남을 때 VPP가 히트펌프에 가동 신호를 보내 물을 미리 데우는 구조다.
축열식이 모든 주택에 가장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물을 높은 온도로 미리 데워 놓으면 탱크를 단열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열이 빠져나간다. 반대 방식인 '교번식'은 온수가 필요할 때는 온수탱크로, 난방이 필요할 때는 바닥 난방 쪽으로 물길을 바꿔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데운다.
◇ 1400만원 설치비가 관건… "보조금 없인 아직 어렵다"
가격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삼성전자가 제주 난방 전기화 보급사업을 통해 공급하고 있는 EHS 히트펌프 보일러의 제품·설치 비용은 약 1400만원이다. 정부가 70%를 지원해 소비자가 부담하는 금액은 약 420만원이다. 일반 보일러 설치 비용을 약 100만원으로 보면 보조금을 받아도 초기 부담이 수배 높다.
정부는 2035년까지 히트펌프 350만대를 보급해 온실가스 518만t을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 상무는 "보조금이 없다면 현재 수준의 산업 기반에서는 시장이 작동하기 어렵다"며 "시장이 커지고 제조사들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면서 보조금 비중을 낮추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